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원로 사용법, '경로석 훈계 저널리즘'
속세 떠난 스님을 '탄핵 반대' 스피커로 활용하고
윤석열 지지 104세 철학자 인터뷰, '경로우대'인가
'성찰하라'는 원로 교수, 조선일보 먼저 꾸짖었어야
읽은 지 오래됐어도 마음에 남는 책이 있다. 내겐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런 책 중의 하나다. 하도 오래전에 읽은지라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이것만은 기억에 남아 있다. 조르바는 현자가 아닐까?
현자는 많이 배워서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오래 살았다고 현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현자란 인생을 살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이 작동하는 이치를 깨닫고, 그런 경험이 쌓여 세상을 통찰하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현자는 그런 사람이다. 하여, 흔히 원로라 하면 나는 조르바 같은 현자를 떠올린다.
지난 주말에 ‘내란 수괴’ 윤석열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남은 건 헌법재판소의 심판인데, 이런저런 걱정이 있긴 하지만 헌재에서 기각되진 않을 것 같다. 윤석열의 ‘내란죄’에 비하면 박근혜의 국정농단은 순한 맛이고 새 발의 피였는데, 헌재는 재판관 전원일치의 결정으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했었다.
야당이 싫다고, 하고 싶은 걸 맘대로 못하게 한다고,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짓밟고 정부 견제 기능을 마비시키려 했는데도 헌재가 탄핵을 기각한다면, 앞으로 어느 대통령이든 국회가 맘에 들지 않으면 ‘친위 쿠데타 카드’를 사용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헌재가 미리 발부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라 꼴이 온전하겠는가.
조선일보가 ‘원로 인터뷰’를 연속으로 지면에 싣고 있다. 원로들에게 듣는다, 권력에 빌붙어 특권을 누리던 언론이 나라를 걱정하는 척할 때 많이 써먹는 수법이다.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을 시작으로 올해 104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그리고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인터뷰가 사흘 연속으로 실렸다. 세 분께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종이 낭비에 불과한 인터뷰이고 국민을 홀리는 인터뷰이며 여의도 공원에서 나부끼던 수많은 깃발에 적힌 재치와 통찰만도 못한 인터뷰다.
먼저 ‘우리 사회에 火가 너무 많다’는 성파스님의 인터뷰를 보자. 스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단다. 그렇다 치자. 그 수심은 조선일보와 같은 맥락의 수심일까? 세속의 격랑은 적막한 산사도 비켜가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런 게 다 보이다니, 조선일보 기자는 눈이 참 밝은가 보다. 그런데 그 격랑을 일으킨 자들의 몰양심과 몰염치는 왜 보이지 않을까?
조선일보 기자의 의도적인 질문에 성파스님은 선문답 같은 답변을 하였는데, 내 눈에는 이렇게 읽혔다. 잠시 성파스님에 빙의하여 조선일보 기자의 질문에 답하자면 이러하다.
(기자)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스님) 그 사람의 업보입니다.
(기자) 정치인들은 상대에 대해서는 욕심이라고 하고 자신은 사명감이라고 하지요.
(스님) 다 그렇지는 않지요. 내란을 일으킨 자와 막은 자가 같을 순 없지요.
(기자)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로 화합이 안 됐습니다.
(스님) 칼 들고 죽이려는 사람과 화합이 되겠습니까?
(기자) 왜 우리는 전체를 아우르고 화합하고 이끌 지도자를 길러내지 못한 것인가요.
(스님) 그런 지도자가 보이면 조선일보는 싹을 자르려 했지요.
(기자) 사회 전체에 분노, 화가 많습니다.
(스님) 그 분노의 발원지에 임금이 살고 있어요.
(기자) 화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요.
(스님) 참지 말아야 합니다. 광장에 나와 외쳐야 합니다.
(기자) 탄핵 이후의 혼란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스님) 죄지은 자들이 석고대죄하면 평온해집니다.
(기자) 탄핵 심판 과정에서 분열과 갈등이 걱정됩니다.
(스님) 조선일보가 나를 찾아온 것도 그러려고 온 거 아닌가요?
(기자)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스님) 징벌이 없으면 악은 반복된다는 교훈입니다.
