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혹세무민 원로 불러 내란 책임 덮기
윤석열 내란이 이재명 탓이라는 104세 노인 이어
이번엔 고전 들먹이며 정치 혐오 부추기는 학자
이재명 악마화ㆍ국회 비난…흥분한 청년이 문제?
누가 '경로효친' 나라를 '틀딱혐오' 나라로 만드나
내가 사는 이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경로효친(敬老孝親)의 나라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학교에서 귀가 닳도록 ‘경로효친’을 들었다. 이 나라에서는 나이가 계급이고 질서이고 논리이고 정당성이다. 길거리에서 ‘너 몇 살이냐’며 싸우는 나라는 지구에서 이 나라가 유일할 것이다.
내가 사는 이 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나라이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계급이 같다. 그것 역시 학교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교육은 없었는데, 대통령을 임금으로 섬기는 군사부일체 교육은 있었다. ‘우리는 민족 중훙의 역사적 사명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우리는 서서히 대통령과 임금과 국가를 동일시하도록 ‘세뇌’되었다. 그런 탓에 나이 든 이들 중에는 대통령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왕조시대의 사고에 젖은 이들도 많다.
윤석열의 12.3 계엄 난동으로 보수가 궤멸의 위기에 처하자 조선일보는 ‘원로 인터뷰’를 연재하고 있다.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을 시작으로 올해 104세라는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와 손봉호 전 서울대 교수에 이어 12월 23일에는 “증오의 정치 넘어 야수의 정치, 지금은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이라는 제목으로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
조선일보는 ‘원로 인터뷰’라는 미명으로 ‘원로’라는 낱말을 오염시켰다. 원로란, 단지 나이가 많은 노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로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노인의 지혜’다. 평지풍파를 겪으며 질곡과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노인의 지혜는 아무리 난해해도 백 번을 읽으면 저절로 뜻을 알게 된다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원로에게는 통찰과 혜안만 있는 게 아니다. 관대함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다. 증오과 적개심으로 후대를 무장시키지 않는다. 원로에게는 인자한 마음과 부드러운 지혜가 있어 날카롭고 뾰족한 심성을 어루만져주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
조선일보가 ‘104세의 철학자’로 소개한 김형석 전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원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재명 대표가 과거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을 극복하고, 정권 창출을 위한 정치를 하는 대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잘 이끌어주길 바랐는데, 오로지 윤석열 정부를 무능하게 만들어 정권을 쟁취해야겠다는 목표밖에는 없었던 것이고, 자신의 과거를 덮기 위해 사법부와 행정부에 압력을 가하였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계엄령 선포의 원인을 제공했다.” 많이 듣던 소리다. 윤석열의 내란 합리화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김형석 전 교수의 말인즉,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 윤석열의 ‘문재인 정부 지우기’에 협력해야 했고, 정권 창출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도록 협조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윤석열 정부는 무능하게 되었고 결국 내란을 일으키게 했다는 거다. 철학을 오래 하면 이타적인 인간이 되어 집에 강도가 들어도 협조하게 되는 건가,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시간이 거꾸로 흘러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하고 떼만 쓰는 어린아이가 되는 걸까. 윤석열의 무능도 이재명 탓이라니, 이재명이 윤석열을 낳고 키우기라도 했다는 건가.
신복룡 ‘원로’ 교수님은 그보다 훨씬 앞질러 간다. 윤석열은 지혜롭지 못한 미욱한 지도자이고, 듣기를 거부하는 지도자이고, 주위에 간신배들이 우글거리는 지도자란다. 오늘날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건 윤석열이라는 모자란 지도자 때문이라는 거다. 그쯤이야 굳이 원로의 진단이 아니어도 이미 코흘리개 초딩들도 다 아는 ‘오래된 진단’이고 ‘공인된 사실’이다.
