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상업용은 동결하고 산업용 평균 9.7% 인상

한국전력 역마진에 누적 적자 41조·부채 203조

하루 이자만 122억…민간기업이라면 생존 불가

신재생 에너지 전환·전기 수요 급증에 대응하고

안정적 공급망 구축하려면 전기료 인상 불가피

국민 고통 분담 설득하고 취약층 지원은 늘려야

정부와 한국전력(한전)이 주택용·상업용 전기요금을 동결하고 산업용만 24일부터 평균 9.7% 올리기로 했다. 최근 몇 년간 전력 생산에 필요한 연료(에너지) 가격은 크게 올랐으나 정부가 전기요금을 묶어 둔 탓에 한전 부채는 203조 원으로 폭증했다. 2021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누적된 적자도 41조 원에 달한다. 하루 이자만 122억 원으로 연간 4조 5000억 원을 빚 탕감에 써야 하는 처지다. 민간기업이라면 벌써 파산했어야 한다.

 

아파트 현관 수신함에 꽂혀있는 전기요금 징수 영수증。 연합뉴스
아파트 현관 수신함에 꽂혀있는 전기요금 징수 영수증。 연합뉴스

고물가에 또 산업용 전기료만 올린 고육지책

한전 적자가 쌓이고 자구 노력만으로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결국 정부가 세금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이 지경에 이르지 않으려면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전력 수요 급증과 신재생 에너지 전환 대응 등 전기료를 올려야 하는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려면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 센터를 더 많이 건립해야 한다. 자동차를 비롯해 모든 산업이 전동화하고 것도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원인이다. 신재생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한전은 핵심 역할을 한다. 한전이 없으면 풍력과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 유통이 어렵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을 구축하는 일도 한전이 맡고 있다. 대한민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양질의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한 한전 역할이 작지 않다. 한전의 적자가 길어지면 제조업 경쟁력의 기반이 되는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

한전의 고민은 23일 발표한 두 쪽짜리 보도자료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2022년 이후 6차례 요금 인상과 고강도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적 적자와 약 203조 원의 부채로 재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반도체와 AI 등 미래 첨단산업 기반 조성을 위한 전력망 확충과 정전·고장 예방을 위한 필수 전력 설비 유지·보수를 위해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효율적 에너지 소비 유도와 안정적 전력 수급을 위해서도 요금 조정을 통한 가격신호 기능 회복이 필요하다. 그간 누적된 원가 상승 요인을 반영하되 물가와 서민경제 부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내용. 연합뉴스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내용. 연합뉴스

중소기업 5.3%, 대기업 10.2% 차별적 인상

산업용 전기를 쓰는 기업은 전체 한전 고객(약 2500만 호)의 1.7%인 약 44만 호 정도지만 전력 사용량은 53.2%에 달한다. 산업용은 사용량이 많은 대기업을 ‘을’, 상대적으로 전기를 적게 사용하는 중소기업을 ‘갑’으로 분류한다. 갑과 을의 구분은 계약전력 300kW를 기준으로 한다. 300kW 미만이면 갑, 이상이면 을에 해당한다.

한전은 내수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대기업에 더 높은 인상률을 적용했다. 대기업은 10.2%, 중소기업은 5.2% 각각 인상했다. 이에 따라 대기업 전기요금은 1kWh(킬로와트시)당 165.8원에서 182.7원으로, 중소기업은 164.8원에서 173.3원으로 오른다.

대기업은 한전 전체 고객의 0.1%로 극소수지만 전력 사용량은 263TWh(테라와트시)로 전체 사용량(546TWh)의 48.1%를 차지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산업용에 국한된 이번 전기요금 인상만으로도 대략 전체 요금을 5%가량 올리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전의 추가 전기 판매 수익이 연간 단위로 약 4조 7000억 원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기자실에서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과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이 전기요금 인상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10.23. 연합뉴스
2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기자실에서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과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이 전기요금 인상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10.23. 연합뉴스

너무 싼 전기요금은 에너지 낭비 부추겨

한전은 지난해 11월에도 주택용과 소상공인용을 제외하고 산업용 전기료만 평균 4.9% 인상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이번과 같았다. 한전 적자와 부채가 쌓여 전기료를 큰 폭으로 올려야 할 상황이지만 높은 물가를 고려해 기업용 전기료만 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용만 인상하는 것은 땜질 처방일 뿐이다. 신재생 에너지 전환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전동화에 대응하려면 비정상적인 한전의 재무 상태를 신속히 정상화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주택용과 상업용도 인상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 절감 측면에서도 전기요금 현실화가 시급하다. 저렴한 전기료는 에너지 낭비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농업용 전기가 단적인 예다. 한전은 어려운 농가 사정을 고려해 농업용 전기를 싸게 공급하고 있다. 그 결과 고추를 말릴 때 가동하는 건조기의 전기요금이 고추 가격보다 비싼 상황이 연출된다. 주택용과 상업용도 마찬가지다. 전기료 부담이 크다면 여름철 상점들이 문을 열어 놓고 영업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정도 에어컨 사용 시간을 줄일 게 분명하다.

 

한국전력은 23일 주택용과 상업용 전기요금은 동결하고 산업용만 평균 9.7% 인상했다. 사진은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본부 모습. 연합뉴스
한국전력은 23일 주택용과 상업용 전기요금은 동결하고 산업용만 평균 9.7% 인상했다. 사진은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본부 모습. 연합뉴스

주요국의 절반 이하인 전기요금 현실화 시급

한국과 달리 주요국은 에너지 가격 상승분을 전기요금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1년부터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했으나 에너지 가격 상승분을 실제 전기료에 반영하지 않고 있다. 에너지 가격은 급등했는데 전기요금을 동결하거나 찔끔 올리는 땜질 대책을 몇 년간 지속했다. 그러다 보니 주요국들과의 전기요금 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한전에 따르면 주택용 전기요금의 경우 일본과 프랑스는 한국의 2배, 미국은 2.5배, 독일은 3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 14일 전남 나주시 한전 본사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한전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타개하고 전력산업의 안정적 성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전기요금 현실화가 필수적이다. 범국민적 에너지 효율 개선과 기술 혁신을 위한 가격신호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전기 생산 원가를 요금에 합리적으로 반영해 에너지 혁신 기업의 출현과 성장을 유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기료 인상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전력 수요 급증, 신재생 에너지 전환과 기후 위기 대응 등 전기요금을 인상해야 할 이유는 많다. 한전이 재정 악화로 신재생 전환과 전력 공급망 확충, 노후 설비 관리 등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하면 전력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게 뻔하다. 전력 공급이 불안하면 국민 생활 수준이 하락할 뿐만 아니라 반도체와 자동차, 석유화학 등 한국의 주력 산업도 타격을 입는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전기요금 현실화가 불가피하다. 전기료 인상으로 부담이 커지는 취약층에게는 더 많은 에너지 바우처를 제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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