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구기 중 가장 긴 역사…저항 정신 담겨

한국에서는 '비인기'도 못되는 '비인지' 종목

스포츠의 본질은 승부다. 주로 스포츠의 기원은 전쟁이나 전투를 준비하거나 기리는 과정과 의식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스포츠의 근원은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일이다. 싸움, 분쟁, 전쟁과 다름없어 보이는 승부의 세계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운동장의 공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핸디캡과 메리트를 상쇄시켜 누가 보아도 합당한 겨루기가 성사되기 때문이다.

이 승부의 세계는 직접 참여나 관람을 넘어 미디어 콘텐츠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올림픽, 월드컵 같은 전 세계적 이벤트는 지구촌 곳곳에 생중계되고 월드 스타들의 여러 프로 스포츠 게임도 티브이 중계 뿐만 아니라 뉴미디어 콘텐츠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거기에 더해 유관 콘텐츠, 리뷰, 프리뷰 등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으로도 파생하였다. 인기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를 기획하고 연출한 장시원 PD(C1 스튜디오)가 새로운 스포츠 리얼리티 시리즈 <최강럭비>를 내놓았다. 여러 인기 종목을 제쳐두고 럭비라니. 소재부터 흥미롭고, 의아함과 궁금증을 유발한다.

 

'최강야구'를 기획했던 장시원PD가 새로운 스포츠 리얼리티쇼 '최강럭비'를 선보였다. (출처=넷플릭스)
'최강야구'를 기획했던 장시원PD가 새로운 스포츠 리얼리티쇼 '최강럭비'를 선보였다. (출처=넷플릭스)

럭비, 혁신에서 전통으로

럭비는 현대 집단 구기 스포츠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축구보다 30~40년 앞선 1823년 영국 럭비(지명) 스쿨의 윌리엄 웹 앨리스라는 학생의 '위대한 반칙'으로 시작됐다. 이전 풋볼(지금의 축구가 아님) 경기는 손과 발을 번갈아 터치하며 공을 간수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이 규칙으로 따분한 공방만 주거니 받거니 하던 어느 날 윌리엄이 경기도중 공을 가슴에 품고 냅다 뛰어 버린 것이 학교의 전통이 되었고, 이것이 럭비풋볼의 시초라고 한다.

럭비는 이처럼 저항과 혁신의 상징이었다. 틀을 깨고 다 나은 결과를 만든 상징적 스포츠로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영국의 식민지 정벌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럭비는 1995년까지 주류의 럭비 선수단(럭비 유니온)들은 아마츄어리즘을 고수했다. 중간에 분화되어 프로화한 경우도 있지만,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졌지만 가장 늦게 프로 스포츠가 된 종목이다.

모든 사물과 사건에는 명과 암이 존재하듯 럭비의 아마츄어리즘에는 순수한 승부라는 대의도 있었지만, 계급 갈등이 감추어진 탓도 있다. 럭비는 사립학교에서 탄생했듯이 귀족과 상류층의 스포츠였다. 이런 이유로 럭비를 주류로 즐기는 계층들은 굳이 돈을 받으며 경기를 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여흥에 돈을 받는 것을 귀족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도 럭비를 하게 되고 특히 식민지에 전파되면서 럭비는 직업으로 자리잡게 됐다. 특히 전 세계가 초연결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럭비 강국은 뉴질랜드, 퉁가, 뉴기니 등 영연방국가들이었다. 선수들의 주축이 된 남태평양 폴리네시안 전사들의 후예들들이 세계시민과 자본주의적 사고에 익숙해지면서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됐다. 

 

영국 럭비 스쿨에 세워진 '위대한 반칙' 윌리엄 웹 앨리스 동상 (출처=BBC)
영국 럭비 스쿨에 세워진 '위대한 반칙' 윌리엄 웹 앨리스 동상 (출처=BBC)

비인기 종목이 아닌 비인지 종목 럭비

한국에서 럭비는 역사가 짧지 않은데도 나라의 취약한 스포츠 펀더멘털로 인해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영연방 국가들이 60만 명 정도의 럭비 선수를 등록하고 있고, 이웃나라 일본도 엘리트와 사회 체육이 균형을 잘 유지해 10만 명의 등록선수가 있다. 한국은 프로선수단이 없고 실업팀도 상무 포함 다섯 개로 리그 구성조차 어렵다. 대학팀은 10개 팀이 있어 그나마 대학과 실업팀들이 함께 대회를 운용하곤 한다.

