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에 영면 “가장 장수하고 도덕적인 대통령”
워싱턴 정치에서는 실패한 대통령
그러나 퇴임 이후가 더 빛났던 대통령
카터 방한, YH사건, YS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
그리고 궁정동 안가 유혈사태-유신체제 몰락
“아버지는 저뿐만 아니라 평화, 인권, 이타적인 사랑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웅이셨습니다.”
29일 <가디언>은 이날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1924~2024)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아들 칩 카터가 발표한 성명에 들어 있는 그 구절을 기사 첫머리에 썼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미 카터는 아마도 모든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일 것”이라는 구절을 기사 제목으로 달았다.
이런 평판에 따르면,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도덕적이었으며, 퇴임 뒤의 행적이 가장 훌륭했던 사람이다. 지난해 11월 사망한 그의 아내 로절린 카터도 96세로 장수했다.
그런 그가 한국과 맺은 인연도 심상치 않았다. 특히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와의 ‘악연’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만큼 깊었다.
가장 오래 살고, 가장 도덕적이었으며, 퇴임 뒤 가장 휼륭했던 대통령
모든 게 상대적인 것이긴 하나, 카터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덜 편파적이었고 속임수를 쓰지도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첨과 호의를 베푸는” 정치적 기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의회와 불화했고 “워싱턴과 세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도덕성·양심과 정치적 유능은 붙어다니기 어려운 것이어서, 카터는 재임 중에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II(SALT II)을 성사시켰고, 캠프데이비드에 이집트와 이스라엘 정상을 불러들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양국 간 화해의 초석을 놓았으며,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에 돌려주고, 베트남전 징집을 기피한 모든 미국인들을 사면했으며, 1972년 리처드 닉슨이 핑퐁외교로 문을 연 중국과의 수교를 1979년에 마무리하는 등 업적들을 쌓았으나,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었다.
1978년 말 팔레비 정권과 이슬람 혁명세력의 충돌 속에 이란이 석유생산을 줄이면서 국제 유가가 3배 가까이 폭등하는 제2차 오일 쇼크로 세계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릴 때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는 공급 부족으로 값이 폭등한 기름을 넣기 위해 자동차들이 주유소에 길게 줄을 섰다. 폴 볼커가 의장을 하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기준금리를 21%까지 올리는 초강수를 써야 했고, 불황에 빠진 미국인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워싱턴 정치에서는 실패했던 대통령
1979년 3월 이란에서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나고 수도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에서 외교관과 군인 50여 명이 인질로 잡혔다. 1980년 초 그들을 구출하려던 비밀 군사작전은 요원 8명이 목숨을 잃는 실패로 끝났다. 미국사회의 침체와 울분 속에 카터는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다. 그해 말 대선 때 공화당은 카터를 ‘지미 후버’라고 불렀다. 1920~30년대 대공황 때의 상징적 인물 허버트 후버 31대 대통령의 무능 이미지를 덮어씌우려는 전략이었다. 그해 대선에서 카터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 대패했다. 카터는 2차 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재선에 실패한 첫 대통령이 됐다. 테헤란의 인질들은 카터가 물러나고 레이건이 취임한 지 몇 분 만에 풀려났다. 항간에는 미국 공화당이 대선 승리를 위해 이란과 흥정했다는 얘기들이 떠돌았다.(<가디언>)
그러나 퇴임 이후가 더 빛났던 대통령
그러나 조지아 주 시골 땅콩농장을 물려받은 ‘시골뜨기’에서 백악관 주인이 된 카터의 인생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한 번 대반전을 이룬다. 카터는 평화사절, 선거 감시원, 공중보건 지원자, 옹호자로 세계를 누비고 다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에도 헌신했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평양을 방문해 전쟁 직전까지 갔던 긴장상태를 누그러뜨렸다. 2002년에는 미국 대통령 경험자로선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1980년에 로절린과 함께 설립한 카터 센터를 중심으로 한 그의 인도주의 활동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무인기(드론) 전쟁, 영장 없는 정부의 민간인 감시, 관타나모 미군기지 내 수용소 등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겸손하게 걷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그는 자신이 믿는 대로 행동했다. 남침례교협회와는 여성에게 평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계를 끊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퇴임 이후의 삶이 가장 훌륭했던 인물로 꼽혔다.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2002년 그런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었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 한 마지막 행동은 국민의 자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람은 그의 재임 기간에 시민 한 사람도 전쟁으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것은 그에게 충분한 위안이 됐다. 러시아에서 그는 거룩한 바보(holy fool)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그의 경력은 정말 유능한 대통령이면서 정말 좋은 사람은 존재할 수는 없다는 불안한 생각을 불러일으켰다.”(<이코노미스트>)
박정희 유신독재 몰락과 지미 카터
