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김경인 '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
진짜 노인 복지 하려면 '돌봄'의 기존 인식 깨야
복지의 목적은 자립... 요양원보다 마을이 필요
초고령 사회 문제 지적 탁월... 솔루션은 아쉬움
변화무쌍한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노화는 신이 주는 벌, 시간에 의해 진행되는 일이다. 늙어감을 인지하는 것만큼 외로운 일도 없다. 가족과 친구가 많아도 늙어감은 오롯이 혼자만의 고독이다. 이전 세대에서는 인생의 후반부인 노령기를 그저 저물 날을 기다리는 날들로 채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현대인은 상황이 다르다.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이 늘어나 성년기의 절반 가까이를 '노인'으로 지낸다. 누구에게나 닥쳐올 현실이다.
노인 주거에 대한 고민과 해결을 위한 일반서
신경건축학자 김경인이 지은 <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2025, 투래빗 출판)는 노인이 겪고 있는 주거의 문제제기를 통해 솔루션의 필요성을 환기한다. '신경건축학'이라는 분야가 생소할 수 있다. 신경건축학은 건물 및 환경의 설계와 조합을 신체적, 정신적, 감각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건축에 신체 신경과학, 심리학, 의료학을 접목해 디자인 원칙을 마련하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정주 환경인 건축물과 도시 환경을 사람 중심으로 설계하는 학문이다. 이런 관점의 연구자가 초고령 사회에서 주거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다.
책은 기존의 주거 환경이 노인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화가 시작되면서 시선이 아래로 쏠리는 이유는 익숙하던 집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후의 시간이 길어진 만큼 노인기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인생의 행복을 좌우한다. 정작 한국의 노인 거주 문화는 요양원이나 시설, 여유가 있으면 실버타운에 가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는 임대 아파트에서 말년을 보낸다. 저자는 이 모든 환경이 노인들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일본에서는 요양시설의 운영 목표가 '건강한 귀가'다. 한국처럼 4~8인이 한 방에 갇혀 수용 생활을 하며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준비를 통해 제2의 자립을 돕는다는 개념이 정착되어 있다. 저자는 일본의 다양한 사례를 들며 바람을 이야기한다. '제자리에서 나이듦(Aging In Place)'이라는 개념에서 노인의 주거를 '수용'이 아닌 '주거'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서 유니버설 디자인, 바이오필릭 디자인 등의 개념과 사례를 든다. 책의 주된 내용이지만, 지적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있다.
저자는 색다른 시선과 생각이라 소개하고 싶어서 일본의 사례 등과 주거 디자인, 도시 디자인, 디지털 리터러시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제 그 개념들은 일반론이 되었다. 만인을 위해 차별과 제한을 최소화하는 유니버설 디자인, 장벽 없는(배리어 프리) 디자인은 오래 전부터 법과 제도로 편입될 만큼 일반적이다. 이제는 무인 주문기라는 뜻으로 정착된 키오스크에 익숙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디지털 격차가 크다는 것은 이미 익숙한 뉴스다. 격차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문제 제기와 발제의 방향을 조금만 틀어도 특별한 책이 될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을 자아낸다.
해답은 늘 문제 속에 있다
컨설팅과 솔루셔닝에는 고된 작업과 연구가 필요하다. 가설을 세우고 여러 사례와 데이터를 분석해 보편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많은 프로젝트들이 용두사미가 되거나 그저 그런 일반에 그쳐 실패하곤 한다. 얼음은 차고 불은 뜨겁다는 식의 뻔한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노인 주거의 문제는 '돌봄'이라는 인식의 틀을 깨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돌봄'이 따뜻한 동행복지의 단어라는 선입견이 문제다. 돌봄은 피동적으로 혜택을 받는다는 의미다. 공권력이나 상위 집단이 하위 집단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시혜처럼 느껴진다. 진정한 복지의 목적이 사회와의 융화라는 본질을 잃은 지 오래다. 책은 문제점을 제기하지만, 솔루셔닝의 초점이 마을이나 도시 인프라의 조성, 그에 동반되는 서비스 개발에 국한된 점이 아쉽다.
우리가 흔히 돌봄의 대상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린이와 미성년자, 장애를 가진 이들, 경제적 곤궁에 몰린 이들, 각종 피해자들 및 노인들이다. 이들에 대한 돌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문제 해결을 통한 자립에 있다. 시혜성 복지체계는 근근한 버팀이 되지만, 대상자를 주체로 보지 않고 피동적 객체로 보는 한계가 있다. 복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늘 대상자들의 실제 형편과 바람에 있다.
돌봄에서 자립으로의 전환 필요
노인 연령을 정의하는 일부터 '노인 아닌 이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가위바위보만 가득하다. 60세니, 65세니 하는 논란에는 노령 인구의 사회적 적응의 한계를 고려하는 대신, 복지 비용 주판알 굴리기가 앞선다. 마치 노인들이 다른 세대의 세금을 거저 편취하는 것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는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노인 세대에게 필요한 복지의 목표는 보살핌이 아닌 자립이다. 일본에서는 각종 주거 시설과 환경이 1인 단독 생활공간으로 변모하는 추세다. 복지 체계와 그 인식이 고도화한 유럽의 경우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저자는 네덜란드의 호그벡(Hogeweyk) 마을의 사례를 소개한다. 호그벡은 치매 환자로 구성된 마을. 수용 시설이 아니라, 그야말로 마을이다.
