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도 한국 잠재성장률 1%대로 낮춰
재벌기업 유보금 쌓고 모험 투자는 꺼려
한국 대기업 자산의 효율적 활용 낙제점
잠자는 자본 끌어내면 성장률 높일 수도
이사회 독립성 높일 거버넌스 개혁 중요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상법 개정 필수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점점 하락하는 이유는 뭘까? 한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재벌기업들이 사내 유보금을 쌓아두기만 하고 모험적인 투자를 꺼리는 경영도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잠재성장률을 결정하는 3대 요인은 노동과 자본, 총요소생산성이다. 저출생·고령화로 노동 투입 감소는 어쩔 수 없으나 대기업들이 자산의 효율적 활용도를 높이면 자본 투입은 단기간에도 늘릴 수 있다. 자본 투입 감소로 인한 잠재성장률 하락은 우리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재벌기업이 혁신 사업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 등 주요국 기업에 비해 한국 기업들이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성장에 필요한 투자에 소홀한 탓이 크다. 결국 추락하는 잠재성장률을 막으려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실패를 무릅쓰고 모험적인 곳에 투자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벌기업의 거버넌스(의사결정)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이 시급하고 중요한 이유다.
OECD도 내년 한국의 잠재성장률 1%대 전망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1%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내년 우리나라 잠재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잠재성장률)이 2%대를 밑돌 것으로 내다봤다. 연합뉴스가 12일 OECD의 최근 경제전망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OECD는 내년 한국의 잠재성장률을 1.98%로 전망했다. 올해 2.02%보다 0.04%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본 것이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의 노동과 자본, 기술력 등 모든 생산요소를 동원해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률을 말한다. 국가 경제의 기초 체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이런 잠재성장률이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경제 체질이 허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트럼프 발 관세 전쟁 같은 외부 충격에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잠재성장률이 1%대로 주저앉을 것이라는 비관론은 국내에서 먼저 나왔다. 국회 예정처는 지난 3월 발간한 ‘2025년 경제전망’에서 올해 잠재성장률을 1.9%로 예상했다.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내년에도 2%대 회복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KDI는 지난 8일 발표한 ‘잠재성장률 전망과 정책적 시사점’ 보고서에서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올해부터 1%대 후반으로 하락하고 2040년대 후반에는 0%대로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최근 10년간 1%p 이상 추락한 한국의 잠재성장률
문제는 한국의 잠재성장률 추락 속도가 OECD 회원국과 비교해 과도하다는 점이다. 2017~2026년 10년간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3.00%에서 1.98%로 급락했다. 하락 폭이 1.02%포인트에 달했다. 이는 잠재성장률이 공개된 37개국 중 7번째로 낙폭이 큰 것이다. 선진국 중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은 같은 기간 잠재성장률이 오히려 상승했다. 미국도 2%대 초중반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22년부터 줄곧 미국을 밑돌았다.
국내외 기관들은 잠재성장률 하락을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생산연령인구(15~64세) 감소 등 인구 구조적 측면에서 설명한다. KDI가 대표적이다. KDI는 생산연령인구가 지난 2019년 3763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급감하며 노동력이 고갈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생산연령인구가 줄면 투자로 이어질 수 있는 저축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신기술 도입과 효율화 등 생산성을 높이는 데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내외 기관들은 자본 투입이 감소하는 원인으로도 글로벌 공급망 분절 등 대외 요인에 무게를 둔다. 진단이 이렇다 보니 잠재성장률 하락을 막기 위한 해법도 규제 철폐와 노동시장 유연화 등 피상적인 일반론에 그친다.
기업 순자산가치보다도 못한 대기업 시가총액
그러나 이런 식의 거시적 담론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친다. 한국에서 공고하게 굳어진 재벌기업 구조가 잠재성장률을 깎아내리는 요인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상당수 재벌기업은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투자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자본 투입 감소로 이어져 잠재성장률 하락에 영향을 미친다. 또 기업 가치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 대기업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봐도 이런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한국 증시를 대표하는 코스피200 기업의 PBR은 0.8배에 불과하다. 코스피200에 속한 종목은 대부분 재벌기업 계열사다. PBR은 현재 주가를 주당 순자산가치로 나눈 값으로 1배 미만이면 시가총액이 장부상 순자산가치에 못 미칠 정도로 저평가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 자산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보니 주가 바닥을 기는 것이다.
참고로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기준 선진국 23개국 평균 PBR은 3.5배에 달한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4.8배,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1.9배, 일본은 1.5배로 코스피 전체 기업의 0.9배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대기업의 ROE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낮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자산의 효율적 활용도가 떨어지며 주식의 투자수익률도 낮아진 것이다.
대기업 자산의 효율적 활용이 잠재성장률 하락 막아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포럼)은 최근 발표한 논평에서 이같은 문제가 재벌기업의 기형적인 지배구조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한국 경제는 이미 성장이 멈췄다. 가장 큰 이유는 상장기업들이 선택과 집중을 통해 기업 가치를 키우기보다는 지배주주(재벌 총수)가 원하는 대로 사세를 키우는 데만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MSCI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기업은 주당순이익이 연 2~3% 성장했다. 인플레이션을 차감하면 실질 성장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시아에서 꼴찌다. 기업이 성장하지 못하니 일자리 창출도 없고 소비와 투자가 동시에 부진한 악순환의 길을 걷고 있다.”
포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7대 과제를 6월 4일 출범하는 새 정부에 제시했다. 상법 개정 통한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도입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전락한 자사주 소각 의무화, 자회사 상장의 원칙적 금지,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이다. 법 개정을 통해 일반주주에 대한 이사의 책임의식과 이사회의 독립성이 강화되면 지배주주인 총수 일가 눈치를 보지 않고 사내 보유 자금을 기업 성장에 적극 투자할 수 있다. 이는 한국경제 전체로 보면 ‘자본 투입’을 늘려 잠재성장률 추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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