카터는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몰락 과정을 살필 때도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70년에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각국이 주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기 시작해 1973년 3월에 미군 철군을 완료했다. 남베트남은 몰락하고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는, 닉슨 독트린 충격의 여파 속에서 사실상 총통제 영구집권을 꾀하면서 주한 미군 철수 내지 감축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실패로 끝난 베트남전 개입에 따른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던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1972~74년)으로 닉슨이 중도 사퇴하면서 정치 사회적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닉슨의 잔여 임기를 채우고 다음 대선에서 이겼으나 그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 카터에게 패배했다. 땅콩농장 집안 아들로 태어나 해군 장교로 복무한 뒤 주 상원의원이 되고 주 지사를 한 차례 지낸, 워싱턴 중앙정계에 별다른 연고도 배경도 없던 ‘정치 아마추어’ 카터가 단숨에 포드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된 것은, 그 나름의 능력 외에 그런 상황 덕이 컸다. 베트남전 패배와 워터게이트 추문 이후 워싱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미덕인 시절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때가 묻지 않고 서툰 아마추어인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카터가 1979년 6월 말에 서울을 방문했을 무렵, 한국도 ‘닉슨 쇼크’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유신 독재체제 선포부터가 그랬다. 닉슨이 약속한 한국군 현대화 지원금을 타내기 위한 맹렬한 로비활동이 발각되면서 미국 정계를 뒤흔든 ‘코리아게이트’(1976년)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박정희는 장기 독재체제를 인정받고 군사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워싱턴의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 등을 통해 매년 미국 유력 정치인과 고위관리들에게 50만~100만 달러를 뿌리다가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그 비밀공작이 들통났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 소위(프레이저 위원회)가 청문회를 통해 이 문제를 집중 추궁하면서 ‘코리아게이트’(박동선 사건)는 한미간 주요 현안이 되고, 이는 결국 김형욱 전 안기부장의 미국 망명과 박정희 체제 비판, 실종을 거쳐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의 박정희 총격 사망으로 숨가쁘게 이어진다.
카터와 박정희는 1979년 6월 30일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한국의 인권상황 등을 놓고 심각한 논전을 벌였다. 박정희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등 악법으로 유신독재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했으나 광범위한 반독재 저항운동에 직면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자유언론실천선언 등으로 학생과 교수, 동아 조선 등 일간지 기자들이 무더기로 검거되고 쫓겨난 사건들이 잇따랐다. 박 정권은 민청학련 조작사건으로 엮어 넣은 사람들 중 민간인 사업가들 일부를 ‘인혁당’사건(인혁당 재건사건)으로 따로 떼어내 그들 중 8명에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내란예비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대법원 선고 확정 뒤 18시간 만에 처형해 버렸다. (중형을 선고했던 이 사건들은 나중에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그럼에도 종교계와 대학, 노동판, 야당을 중심으로 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꺾이지 않고 오히려 들불처럼 일어났다.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등 미국 종교, 시민세력과도 연결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격화되면서 ‘인권외교’를 표방한 카터 방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인권을 내세운 카터가 왜 독재자 박정희를 만나 인권 파괴자인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영구집권을 도와주려 하느냐는 항의였다. 카터의 인권외교는 박정희 체제 말년 통치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카터 방한, YH사건, YS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 그리고 궁정동
1979년 8월 YH무역 여성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9월에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한 것을 문제삼아 박 정권은 그의 의원직 제명을 강행했다. 10월에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현지를 시찰한 안기부장 김재규가 ‘궁정동 거사’를 결행하기에 이르는 과정에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 모두 카터 집권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카터가 방한한 지 4개월 뒤인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는 살해됐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묘사돼 있듯이 유신독재체제의 몰락 원인과 과정을 국내 요인만으로 살피긴 어렵다. 김재규의 ‘거사’에 이르는 과정에는 카터와 그의 인권외교, 주한 미군철수 계획, 박 정권의 미국 로비와 코리아게이트 등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카터는 궁정동 안가 유혈사태 바로 뒤에 일어난 전두환 등 신군부의 12.12 쿠데타를 사실상 용인하는 등 미국 국익 우선의 전통적 대외정책에서 벗어난 적이 없지만, 그가 표방한 인권, 도덕 외교는 박정희 체제를 불편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고 그것을 무너뜨렸던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 입지를 넓혀 주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몰락, 그리고 카터의 워싱턴 정치를 실패로 몰아가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이란 ‘호메이니 혁명’과 팔레비 왕조 몰락이 모두 1979년에 일어났다. 1991년 소련 붕괴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과 10년 전쟁이 시작된 것도 197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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