치매환자에게 사회적 교류와 활동은 인지 기능을 강화하고 정서적 안정을 제공해, 치매의 진행을 더디게 하고 호전의 기반을 마련한다고 한다. 호이벡 마을은 개방된 마을의 형태로 슈퍼마켓, 미용실, 카페, 음식점을 스스로 이용하고 집 안에서도 최대한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활동을 장려한다고 한다. 치매환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인이 되는 순간 방구석 지킴이로 치부되는 일반 노령인구도 사회적 활동과 교류를 통해 자립이라는 복지가 시작된다.
유니트 케어나 커뮤니케이션 홈 같은 시니어 케어 서비스도 사례 중심 연구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노인이나 치매환자들이 단지 돌봄의 대상이 아닌 최소한의 사회 활동을 유발해 구성원으로 기능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런 논의에서 출발한 고민과 문제 해결은 단지 노인과 초고령 사회 문제에만 국한히지 않는다. 복지 체계는 결국 사회 기능의 유기적 전달 체계로 자리 잡아 연쇄반응으로 다른 영역의 사회 문제를 해소할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복지 전달 체계는 생태계와 같다
장애아동의 문제는 해당 아동의 장애 치료와 완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장애아동 1인을 케어하기 위해 가계에서는 최소 1인 이상의 돌보미와 보조자가 필수다. 보통 가족들이 수행하므로 표면적으로는 별도의 비용 발생이 눈에 띄지 않지만, 그 구성원이 다른 사회 활동을 했을 때의 기회비용을 따지면 사회적 지출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그래서 장애아동의 문제의 끝에는 늘 취학과 취업이라는 자립의 솔루션이 필수로 자리 잡아야 제대로 된 복지 체계가 완성된다.
노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증 치매 노인의 돌봄은 말할 것 없이 건강한 노령 인구들이 사회적 기여를 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기회비용도 엄청나다. 지하철 무임승차 논란만 보더라도 그렇다. 지하철의 운영을 지금의 세원으로 하기에 젊은 세대들의 입이 튀어나올 만하다. 하지만 정작 그 지하철의 인프라는 노인세대의 노동과 경제 활동에서 말미암은 결과다. 이런 억지 같은 눈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노인의 자립은 필수적이다. 노인들이 사회에서 교류하고 활동하는 것은 소일거리의 경제활동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초고령화는 농어촌의 붕괴, 지방소멸의 원인이 되고 있다. 도시에서도 65세 이상 인구가 반을 넘어서면서 사회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갖기 어려운 '한계 취락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온다. 공동화나 빈집 증가로 슬럼화가 되는 도시문제가 발생한다. 무엇보다 정주의 본능으로 자신의 영역을 나누게 되어, 보수적 정체성이 고착화되며 사회가 함께 늙어가는 악순환이 시작한다.
도시 공동화와 지방 소멸의 문제에 대한 솔루션으로 '저출생 대책'이 대두된다. 자녀들을 많이 낳으면 해결될까? 이 복잡한 생태계의 문제를 그저 출산장려에서 찾으려는 꼼수부터가 문제다. 가끔은 서로 다른 문제를 콘텍스트를 비교함으로써 해결 방안을 도출하곤 한다. 초고령사회와 인구감소라는 두 가지 이슈를 서로 맞대어 본다면 색다른 솔루션이 나올지도 모른다.
노인 인구를 지방이나 촌에서 적극 수용하는 방법이 그 하나다. 단지 귀촌과 귀농이라는 낭만적 은퇴생활을 유도하는 데에서 그쳐선 안된다. 책에서 예로 드는 일본의 사례처럼 철거 위기의 종교 시설을 치매 요양 커뮤니티 센터로 만들고, 1인 청년 가구, 돌봄 필요 가구, 자립 노인 가구가 어울려 사는 혼합형 주거 모델도 방법이다. 더 나아가 빈집이 늘어 나는 곳에 꼭 치매 노인이 아니더라도 자립 가능 노인들의 거주지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노인들이 소비하는 복지 재원을 자연스럽게 지역 소득 증대로 연결해, 젊은 노동인구를 유입하는 선순환 체계를 만들 수도 있다.
복지를 서비스나 재화를 지원해 당장의 곤란에서 잠시 벗어나는 개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새로운 사회와 공동체의 구조를 리모델링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책에서 아무리 좋은 사례와 제언을 낸다 하더라도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다.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와 이해의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우리 고장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으라고 해 보았자, 지금 시대에서는 현실감 떨어진다고 평가받을 뿐이다. 오히려 자립 의지가 있는 노인인구를 적극 유치해 그들과 연계된 복지서비스와 생활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한 재화 창출로 젊은 세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시장 경제형 복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이 들어 어디서 살까>는 노인 문제, 초고령 사회 문제라는 커다란 화두를 상기하는 데에는 유용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관련 종사자들이 보기에는 다소 깊이가 깊지 않고 구성도 두서를 잃었으며 많이 알려진 일반론이 가득하다. 당사자인 노령 세대가 이 책에서 얻을 정보도 극히 제한적이다. 더욱이 그리 재미있지도 않다. 이런 복지 관련 연구의 한계가 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저자의 진심을 훼손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아직도? 여전히?'라는 물음표가 남는다.
이런 책의 경우 최초 아이디어 제공자보다 기획과 에디팅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례와 연구, 움직임들이 있다. 일반인들은 생소할지 몰라도 당사자들이나 이해관계자들의 정보 취득 수준이 상당하다. 시민들의 인지는 앞서가는데 연구와 행정이 뒷북인 일이 다반사다. 보다 주의 깊고 흥미롭게 풀어내려면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요즘 출판계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설연휴 가족들과 함께 나눌 이야기의 한 꼭지로 어떨까 싶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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