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친일문제②] 76년만에 부활한 반민특위

병풍 뒤에 숨어 떨었던 화신백화점 박흥식

그러나 이승만 손에 용두사미로 끝난 특위

미 군정 당국이 대리자로 선택한 이승만

미국의 한반도 분할과 민족주의 세력 죽이기

이승만의 반민특위 해체-친일파와의 동맹

친일문제 해결책은 한일 강화조약 체결

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창립대회 때 단상에 오른 반민특위 유족들과 이사진.   한승동
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창립대회 때 단상에 오른 반민특위 유족들과 이사진.   한승동

“지난해 크게 흥행한 영화 ‘파묘’에서 파헤친 무덤에서 나온 것은 군국일본의 제국주의 망령이었다. 그런데 이제 영화 아닌 현실에서 역사에 묻혀버린 ‘반민특위’가 무덤을 파헤치고 튀어나올 것이다.” “윤석열 정권 들어 친일반민족행위가 너무 많이 자행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북촌 창우극장 내 전국비상시국회의와 함께 쓰고 있는 반민특위 기념사업회의 이영국 사무총장. 1월 6일.      한승동 
서울 종로구 북촌 창우극장 내 전국비상시국회의와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는 반민특위 기념사업회의 이영국 사무총장. 1월 6일.      한승동 

70여년만의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창립

8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2 회의실에서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창립대회가 열린다.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맡을 이영국(68) 전국비상시국회의 공동조직위원장은 70여년 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역사의 무덤에서 불러내는 일을 “나의 숙명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의 조부(이영진)는 3.1운동 때 파주지역 대표 9인 중 한 분이었고, 아버지(이봉식, 1899-1982)는 반민특위 조사관이었다. “1949년 1월 8일 아버님이 대표적인 친일 부역자인 화신백화점 박흥식을 체포했다. 반민특위가 잡아들인 반민족행위자 1호였다.”

 

반민특위 기념사업회의 발기인 모집 팸플릿에 실린 1949년 반민특위 출범 기념사진 
반민특위 기념사업회의 발기인 모집 팸플릿에 실린 1949년 반민특위 출범 기념사진 

기념사업회 창립대회를 8일로 잡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백범 김구 증손인 김용만 의원과 공동개최하는 창립대회에는 정동영 의원과 이학영 국회 부의장도 참석한다. 사단법인 형태가 될 기념회는 이 사무총장 외에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정륙 씨, 반민특위 입법 제안자요 특위 검찰관이었던 김웅진 제헌국회 의원의 딸 김옥자 씨와 문국주 비상시국회의 운영위원장,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등 5인이 이사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과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고문으로 참여한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로 체포돼 끌려가는 (앞줄 왼쪽부터) 노덕술 김연수 최린 이풍한.  나무위키
1949년 반민족행위자로 체포돼 끌려가는 (앞줄 왼쪽부터) 노덕술 김연수 최린 이풍한.  나무위키

병풍 뒤에 숨어 벌벌 떨었던 화신백화점 박흥식

당시 반민특위 사무실은 지금은 헐리고 없는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쓰고 있던 중앙청 205호실에 있었다. 그때 반민특위의 체포를 피해 해외로 도망가려고 여권을 준비하고 있던 박흥식은 체포조가 들이닥치자 방 병풍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뒤이어 변절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이광수, 최남선, 최린 그리고 경성방직 창업주 중 한 명인 김연수,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돼 밀정 노릇을 한 배정자 등이 줄줄이 체포됐다.

하지만 그 기세는 얼마 가지 못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직후인 9월 7일 제헌의회 재석의원 141명 중 108명 찬성(반대 6명)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고 그달 22일 이승만 대통령이 공포함으로써 시작된 반민특위 활동은, 이를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승만에 의해 10개월도 못 채우고 1949년 6월에 사실상 해체되고 만다.

반민특위법은 제헌국회가 통과시킨 사실상의 제1호 법이었다. 먼저 통과된 1, 2호 법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정부조직법이었다. 그만큼 친일잔재 청산을 되찾은 나라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여겼던 것이다.

