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시 무조건 따르고 자존심 죽여야 살아남아
왜곡 기사 지적한 댓글에 양심 찔리는 것
내란 수괴 미화하고 김건희 비리 입다물면서
반대세력 악마화하려니 정신질환 올 수 밖에
조선일보 없었으면 괴물 윤석열도 없었을 것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MBC 기자들이 부러워요.”
“왜요? 조선일보가 월급을 더 많이 줄 텐데?”
“MBC에서는 기사 때문에 후배가 선배를 들이받기도 하잖아요. 데스크와 싸우기도 하잖아요. 조선일보에는 그런 거 없어요.”
오래전의 일이다. 출입처에서 만난 조선일보 기자와 그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출입처 장관의 주말 골프가 기자들의 도마 위에 올랐는데, 나는 기사로 ‘조질만한’ 일은 아니라고 했었고 그도 동의했었다. 비판할 만한 일이라면 비판해야 하지만, 괜한 꼬투리를 잡아 기자의 힘을 과시하고 출입처를 길들이려 하는 건 일종의 권한 남용이고 그래서 ‘언론 권력’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었고, 그도 동의했었다.
그랬는데, 다음 날 조선일보에 장관을 조지는 기사가 실렸다. 하여, 그 기자에게 물었다. 어제는 기삿거리가 아니라고 하더니, 이런 기사는 써선 안 된다고 하더니, 신문에는 기사가 실렸네 하며 다소 비아냥거리듯이 물었다. 그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 기사, 제가 쓴 거 아닙니다.
그에게서 들은 전말은 이러했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다고 데스크에 보고했더니 기사를 쓰라고 하더란다. 기사로 쓸 만한 게 아니라고 했지만 쓰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기사를 썼는데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기사를 다 뜯어고치더란다. 기사에 달린 기자의 이름은 그대로 놔둔 채.
20년도 더 지난 시절의 이야기다. 보통사람들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신문사 편집국은 논쟁으로 시끄러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선일보 편집국은 조용하다고 했었다.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고 했었다. 후배가 선배에게 대들거나 데스크와 언쟁을 벌이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것이 조선일보의 조직문화이고, 그래서 조선일보 편집국은 조용하다는 게 정설로 통했다. 그 기사는 내 이름으로 나갔지만 내 기사가 아니라는, 출입처에서 만난 조선일보 기자에게 나는 연민을 느꼈다. 참 힘들게 사는구나, 기자에게 중요한 건 월급보다 기자로서의 명예이거나 자존심일 텐데...
3년 전에 매체 비평지 <미디어오늘>에 조선일보 기자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기자들이 적지 않으며 치료비용 지원 등 기자들의 정신 건강에 회사가 적극적으로 신경을 써달라고 노조가 회사에 요청했다는 기사였다.
기자가 우울증을? 그것도 적지 않은 기자들이? 그런데 왜 치료비용을 회사에 달라고 하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기사를 찬찬히 살펴보니 조직생활 부적응으로 인한 우울증도 있지만, 기사가 나간 뒤에 쏟아지는 ‘적대적·위협적 인신공격’에 정신적 충격을 받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많다는 거였다. <미디어오늘>의 기사는 <조선일보 노보>에 실린 기사를 인용한 것이니 사실일 터인데, 기사를 쓴다는 건 나만 보는 일기장에 글을 쓰는 게 아니고 남에게 알리려고 쓰는 것이고 따라서 반박이나 비판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 우울증을 앓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노보>는 ‘적대적·위협적 인신공격’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기사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활자 매체’의 시절에는 기자와 독자의 관계가 정보와 의견을 하향식으로 전달하는 일방적 소통이었다면 지금은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다.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악성 댓글도 있지만 폐부를 찌르는 댓글도 있다. 기사보다 더 예리한 댓글도 많다. 역기능도 있지만 순기능도 있는데. 기자 치고 댓글 기능을 옹호하는 기자는 보지 못했다.
