언어·역사·종교 등 매개로 한 푸틴 장기집권의 신 개념
요즘 매체나 인터넷에서는 지금의 러시아를 옛 소련과 많이 비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교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본다. 단순히 시대가 바뀐 것을 제외하고도 러시아와 소련 사이에는 사회의 기본을 형성하는 기둥이 많이 다르다. 비슷한 점들을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는 다른 점이 훨씬 더 많다.
‘주권 민주주의’ 버리고 ‘질서 있는 독재’ 선택한 푸틴
오늘날의 러시아가 옛 소련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확실한 이념(ideology)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조금 독특한 현상이다. 소련은 공산주의라는 뚜렷한 기치를 내걸고 움직였다. 반면 지금의 러시아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그 정당성을 뒷받침할 만한 사상적 기둥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다른 독재국가들을 살펴보면 정치적 이념(공산주의 등), 종교적 신념(이슬람 등), 민족주의나 반이민주의 등으로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 관리의 효율성을 확보하면서 장기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이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모든 국민이 일상에서 그 사상을 따르지 않더라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정권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푸틴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이런 시도를 해왔다. 특히 2008년 이후 서방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그는 소위 ‘주권 민주주의(Sovereign Democracy)’라는 낯선 개념을 내세웠다. 민주주의이긴 한데 서방식이 아니라 전통 가치를 기반으로 한 ‘러시아만의 민주주의’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구호는 어색해졌다. 러시아는 문명적으로 서방과 다르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러시아가 서방과 같은 제도를 갖춘다는 건 국민들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결국 2014년 이후 크림반도 사태를 거치면서 푸틴은 아예 ‘민주주의’라는 말을 포기했다. 그리고 서방식 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언론을 통해 “나라가 잘 살기 위해 반드시 민주주의가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손해 보는 민주주의보다 질서 있고 조용한 독재가 낫다”는 뉘앙스로 메시지를 흘리기 시작했다.
푸틴의 ‘러시아의 세계(Russkiy Mir)’라는 개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말은 2010년대 초반부터 간간이 쓰였지만 본격적인 정치적 무게를 갖기 시작한 건 2020년대다. 특히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친정부 언론들은 이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푸틴이 말하는 ‘러시아의 세계’의 요지는 과연 무엇일까?
언어와 종교 등 매개로 러시아(인)를 확장시킨 ‘Russkiy Mir’ 개념
동포 수호: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러시아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다.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어디서든 ‘러시아인의 인권이 유린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러시아가 개입해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같은 경우에는 이런 ‘인권 유린’은 우크라이나의 ‘국어법’에서 비롯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교육기관, 행정기관 등에서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어를 포함한) 그들의 언어와 함께 국어인 우크라이나어도 사용해야 한다고 정부가 발표하자 러시아는 이를 문제 삼았다.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라는 왜곡된 논리다.
언어와 문화권: 푸틴은 “러시아어를 쓰고 러시아 명절과 관습을 따른다면 민족이나 거주지는 상관없이 당신은 러시아인이다”라고 말한다. 발트 3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대표적인 대상이다. 소련 시절부터 이어진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정치·종교 공동체: 러시아는 정교회를 국교처럼 중시한다. 따라서 세계 어디에서든 정교회를 믿는 신자가 있다면 그 역시 ‘러시아의 세계’의 일원이라는 주장이다. 종교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다.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생긴 주장이다. 서방과 달리 러시아가 종교를 일상에서도 잘 지킨다는 선동 하에 낙태 금지, 동성애 금지, 이혼 언급 금지, 출산 나이 하향 격려 등과 같은 정책이 요즘 계속 나오고 있는 이유이다.
8세기 역사까지 끌어들여 현재를 정당화하는 푸틴 정권
역사적 연결성: 러시아나 소련과 역사적으로 연관된 집단은 모두 ‘러시아 세계’에 포함된다. 중앙아시아나 동유럽은 물론, 멀리 알래스카의 구교 신자(러시아 정교회 개혁을 거부한 종교 공동체)까지 예로 든다. 푸틴은 자기 자신이 대단한 역사가처럼 많은 활동(칼럼, 기사, 책 챕터 등)을 하는데, 매번 거의 모든 사실을 왜곡하거나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역사 전문가를 지적한다. 8세기나 10세기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현 정책을 정당화 하는 것은 현 러시아 정부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수단이다. 한국으로 입장을 바꿔서 말하면 ‘고구려 시절에 이랬으니까 대한민국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는 푸틴의 희한한 역사 해석(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의 민족이다, 2차 세계대전을 사실상 폴란드가 시작했다 등)으로까지 이어져 인터넷에서 많은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보호 의무: 푸틴은 현 러시아가 구소련의 계승국으로서 구소련 국가를 지켜야 한다고 본다. 실제로 러시아 정부는 ‘역이민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과거 러시아와 연결거리가 있는 이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패스트 트랙 귀화를 허용하고 있다. 방송에서 이 정책을 소개하는 것은 선동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은 허술하다. 이 프로그램이 처음 나온 2010년도 초반에도 참가자는 많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서 계속 줄고 있다. 2024년 신청자는 불과 8천 명에 그쳤다.
겉으로 보면 이런 ‘러시아의 세계’라는 비전이 웅장해 보일 수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 개념을 온 국민을 하나로 묶을 ‘탄탄한 이념’으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 국민 다수가 이 논리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련 시절에 ‘민족의 대연합’ 구호를 외쳤지만 그때는 공산주의라는 강력한 사상이 뒷받침되어 효과가 있었다. 지금은 각각 나라들이 자기 길을 걸어가면서 여러 측면에서 서로 많이 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구나 소비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시대에는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다. 특히 젊은 세대는 더욱더 그렇다. 예전에 같은 나라였다고 해서 지금도 우리가 그쪽 국가를 도와야 하는지, 이렇게 많은 혜택을 왜 줘야 하는지 의문이 커지기만 한다.
푸틴은 장기 집권과 정권 유지를 위해 확고한 이념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집요하게 ‘러시아의 세계’를 밀어붙이고 심지어 본인이 시작한 전쟁까지 그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 개념이 러시아의 새로운 국가 이념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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