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땅에 내린 별, 내란을 넘다'
"60 넘은 우리가 총알받이 돼야 하지 않나?"
"윤석열 파면" 1980년대 세대의 광장 귀환
빛의 축제…초로의 꼰대와 MZ, 22인의 기록
"다음 내리실 역은 여의도역입니다. 여의도역에 내리시는 분 모두 힘내시고 오늘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기관사의 낯선 멘트를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딱 0.5초였다.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지하철에서 몸을 맞댄 사람들과 어색함을 피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외면이다. 휴대전화에 머리를 박거나 광고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척하거나….
그런 사람들이 기관사의 멘트에 멈칫하더니 "와~" 탄성을 낸다.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도 뒤섞인다. 비로소 옆 사람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나눈다. 탄핵 의결을 바라며 국회를 응원하러 가는 길에서 본 훈훈한 장면이다.
어디 이 장면뿐이랴. 트랙터 행렬이 남태령에 교착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간 '개딸'들이며 눈보라 속에서 밤을 하얗게 새운 '키세스' 대열들이며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뿌듯함을 절절히 느끼게 해준 장면은 한둘이 아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하고 긴 겨울이었으나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을 만한 명장면도 솔찮았던 넉 달이었다. 그 와중에 동기들과의 공감이라는 특별한 기억이 또 하나 있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싸움이 길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에 대비해야 할 것 같아."
3월 말, 집회에서 만난 친구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이에 다른 친구는 덤덤히 답한다.
"심각한 상황이 다시 오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 대신 60 넘은 우리가 총알받이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무장 계엄군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동기 단톡방에 오른 이 대화에 비슷한 답이 잇따른다. '너도 그런 생각했구나. 나 혼자 유치한(?) 비장함에 빠진 것이 아녔군. 암 그래야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위로받고 안도하고 또 비장해진다. 다들 말없이 조용조용 살아있었다.
〈땅에 내린 별, 내란을 넘다〉(쏠딴스북).
외대민주동문회(외민동)에서 펴낸 '내란 극복 기록'에 놀랐다.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인데 이렇게나 빨리?'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신속하게 추진하여 만들어낸 집행력이 정말 존경스럽다. 개인적으로 낯익은 이름이 적지 않았으되 낯선 학부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필진이 현장에서 겪으면서 대응해 온 '내란'의 기록은 참으로 값지다고 아니할 수 없다. 치졸하고도 잔인한 음모가 잠재되어 있으되 그 외연의 시작부터 온갖 미디어에 온전히 노출되어 샅샅이 화려하게 기록된 전대미문의 친위 쿠데타인지라 기록 측면에서는 다양한 매체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현장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느낌을 공유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무게를 가진다.
언제고 누구라고 두려움이 없었으랴. 그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몸을 던지고 또 그 기록에까지 헌신한 필자들의 용기와 노고가 갸륵하고 고맙다. 대부분의 참여자가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투박하게 보일 수도 있다. 형식도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학부생으로부터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이까지 글쓴이가 다양한 만큼 이 사태를 접하게 된 현장도 다양하고 이에 대응한 모습도 다양하다.
필진 중 한 교수는 자신이 진행하던 학부의 강의를 단축, 조절하고 계엄 수업과 토론을 진행하였던 바를 적기도 했다. 소위 MZ세대 대학생들은 정치를, 그리고 계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기억 속에 담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재밌게 엿본다. (유영초 '기억하지 않고는 증인이 될 수 없다')
'살벌'했던 1980년대의 경험이 부분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책 기획을 주도한 사람은 흔히들 말하는 '꼰대'일 수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그러하기에, 이 책이 더 독특하고 값지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꼰대들과 그 MZ들은 얼마나 자주 집회에 모였겠으며, 얼마나 자주 밥과 술을 함께 하였겠으며, 얼마나 많이 다투었을까? 아름답지 아니한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이다. 간단하지 않다. 현실 정치와 연결된 싸움이다 보니 자칫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욕망에 휘둘린 사람들 탓에 오해의 덫에 빠질 위험성도 없지 않다. 이 책이 부디 쉽지 않은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공감의 불쏘시개가 되기를 바란다.
P. S.
"야 이거 교통비가 솔찮네. 지금 어디야?"
거의 퇴근 때마다 받게 되는 형의 전화. 용인에 사는 친형이 서울 집회에 개근하면서 내는 비명이다. 집회 장소 가까이 사는 난 외면의 여지가 없다. 집회에서 아는 노래라고는 '아침이슬'과 '산자여 따르라' 딱 두 곡밖에 없다. 들리는 대부분의 노래가 낯설다. 가사와 멜로디를 떠나서 박자가 더 그렇다. 왜 이렇게 바뀐 걸까? 우리 때는 장중했는데…. 역시 내가 꼰대인 걸까? 다음 집회 때는 며느리가 준 반짝이 등이라도 들고 나가야겠다.
소개를 망설였다. 특정 대학을 인연으로 한 이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책을 들춰보니 일반성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겨울 누구라도 느꼈을 소회가 별처럼 반짝였다. 60대와 20대가 섞였고 두 개의 광장이 공존했다. 서로를 포맷했다. 핏발 선 눈으로 섰던 1980년대의 광장과 빛의 축제가 된 2025년의 광장. 지금, 여기 대한민국이 머무는 공간이다. 그 기록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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