정당한 기사에 딸린 막무가내 악성 댓글에 학벌 좋고 똑똑하고 자존심 강하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조선일보’라는 자부심 넘치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며 우울증을 호소할까? 그럴 것 같지는 않을 거다. 사실이 아니라는 댓글과 사실 왜곡이라는 댓글과 여론 조작이라는 댓글과 선전 선동이라는 댓글과 조선일보가 언론이면 우리집 화장지가 팔만대장경이라는 댓글에 항변할 수 없으니 자괴감이 드는 것이고 내 이름으로 나간 기사인데 양심에 찔리니 괴로운 것이고 그런 이유로 기자들이 집단적으로 우울증을 호소하는 게 아니겠는가.
지금은 이른바 ‘스마트 시대’다. 인터넷 무림에는 기자들보다 더 전문적이고 더 통찰력도 있고 글도 더 잘 쓰는 각 분야의 고수들이 즐비하다. 조선일보 대표 논객이라는 김대중은 몰라도 김어준은 안다. 조선일보는 김어준을 ‘일개 유튜버’라고 내리깎으며 언론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으로 치자면 조선일보 대표 논객 김대중은 김어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산다.
‘내란 수괴’ 윤석열에 이어 ‘내란 수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지 총리’ 한덕수까지 탄핵한 다음 날, 조선일보에는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가 실렸다.
조국혁신당의 이규원 전략위원장은 검사 출신이다. 이른바 ‘별장 성접대 사건’으로 유명세로 치자면 결코 남 부럽지 않은 김학의 전 법무차관의 몰래 출국을 막았다가 자기 식구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검찰에 의해 직권 남용으로 기소되었다. ‘성폭행범’ 딱지가 붙은 전직 검사의 몰래 출국을 막은 검사 이규원은 검찰에겐 자기 식구가 아닌 남이었던 거다.
검찰의 기소로 사실상 검사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이규원 검사는 사표를 내고 지난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에 합류했다. 그런데 법무부는 이 검사의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 신분이라는 게 이유였다. 검사 이규원은 2심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법무부는 검사징계위원회를 열어 이규원 검사의 해임을 의결했다. 사표를 내도 받아주지 않더니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는데 해임을 한 것이다. 공무원에겐 사표를 내고 스스로 떠나면 면직이고, 해임은 일반기업으로 치면 해고에 해당하는 징계다.
해임 처분을 받은 이규원 전 검사는 법무부를 상대로 해임취소 소송을 냈다. 일반기업으로 치면 해고무효 소송이다. 그랬더니 조선일보에는 ‘사표 낼 땐 언제고... 이규원 조국당 전략위원장, 검사직 해임취소 소송’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아무 생각 없이 그 기사를 접하면 ‘그러게? 사표를 냈다면서 왜 소송을 내지?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할 수 있는 기사다.
이규원 전 검사는 검사로 복직하려고 소송을 낸 게 아니다. 해임이라는 징계는 부당하다는 ‘명예 찾기’ 소송을 낸 것이다. 그걸 조선일보 기자가 모를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조선일보가 그토록 물고 뜯었던 조국 전 법무장관이 창당한 정당에 합류한 것이 싫어서 기사를 악의적으로 쓴 걸 게다. 아니면, 오래전에 출입처에서 만난 그 기자처럼 기자는 기사를 그렇게 쓰지 않았는데 데스크가 조선일보의 의도에 맞게 싸그리 뜯어고쳤거나. 그래서 조선일보에는 우울증을 앓는 기자들이 많은 게 아닐까? 기사에는 익명의 ‘법조계’가 유일한 취재원으로 등장하는데, 그 익명의 ‘법조계’ 씨는 실존하는 인물일까? 혹시 조선일보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은 아닐까? 기사를 그렇게 쓴다면, 천사도 악마로 매도할 수 있고 악마를 천사로 둔갑시킬 수도 있는데, 천지창조를 할 수도 있는데... 별별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덕수 총리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된 다음 날의 조선일보는 ‘거야 29번째 탄핵 폭주’라는 아젠다 세팅(Agenda Setting, 의제 설정)과 ‘탄핵 단두대’라는 혐오 프레임으로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쏟아낸다. 그와 동시에 ‘윤석열이 가장 아낀 관료 최상목’이란 기사로 최상목 권한대행을 띄우며 민주당과 분리하여 윤석열 쪽에 포진시킨다. 조선일보에게 민주당과 이재명은 적군이고 윤석열과 한덕수는 우군이다. 최상목 권한대행에게도 우군이 되라는 거다.