 

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창립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한승동
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창립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한승동

기념사업회 발기 선언문은 그런 사정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945년 해방은 우리에게 근대적 민족국가 완성이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과제는 당연히 친일잔재 청산으로 출발해야만 했고 그 핵심은 친일파 청산이었습니다. 제헌국회는 이 같은 역사적·민족적 요구를 받들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1조는 이렇게 돼 있다.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그리고 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나 일본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제3조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특위에는 조사위원과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가 있었다. 조사위원은 10명이고 지역에 조사 지부를 뒀다. 중앙에는 사무국장과 조사관, 서기, 사무원이 있었고, 특별검찰부는 검찰통장을 포함한 9명으로 구성됐다.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고등법원 판사 이상의 법관 또는 변호사 6명, 사회 인사 5명 등 16명으로 구성됐으며, 모두 국회에서 선출했다.

박흥식이 왜 벌벌 떨며 해외로 도망가려 했는지 알만하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들이 회의를 마친 뒤 함께 한 기념촬영.   나무위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들이 회의를 마친 뒤 함께 한 기념촬영.   나무위키

그러나 이승만 손에 용두사미로 끝난 특위

그러나 발기 선언문의 그 다음은 이렇게 이어진다.

“친일반민족세력은 이승만을 앞세워 입법 과정에서부터 반민특위에 대한 끝없는 공격을 자행하더니 마침내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 파괴하고야 말았습니다. 나치 부역자 99만 명을 체포하고 782명 이상을 처형한 프랑스와 달리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상 단 한 명의 민족반역자조차 처단하지 못했습니다. 단죄 대상인 친일반민족세력이 거꾸로 반민특위를 공격, 파괴하고 오히려 처절한 보복을 자행하였습니다.”

법안이 공포된 다음날부터 통반장들을 동원한 친일파들의 ‘반공 구국 궐기대회’들이 열렸고, 이승만은 여러차례 담화를 통해 반민특위가 삼권분립 원칙에 위배되며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이대며 특위 활동을 방해했다. 그때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이 앞세운 구호가 “반공은 애국, 친일파 처단하자는 놈은 빨갱이”였다. 그런 배경 속에 악질적 친일경찰 노덕술 등이 오히려 반민특위에 테러를 가하며 활개치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집요했던 이승만의 회유와 협박

6월 6일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윤기병 서울 중부경찰서장 지휘 아래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8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 청사(이때는 명동 쪽으로 이전해 있었다)를 습격해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친일행위 조사 서류와 집기들을 파괴하고 압수해 갔다.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정륙(90) 씨는 그 전 달인 5월에 서울 중구 필동 남산자락에 있던 위원장 관사에 이승만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직접 찾아온 사실을 기억한다. 그때 15살이던 김 씨는 이승만이 떠난 뒤 아버지로부터 “반민특위 활동을 형식적으로만 하면 나중에 장관자리를 주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이영국 씨도 그 무렵 특위 조사관이던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 경무대 사람들이 집 마당에 쌀가마니 두 개를 놓고 갔는데, 열어 보니 쌀은 없고 돈이 가득 들어 있어 서둘러 돌려주었다는 얘기를 어머니와 누나한테서 들었다.

회유가 안 통하자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특위를 파괴했다.

권력의 횡포에 맞섰던 아버지는 쫓겨나 생활 무능력자가 됐고, 집안은 가난에 찌들어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어린 시절을 굶고 살았다. 아버지가 납북당한 김정륙 씨는 연좌제까지 걸려 취직은커녕 국내 여행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해 6월에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를 비롯해 노일환, 이문원 등 진보적 소장파 의원들 13명이 평화통일, 자주통일을 주장하다 남로당 공작원으로 몰려 구속된 ‘국회 프락치사건’도 반민특위 해체에 빌미가 됐다.

