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선고 TV 생중계 수업한 고교교사 체험기 ②
탄핵 반대한 도의원이 TV 수업 학교명 달라 요구
교육부 중립성 위반 운운하는 공문 저항감만 불러
이번 탄핵으로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필요성 절감
학생들 융합 교육 통해 민주시민으로 성장시켜야
“주문 -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교실 TV로 들리는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주문 선고 순간, 8년 전이 생각났어요. 굳이 누가 더 나쁜지 비교하면, 저는 윤석열의 악행이 훨씬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땐 환호했었는데 이번엔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파면 결정문은 그가 12월 3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의 내란 범죄 여부 또는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 여부를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탄핵안이 다루는 소추 사유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 역시 그 테두리 안에서 결정을 했겠지만,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아요.
만약 윤석열 씨가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의 운명은 파면으로 귀결되었을까요? 민심과 달리 계엄 이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탄핵의 임계점까지 도달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역사는 밝혀줄 것입니다. 그는, ‘계엄령 선포’라는 최악의 자충수가 아니어도 이미 파면 대상이었다는 것을.
그보다 훨씬 전, 이태원 참사 전후로 기억해요. 이후 매주 거의 빠짐없이 윤석열 퇴진 집회를 이끈 '촛불행동'이라는 시민단체가 저는 눈에 밟힙니다. 저도 그때부터 집회에 나갔는데 모인 사람들이 적었어요. 젊은 세대는 등장하기 훨씬 전이었고요. 상대적으로 고령의 어르신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집회 현장에선 ‘젊은이들이 사회에 무관심하다’며 아쉬워하는 목소리들도 있었어요.
지나고 보니 어떻습니까. 윤석열 파면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에 이루어졌나요? 아니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을까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자도 될 수 있고 후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어요. 한 마디로 만시지탄입니다. 정치, 경제, 민생, 외교, 법치, 사회, 교육, 문화 등 대한민국의 수많은 퇴행을 우리는 지금 직면하고 있잖아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행동은 선견지명이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집회를 어쩌다 한 번 해야 파급 효과가 크지’ ‘매주 하면 힘만 들고 투쟁 동력만 분산되는 거 아니야?’ 등의 비판에 직면했을 때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최근엔 정말 재미있지만, 응원봉 세대가 ‘구원투수’로 등장하기 전까지의 집회는 여러모로 썰렁했어요. 사람도 별로 없으니 흥도 안 나고, 집회 가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다들 낯설게 생각하는 것만 같고…. 의기소침해져서 저도 참가 횟수가 점점 줄었어요.
비상계엄 당시 1분 1초가 절박했을 때, 극적인 타이밍에 목숨 걸고 국회에 집결한 시민들과, 그렇게 약 2년 반 전부터 시청이며 남대문이며 광화문 앞을 망부석처럼 묵묵히 지켜준 그들의 양적 근면성 덕분에 ‘응원봉 세대’ 탄생이라는 질적 전환과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전사 키세스단’과 같은 근사한 이름조차 없었던 그때 그 30~80대 시민들에게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의 마음 담아 감사함 전해요. 제 마음 속엔 매우 빠르게 국회로 달려간 ‘LTE 세대’이자 일편단심 ‘망부석 세대’입니다.
선생(先生). ‘먼저 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도 연인원 2만 6000여 명의 선생님들의 힘을 모아 두 번의 교사 시국선언을 하였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상원 수첩의 500명 ‘수거’ 대상에 전교조도 포함되어 있었더라고요.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저는 전교조가 자랑스럽습니다. 입시경쟁 해소 등 아직 가야 할 교육혁신의 길이 멀기에 전교조 일꾼의 한 사람으로서도 더욱 정진할게요.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그런데 탄핵 직전(3월 31일) 서울시의원들이 '전교조 시국선언 교사 징계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어요. 내란 비판이 죄인가요? 징계를 촉구했다면 그들은 그렇다면 내란범과 같은 입장인가요? 서울이라는 일개 지역의 시의원이 타 지역 교사들에게까지 징계를 촉구하는 권한 밖 오만에 관해서도 짚고 싶습니다.
또, 서부지법 등지에서 ‘윤석열 탄핵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한 도의원이 교육청을 통해 학교에 “헌재 탄핵 심판 선고 방송을 시청한 학교명을 달라”는 요구자료를 보냈어요. 이 공문을 받은 선생님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한편, 탄핵 선고 하루 전날 17개 시도교육청에 발송된 교육부의 공문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일부 시·도교육청이 헌법재판소 대통령 탄핵 심판 생중계 시청을 안내하는 공문을 일선 학교에 발송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교육기본법 제6조 교육의 중립성, 공직선거법 등 관련 법령을 위반하지 않도록 관리되어야 합니다.’
중립성 위반 등을 운운했던 이 경고성 공문은 학교 현장 선생님들의 더 큰 저항을 불러왔어요. 기존의 교육부 논리대로라면 아예 시청을 금지하는 공문 문구가 차라리 일관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겠죠. 파면으로 향하는 진실의 물결을, 중립이라는 초라한 용어로 막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이점, 시청 자체도 이미 중립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앞뒤가 안 맞는 교육부 공문이었어요. 세상이 진공 상태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부터라도 교육부는 중립이라는 기계적, 기만적 용어보다 정의와 진실에 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 ‘교육의 중립성’에 대한 왜곡에서 비롯된 현상들입니다. 헌법 제31조 ④항에 보면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나와요. 즉, ‘준수’가 아니라 ‘보장’입니다. 수십 년 전 독재 정부가 교원들을 그들의 하수인으로 동원했던 상황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든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표현을 ‘준수’로 곡해하여 지금까지도 교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교원의 정치기본권을 제한하는 부당함은 이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는 교육적 폐해입니다.