조선일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향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왜곡의 확증편향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민주당(또는 이재명) 혐오와 윤석열 탄핵 반대에 고정시킨다. 조선일보에게 독자는 언론 소비자가 아니라 반복 학습으로 세뇌시켜야 하는 선전 선동의 심리전 대상이다.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에 따르면,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또한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고 한다. 나는 조선일보에서 괴벨스의 재현을 본다.
조선일보를 관찰하다 보면, 조선일보는 보도가 아니라 대중심리전을 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보수진영의 독자들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혐오 프레임’은 조선일보가 즐겨 쓰는 ‘전가의 보도’이다. 손혜원에게도 조국에게도 윤미향에게도 혐오 프레임을 씌워 마녀 사냥을 했다. 기승전 이재명 혐오로 이어지는 조선일보의 논조도 그러하다. 그런 조선일보에서 기자들이 기자답게 기사를 쓸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조직문화에 순치되기 전의 젊은 기자들일수록, 기자의 양심이 살아있는 기자일수록, 괴로울 것이다. 조선일보 기자들의 집단 우울증, 그 질환의 원인은 ‘쓰고 싶지 않은 기사’를 쓰기 때문이 아닐까.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논객이라는 김대중에 따르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괴물이다. 이재명은 ‘대단한 사람이기 전에 무서운 사람’이고,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나 학문적 경력, 사회적 명망 쌓기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거의 독학하다시피 변호사도 하고 시장도 하고 도지사도 하고 대선 후보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흔히 입지전적인 사람이고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왜 조선일보 대표 논객 김대중의 눈에는 ‘괴물’로 보이는 걸까? 조선일보를 한입에 삼켜버릴 것 같아서 무서운가?
궁금하다. 그런 조선일보에서 윤석열 검찰이 이재명에게 덕지덕지 붙인 딱지는 정적 제거를 노린 정치적 기소라고 말할 수 있는 기자가 나올 수 있을까. 선배와 언쟁을 벌이고 데스크를 들이박는 젊은 기자가 나올 수 있을까?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논객이라는 김대중에 따르면, 대선후보 윤석열은 검증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 지망생’도 아니고, 대중적 리더십에 익숙하지도 않고, 대통령으로서 지녀야 할 자질과 능력이 의심스럽고, 그의 ‘그릇’에 대해 불안감이 없지 않고, 이른바 검찰 만능주의 사고방식도 걱정이지만,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단다. 그의 단점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 그는 ‘지도자’라기보다 ‘때 묻지 않은 사람’이라고 대선후보 윤석열을 미화하며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윤석열을 지지하라고 세뇌한다.
궁금하다. 그런 조선일보에서 대통령 윤석열의 무지와 무능, 독선과 불통을 기자들이 매섭게 비판할 수 있었을까? 김건희의 주가조작 의혹과 디올백 선물을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비판할 수 있었을까? 그런 조선일보에 정론직필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언론윤리에도 쓰여 있는 ‘불편부당한 자세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보도’가 가능할까?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조선일보 대표 논객 김대중은 왜 대선후보 윤석열을 검증하지 말라고 했을까? 지금도 그때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부릴까?
모든 생물체에겐 자기방어의 본능이 있다. 공격이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방어를 한다. 인간도 그렇다. 물리적 공격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공격에도 그러하다. 내 기사에 누가 시비를 걸면, 일단 방어부터 한다. 기사에 오류가 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정정하면 되는데, 자존심 때문인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칭 ‘일등신문’이라는 조선일보는 특히 심하다. 대신, 오류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 애쓴다. 오류를 숨기고 억지 논리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확증편향의 늪에 빠져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된다. 조선일보가 그렇다.