 

제헌국회 제3호 법률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문.   나무위키
제헌국회 제3호 법률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문.   나무위키

미 군정 당국이 대리자로 선택한 이승만

이승만은 왜 반민특위를 반대하고 파괴했을까?

1978년 10월에 나온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의 한미관계 조사 보고서(프레이저 보고서)의 전후기간(1945-1961) 항목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 지도자들은 신뢰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식민정부에 부역했고, 심지어 그 아래서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훌륭한 민족주의적 경력들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좌익으로 간주됐다. 1945년 가을에 진주한 뒤 짧은 기간에 수립된 미 군정은 그런 사람들을 회피했고, 보다 보수적인 것에 열중하는 지도자들을 선호했다. 그런 개인들 중 한 명이 이승만이다. 그는 일본통치 기간 중 미국에 망명해 살다가 1945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 군정은 그를 정치불안이 만연한 지역에서 안정을 제공해 줄 잠재적 지도자로 간주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확장을 인식하고 한국에서 (그것을) 정지시키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미 군정의 관점에서 이것은 (한)반도의 남쪽에 생존 가능한 비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가장 잘 달성할 수 있었다.”(<프레이저 보고서> 2019년 12월 2판. 레드북)

이 항목 앞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한다는 결정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펜타곤(미국 국방부)에서 만들었고, 한반도에서 일본의 항복을 미-소 양국이 공동으로 접수한다는 의미로 소련에 제안됐다.”(같은 책)

 

1945년 8월, 서울 경복궁 내에 있던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일본 국기를 내리고 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있는 미군들. 나무위키
1945년 8월, 서울 경복궁 내에 있던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일본 국기를 내리고 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있는 미군들. 나무위키

미국의 한반도 분할과 민족주의 세력 죽이기

한반도의 38선 분할은 미국이 기획했고, 소련이 그 제안을 수용했다. 결국 그 때문에 한반도는 지금까지 분단국가가 됐다. 일본 항복을 공동으로 접수하기 위해 소련과 분할했다면, 분할 대상은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일본 땅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피해자인 한반도를 분할한 것은 미국이 일본 패전 뒤 일본 전체를 점령, 지배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독일을 연합국(소련도 2차대전 때는 연합국의 일원이었다)들이 분할지배하듯 일본을 분할 점령하자고 했으나 미국은 거부하고 일본 전체를 지배하는 대신 한반도를 분할해 그 절반을 소련에게 내 주었다. 미국이 그때 한반도를 일본의 일부로 간주하거나 오해했기에 그랬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연합국이 1943년에 합의한 카이로 선언에 이미 일본 식민지배로 ‘노예상태’인 조선(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명기됐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 말기 전후구상에서 한반도를 40년간 미국 주도 아래 신탁통치한다는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38선 이남에 점령군으로 들어 온 미군은 프레이저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훌륭한 민족주의적 경력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이 “좌익으로 간주된” 상황에서 그들을 배척하고 영어 잘 하는 친미적인 이승만을 자신들의 통치 대리자로 선택했다. ”훌륭한 민족주의적 경력“자들 대부분은 ”좌익으로 간주된“ 것이 아니라, 미군 또는 미국이 그들을 그렇게 ”간주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을 그렇게 배척하고, 일본 식민정부에 부역하거나 영화를 누린 자들도 배제한다면, 남는 건 이승만밖에 없다.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소련 사회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로 하고, 동아시아 대륙에서 저지선의 최북단을 자신들이 분할한 38선 이남으로 확정한 미국에게 이승만은 가장 안전한 선택지였다. 미국 망명자로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에서 학위까지 받은 영어 능통자 이승만은 미국에겐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고 미국적 가치가 몸에 밴 믿을 수 있는 친미 인사였다.