윤석열은 공명심, 교만으로 무장된 허영, 오판, 그리고 무지로 인하여 12.3 계엄을 선포한 거란다. 원로는 공자의 말씀과 세종 임금의 사례까지 들어가며 현학적으로 자신의 진단을 설명한다. 그런데, 겉이 화려하니 속이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이 계엄령 선포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건, 지은 죄가 많아 후사가 불안하고 불안하여 한방에 반대 세력을 싸그리 없애버리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헌법 따위는 개무시하는 도박을 한 거다. 저잣거리의 언어로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걸 고전과 현자들을 끌어들여 현학적으로 설명한다고 원로가 되는 건 아니다.
조선일보에 세뇌된 좀비들에게나 통할 것 같은 ‘기승전 이재명 혐오’ 프레임이 원로에게도 작동한다. 이재명 대표는 민중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것이 실수였고, 민중에 휩쓸리는 정치인은 민중과 함께 죽고, 민중에게 거역하는 정치인은 민중의 손에 죽는단다. 그들의 환호는 언젠가 독이 돼 돌아올 거란다. 이재명 대표는 시대정신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없단다.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나라를 엉망진창의 난장판으로 만들고 위기의 수렁에 빠뜨린 건 대통령 윤석열인데, 조선일보가 원로라는 떠받드는 이는 자다가 깨어 봉창 두드리듯 이재명 대표에게 악담을 해댄다.
지금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하단다. 망국 직전의 로마 제국을 보는 것 같단다. 경력이라야 이제 고작 80년인 한국의 민주주의는 광기의 정치를 지나고 탄핵의 정치와 증오의 정치를 지나 야수의 정치 시대에 접어들었단다. 한국 정치의 함정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국회란다. 내각제를 하기엔 이 나라의 국회의원들은 인면수심이란다. 내각제를 하면 나라가 거덜 날 거란다.
저 살자고 난데없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건 ‘내란 수괴’ 윤석열인데, 원로의 입에서 나오는 진단과 처방은 정치 불신과 정치 혐오다. 국민이 뽑은 국회이고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결의하였으니 그 결의를 거부할 명분이 없고, 지구상의 모든 국민은 자기의 분수에 가장 알맞은 국회의원을 뽑는다고 말해 놓고는 국회가 문제이고 국회의원들은 인면수심이라는 원로의 강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국회에는 내란에 동조하는 1백여 명의 짐승 같은 국회의원이 있기는 하다만.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놓쳤는가. 원로의 사회 진단은 쌍팔년도의 고장난 레코드 같다. 아버지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교육마저 무너졌단다. 그것이 비극의 근본 원인이란다. 날마다 경로효친을 암송하게 하고 강제로 결혼도 시키고 아이도 낳게 하고 도덕책을 달달 외우게 하면 나라의 근본이 서고 지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원로가 제시하는 해법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원로가 제시하는 마지막 해법은 지식인의 역할이다. 정치권의 회심이나 회개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단다. 조선 말의 선비 황현을 소환하고, 메이지 시대의 일본 학자 니시 아마네의 말을 인용하고 영국 역사학자 존 토시의 호소를 거론하며 지식인은 당대 민중의 열기를 내려줄 해열제가 되어야 하고, 민중의 백내장을 수술하는 안과 의사가 되어야 한단다. 그것이 이 국가와 민족의 마지막 보루란다.
그러니까 인구에 회자되는 고전과 역사 속의 인물들을 두루 진열하며 원로께서 하는 말씀은 윤석열의 12.3 계엄 선포와 내란에 격분하여 촛불을 들고 응원봉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에게 2030 청년들에게 지식인들은 진정제 주사를 투여하여 윤석열 탄핵을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거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를 내란이 아니라 고도의 통치행위라는 시각으로 보게 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이 시대 지식인들의 임무라는 거다. 윤석열을 성토하는 시국선언을 낸 수천 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은 지식인이 아니라는 거다.
조선일보의 소개를 보니 신복룡 전 교수는 유신 말기에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대통령 박정희가 애청자였다고 한다. 어떤 얘기를 했길래 박정희의 귀를 잡아당겼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박정희는 좋은 지도자는 아니었다는 거다. 그의 말로는 총에 맞아 죽은 비극이었다는 거다. 배운 것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는 걸 곡학아세(曲學阿世)라 하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걸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 한다. 언론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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