지난 20일, 조선일보에 실린 박은주 기자의 ‘운동권 정년 연장의 꿈, 계엄이 도왔다’는 칼럼은 확증편향의 전형을 보여준다. 박 기자는 ‘계엄 준비설’을 폭로했던 민주당 최고위원 김민석이 몹시도 미운가 보다. 칼럼에는 배배 꼬인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다. 김민석은 반(半) 은퇴상태인 운동권인데, ‘80년대 집회시위 선동’의 기술 덕분에 겨우 살아났단다. 김민석은 ‘계엄 준비설’을 확신하지 못했는데 윤석열이 바보같이 사실로 증명해주었단다. 12.3 계엄 사태 당시 우원식 국회의장이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간 것도 ‘운동권 근성’이 있어서 그런 거라며 ‘월담 우원식’이라고 비꼰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는 ‘유례 있는 폭거’이고 합법인데, 젊은 세대가 분노한 건 영화 <서울의 봄>을 봤기 때문이란다. 그 영화만 없었다면 윤석열의 내란은 성공했을 거라는 얘기다.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대유행이 된 건, 그 교수들은 잃을 게 없어서란다. 확증편향도 이런 확증편향이 없다. 검색해보니 박은주 기자는 부국장급의 중견 기자다. 2012년 대선후보였던 박근혜에게 ‘형광등 백 개의 아우라’가 있다고 아부를 진상하던 그 기자다. 그 이전에 내가 알던 조선일보 기자 박은주는 감성적이고 기사도 잘 쓰던 문화부 기자 박은주였다. 안타깝다.
윤석열은 억세게 ‘관운’이 좋은 사나이다. 부지불식 간에 내뱉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한마디의 말로 서울중앙지검장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는 출세 가도를 달리더니 자기를 발탁하고 임명한 대통령의 등에 칼을 꽂고 그 자리에 올랐다. 사실상 공짜로 얻은 거나 마찬가지라서 그런 걸까, 대선후보 시절에는 ‘임기 5년짜리 대통령이 겁이 없다’고 막말을 해대고 TV토론에는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나오더니 대통령이 되자 속된 말로 겁을 상실한 만인지상의 왕이 되었다.
윤석열은 ‘확증편향’ 그 자체다. 12.3 계엄은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된 국회와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결연한 구국의 의지를 실행에 옮긴 거라는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확증편향의 정점을 찍었다. 내란 수괴가 된 대통령 윤석열은 확증편향을 넘어 망상증 환자다. 윤석열은 ‘12.3 계엄은 합법이고 정당하다’는 주장을 꺾지 않을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대학생 때도 교수였던 부친에게 고무호스로 맞던 불굴의 꼴통 기질이 어디로 가겠는가.
윤석열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확증편향과 편집증과 망상으로 쌓은 ‘365일 24시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로지 국민만을 생각하는 대통령 윤석열’이라는 허상은 무너지고 ‘내란 수괴’라는 객관적 사실과 법정에 서야 하는 현실만 남는다. 그래서 윤석열은 자기의 주장을 꺾지 않을 것이고, 탄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국민의 불안과 고통은 가중될 것이다.
확증편향은 무서운 거다. 나는 매일 조선일보에서 ‘확증편향’을 본다. 확증편향이라는 모래성 위에 서 있는 조선일보를 본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진짜 괴물을 본다. 확증편향 조선일보가 없었다면, 확증편향 대통령 윤석열도 없었을 것이다. 수구 진영의 스피커가 되어 괴벨스가 울고 갈 선전 선동으로 독자들을 확증편향의 울타리에 가두는 조선일보가 없었다면, ‘내란 수괴’ 윤석열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배출한 논객 김대중 씨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꼽히던 시절도 있었다. 호랑이가 담배도 피우던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조선일보 사주는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조선일보가 지금도 그때의 행태를 고수하고 있다면, 해가 지는 서산의 석양에 젖은 몸을 말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대에 뒤떨어진 언론사는 시장에서 도태되어야 한다. 그게 시장의 법칙이다. 조선일보를 언론시장에서 퇴출해야 할 이유가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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