게다가 오랜 세월 망명자였던 그는 한국 내에 지지세력, 즉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이는 민족주의적 좌파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당시의 여론조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나중에 그와 갈라서는 한민당, 한독당 등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까지 완전한 그의 편은 아니었다. 미국에겐 이런 조건의 이승만이 자신들의 뜻대로 다루기 좋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승만에겐 미국 망명 시절에 저지른 여러 비리 사건들이 있었고, 미국은 그런 점도 이승만 제어에 활용했을 것이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가 이승만, 맨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가 이승만, 맨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이승만의 반민특위 해체-친일파와의 동맹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민족주의적 ‘좌익’은 미국이 이미 설계를 끝낸 냉전체제에서 적군이었다. 그들을 빼고 나면 친일 부역자와 그 아래서 영화를 누린 세력이 나머지 다수다. 미국으로선 거대 좌익에 대적하는데 지지기반 약한 이승만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일제 부역자들과 우파를 함께 엮어 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반대하고 결국 해체시킨 것은, 정치적 기반이 없던 그에게 일제 치하에서 비교적 나은 교육을 받고 채용돼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지니고 있던 각 분야의 부역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부역세력을 처단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자는 반민특위를 그는 그냥 둘 수 없었다. 그에게는 상호 상생할 부역세력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미국은 이승만이 강했기 때문에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선택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강자가 된 것이다. 미국은 냉전전략상 반공주의를 앞세워 민족주의적 좌익 또는 좌익적 민족주의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도태시켰다.

심지어 우파 백범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강력한 토착 지지세력을 가진 우익 민족주의자 김구를 다루기 어렵다고 봤을 것이고, 이승만체제 확립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 군정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막다가 1945년 11월쯤에야 개인자격으로 들어오겠다는 사실상의 각서를 받고 귀국용 수송기를 내줬다. 귀국 뒤에도 견제당하던 백범은 결국 암살당했다.

친일문제 해결책은 한일 강화조약 체결

만일 미국이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본토를 분할 점령했다면? 그리고 만일 미 군정이 임시정부와 해외 항일독립운동세력을 한민족 민족해방투쟁의 주체세력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그랬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만일 미 군정이 임시정부와 백범과 그 항일투쟁을 인정하고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조약 서명자로 참가하게 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친일문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한일관계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기 초안에는 조약 서명국 명단에 한국을 포함시켰다. 당시 초안 작성에 관여한 미국 관리들은 일본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한국의 국내외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조약 서명자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했다.(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그러나 일본과 영국의 반대로 강화조약 협상 막판에 한국을 빼버렸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이 정식 서명국으로 참가했다면, 일본은 그때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사죄, 배상한 뒤 문서로 재발방지 약속까지 했을 것이다. 그것이 전쟁을 끝내는 강화조약의 기본이다.

미국은 일본 지배를 위해 일본의 전후 복구에 짐이 되는 일본의 전쟁배상 부담을 최대한 줄여 주었다. 한국과 중국을 강화조약에 초청하지도 않았던 이유 중에는 그런 요소도 포함될 것이다. 미국이 종용해서 맺게 되는 1965년 한일협정 때도 일본은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이 한국에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고, 식민지배가 한국 발전을 위해 일본이 베푼 은혜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질적인 친일문제 그리고 한일간 과거사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런 관점부터 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일협정 재협상이 아니라 두 나라가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강화조약은 전쟁 당사자끼리 전쟁을 끝낸 뒤 맺는 평화조약이다. 120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 통감부 설치와 함께 조선은 사실상 일제 식민지가 됐다. 항일전쟁을 선포한 1919년의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을사늑약 40년 뒤 일제가 패망하고 60년 뒤엔 한일협정이 체결됐으나 한일 두 나라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사과, 배상,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강화조약을 맺은 적이 없다. 따라서 한일간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일제 패망 뒤 미 점령군은 그 문제를 무시했고,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이 초청도 받지 못한, 미국과 일본의 담합이었다. 미국의 강요 속에 시작된 1965년 한일협정 협상 때도 일본은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 인정도 사죄와 배상, 재발방지 약속도 끝내 거부했다. 한일이 전쟁을 끝내고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려면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을사늑약 120년, 한일협정 60년째인 올해, 과거 을사년의 실패를 뒤집는 을사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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