104세 원로 철학자라는 김형석 명예교수 인터뷰는 저잣거리 장삼이사의 개똥철학만도 못하다. 윤석열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간 ‘어른’이 김형석 전 교수라는데, 윤석열의 정치 행로는 처음부터 입력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 결국 내란 수괴로 막을 내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플라톤은 ‘지도자의 무지는 사회악’이라고 했단다. 굳이 플라톤을 소환하지 않아도 그쯤은 나도 안다. 개인의 무지와 무능은 죄가 아니다. 그 피해자는 그 자신이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자리를 탐하면 죄가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니까. 무지하고 무능한 자가 대통령이라고 생각해보라. 전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통찰과 혜안이 있는 ‘원로 철학자’라면, 그런 자가 정치를 하겠다고 인사하러 왔을 때 왜 말리지 않았을까.
민주당 때문이란다. 민주당이 계엄 선포의 원인을 제공했단다. 이재명 때문이란다. 이재명이 과거를 덮기 위해 행정부와 사법부에 압력을 가했단다. 문재인 때문이란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 왔다 갔다 했단다. 문재인이 좌우를 더 갈라놨단다.
정치 지도자에겐 역사관이 있어야 한단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역사관이 없는 대통령이 104세 철학자가 지지하는 윤석열이다. 법조계 출신은 암기력은 좋은데 사고력은 부족하고 운동권 출신은 국제감각이 부족하단다. 100세 넘게 철학을 하면 사유하는 능력이 바닥나는가 보다. 정치지도층을 싸잡아 매도하더니 정치권이 방향을 잘 잡아줘야 이 난국을 넘길 수 있단다. 지하철 경로석에서 극우 유튜브에 심취한 노인들도 이보단 낫겠다. "조선일보가 신문이면 우리 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라는 우스개 소리는 여전히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다.
조선일보가 게재한 세 번째 원로 인터뷰는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다. 소개를 보니 이력이 다채롭고 화려한데 조선일보의 독자윤리위원장이었다는 건 없다. 조선일보와 특수한 관계라는 걸 숨기고 ‘원로’라고 내세우는 건, ‘투명성의 원칙’이라는 언론 윤리에 어긋난다.
기자의 질문은 다분히 유도성 질문이다. 윤석열 탄핵 소추가 또 다른 정치·사회적 혼란을 부를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북한의 동향을 우려한 사람들도 있다, 탄핵 찬반 편가르기로 상대를 적대시하는 분위기까지 있다, 보수가 궤멸할 것으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재명 대표가 법원 판결로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되면 국민의 판단을 빼앗는 거라는 주장도 있다... 칼럼이 그렇고 사설이 그렇듯 원로와 인터뷰하는 기자의 질문도 결국 ‘기승전 이재명 혐오’로 귀결된다.
손봉호 교수는 국민은 대통령을 너무 몰랐고, 대통령은 국민의 수준을 오판했단다. 과연 그럴까. 국민이 대통령 윤석열을 너무 몰라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아니다. 국민은 윤석열을 잘 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소시오패스 증후군이 있고, 지은 죄가 많아 후사가 불안하고 불안하니 쿠데타 한 방으로 국면을 바꾸려 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자 곧바로 국회 앞으로 달려갔고, 200만 시민들이 여의도에 모여 윤석열 탄핵을 외쳤던 거다.
지금은 스마트 시대다. 윤석열과 유착된 또는 윤석열이 장악한 주류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으나 그럴수록 깨어 있는 시민들은 더 적극적으로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진짜 세상을 탐지했다. 국민은 적당히 짖다가 알아서 조용해지는 개, 돼지가 아니다. 윤석열은 국민의 수준을 오판한 게 아니라 국민을 무시했다. 국민이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갔고, 하지 말라고 하면 고집스럽게 더 했다. 그는 참과 거짓이 바뀐 세상에 사는 리플리였고,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청개구리였다.
손봉호 교수는 우리 속에 내재한 어떤 ‘후진성’이 이런 사태를 불렀는지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하여 친위 쿠데타의 내란을 일으키는 나라, 후진 나라다. 우리들의 나라가 그런 나라가 된 데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특히 조선일보가 그러하다. 조선일보와 특별한 관계가 있고, 할 말을 하는 원로라면, 손봉호 교수는 조선일보부터 꾸짖어야 했다. 조선일보 같은 후진적 언론이 우리 속에 내재한 후진성의 발원지이고, 그런 후진성이 이런 사태를 불렀다고. 그런데 조선일보는 반성은커녕 ‘기승전 이재명 혐오’ 바이러스를 살포하며 또다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알고 보면, 조선일보가 나라 망치는 주범이라고.
단지 나이가 많다고 원로가 아니다.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고 권위가 있어야 원로다. 존경과 권위는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다. 조선일보의 원로 사용법, 후진적이다. 지하철 경로석의 훈계 저널리즘보다 못하다. 종이 낭비하지 말고 폐간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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