정작 계엄령 선포 당시, 우리의 자식 같은 군인들로 하여금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함으로써 그들을 내란에 복무하게 만든 윤석열 씨가 군인에게 ‘보장’해야 할 정치적 중립을 위반한 거잖아요. 굳이 그 용어를 쓰고 싶으면, 정치적 중립 위반이라는 표현은 현장의 교원에게가 아니라 윤석열에게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했어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멈춰 있는 기차일 수 없습니다. 이때 달리는 기차 위의 ‘중립’은 ‘추락’을 의미할 뿐입니다. 추락하지 않으려면 몸을 한껏 앞으로 숙여야만 넘어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것이 오히려 진정한 중립에 가깝습니다.
‘이건 중립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다.’ 제가 계기수업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 영상 댓글에 8600개의 ‘좋아요’가 달렸던 한 누리꾼의 댓글입니다. 저 말고도 전국의 대다수 학교와 교실에서 이렇게 '대통령 탄핵 선고 TV 생중계 시청'을 통한 민주시민교육 계기수업이 이루어졌어요. 교육부, 의회 등의 학교 교육활동 침해와 부당한 압박에도 선생님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제 퇴근길에 우리 동네 신호등 위에 걸려 있는 한 정당의 현수막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써 있었어요. 겸허한 마음이라고요? 내란동조를 한 사실을 전 국민이 겨울 내내 목도했는데도 이렇게 은근슬쩍 없던 일로 하려고요? ‘겸허’가 아니라 내란동조에 대해 ‘반성’하거나 정당 차원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자당 출신의 대통령이 내란 행위로 파면되었다면,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정녕 무엇을 의미할까요?
심지어 윤석열 탄핵이 헌법재판관 전원의 만장일치로 인용되었음에도, 일부 극우단체와 내란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 중 일부가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불복을 선동하거나, 윤석열 씨의 차기 대선 재출마 등을 대놓고 언급하는 등 상식 이하의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친일파 미청산 등 반민특위의 실패부터 우리 근현대사가 지금까지 꼬여왔습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게 된다. 정의로운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새깁니다.
내란 동조자 처벌은 윤석열 탄핵 직후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존폐 위기까지 언급되었던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덕분에 다행히 우리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이제 이 기반 위에 섬세하게 ‘어제의 범죄를 벌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시간과 여론을 확보해야 해요. 정치도 타이밍의 예술입니다. 어느 시점에선 여러 현안들과 병행되겠죠. 그런데 탄핵 선고 직후 불과 하루이틀 만에 ‘개헌’ 논의가 여론을 장악하는 이슈가 되었다면?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내란 범죄 처벌에 대한 예각화된 시민의 집중적 관심이 일시적으로 분산된 것이 유감이지만, 그래도 이제 민심은 그렇게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한 커뮤니티에서 지혜로운 댓글을 접했어요. ‘팬티 올리고 똥 닦습니까?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 사회의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중대 기로입니다.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도 이와 똑같은 메커니즘이었어요. 박근혜 이후 윤석열이 등장했던 오류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윤석열 씨 한 명 파면되었다고 해서 세상 달라지지 않아요. 그 역시 권력을 좇는 이들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극우 세력 등의 아바타였을 뿐입니다.
벌써부터 윤석열에게 줄을 댔던 사람들이 그를 손절하는 모양새를 보십시오. 또 탄핵 선고 직후 언제 그랬냐는 듯 태세를 전환하는 일부 언론의 모습은, 전광훈과 같은 극우 인사들이 탄핵 인용 불복을 외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해야 할지요. 너무도 비교육적인 세태를 기성세대들이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부끄럽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사회 각계도 이제 전혀 다른 접근을 하리라 믿습니다. 이번 탄핵 국면에서 우리 교육계도 '민주주의 안전망'의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이를 위해 학교 민주시민교육이 기존의 교과교육과 계기교육 등을 넘어 한 단계 더 통합적으로 나아가면 어떨까요.
학생들이 도덕, 사회, 역사, 정치와 법, 국어 과목 등의 교과 간 융합적 교육과정을 통해 토론을 통한 인성과 사회성, 역사적 안목과 정치적 식견, 법적 지혜를 두루 갖춘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강화된 '민주시민 교육과정'이 마련되기를 제안합니다.
또 두 눈 부릅뜨고 보겠습니다. 과연 한 명도 빠짐없이 처벌되는지. 그래야 12.3 비상계엄과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윤석열은 파면되었어도 그를 추종하던 세력은 아직 ‘파면’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의 아바타들을 처벌하지 않는 한 제2의 윤석열은 언제든 다시 나타납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또한 민주주의의 운명인 것을. 뼈아팠던 몇 번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면, 이 위기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단단히 구축될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교육언론[창]>에도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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