한해 120명 정도의 고교 선수들이 졸업하는데, 대학에 진학하는 수는 70명 내외다. 절반이 넘게 진학하므로 타 종목에 비해 대입 관문이 높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대학 진학 목적으로 럭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선수 공급 사슬의 취약성으로 한국 럭비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인기 종목이다.

정확히는 비인기 종목보다 비인지에 가깝다. 엘리트 체육인 올림피언 종목인 사격, 컬링, 펜싱, 유도, 역도, 레슬링 등은 인지도는 높지만 인기가 없기에 비인기 종목이다. 하지만 럭비는 '한국에 럭비팀도 있어?'라는 반응이 쉽게 나오는 비인지 종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장시원 PD의 <최강럭비>의 일차적인 목표는 이 럭비라는 유서 깊고 매력 많은 스포츠를 인지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19일 일본 도쿄 총리공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아베 신조(오른쪽) 총리와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공동 기자회견에서 럭비공을 들고 있다. 일본에서는 20일부터 11월 2일까지 ‘2019 럭비월드컵’이 열린다. 2019.9.19. 연합뉴스
19일 일본 도쿄 총리공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아베 신조(오른쪽) 총리와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공동 기자회견에서 럭비공을 들고 있다. 일본에서는 20일부터 11월 2일까지 ‘2019 럭비월드컵’이 열린다. 2019.9.19. 연합뉴스

노 사이드, 게임이 끝나면 편은 사라진다

<최강럭비>의 연출구성은 단순하다. 대학 두 팀, 실업 다섯 개 팀이 참여해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린다. 처음 에피소드에 대진 결정을 위한 퀘스트들이 진행하지만, 80분 14화의 콘텐츠가 온통 럭비 경기로 가득 차 있다. 자칫 <최강야구>와 <뭉쳐야 찬다>의 지루함이 침습할 구멍이 눈에 띄는 구성이다. 그러나 다른 점을 럭비라는 스포츠가 가진 날 것의 매력으로 밀어붙인다. 그야말로 정면승부다.

화면을 통해 진한 땀냄새와 피비린내가 날 것 같이 선수들의 일면을 바스트샷으로 크게 잡고, 역동적인 경기 순간에 스톱모션과 저속재생을 걸어 박진감과 치열함을 부각한다. 럭비가 이렇게 생동감있고 매력적인 게임이었던가를 다시 느끼는 틈틈이 서사와 킥이 들어온다.

방출과 미지명 선수들로 구성한 신생구단 OK금융그룹 럭비단의 선전에 나도 모르게 응원이 나온다. 한국전력의 에이스는 일찍 세상 떠난 럭비 친구의 이름을 팔뚝에 적어 게임에 임한다. 깨지고 터지는 일은 예삿일이고 찢기고 부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비인지든 비인기든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죽을 만큼 싸운다. 프로그램 부제가 '죽거나 승리하거나'다. 럭비공에 라틴어로 쓰인 'Vincere vel Mori', 승리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말이 꿈틀거리며 시청자의 맘에 다가선다.

 

승리 아니면 죽음을 (스틸컷=넷플릭스)
승리 아니면 죽음을 (스틸컷=넷플릭스)

프로야구 관중이 천만 명을 돌파했다며 자랑이 한창이다. 하지만 경기의 질은 역행 중이고 주요 선수의 연봉은 산업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돈잔치 수준이다. 연봉의 격차는 사회의 양극화보다 더 두드러져 있고, 선수들과 종사자들의 사회적 인식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사건 사고가 일상이고 은퇴 후 연예계를 기웃거리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다. 국가대표의 부름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취사선택하기 일쑤다. 이들이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귀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럭비 경기의 종료선언은 특이하다. '노 사이드(No Side)라는 심판 선언으로 종료 나팔이 울리며 경기를 매듭짓는다. 게임 오버의 순간 내편도 네 편도 없는 같은 럭비인으로 시민으로의 귀환을 알린다. 각 팀은 양쪽으로 도열해 상대팀을 통과시키며 격려하고 축하하는 전통도 다른 스포츠와 다른 모습이다. 경기는 끝났지만 삶은 이어지니까.

세상은 온통 편나누기가 판을 친다. 선거라는 민주주의 과정은 일종의 승부다. 옳고 그름이라기보다는 무엇이 더 적확할 것인가에 따른 선택의 승부다. 그 승부 후에는 편을 따지기보다는 한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내는 상식이 작동하는 일상이 지속되어야 한다. 삶이라는 게 늘 예측불가한 럭비공 같다. 요즘 하루하루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태한 날들의 연속이다. 승부 후에 편을 허무는 일상을 되찾고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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