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트라우마 시달리는 생존 노동자들
이주 노동자에 가혹한 한국 사회와 노조
자본의 요구일 뿐 '도둑 노동자' 아니다
지난 10월 1일은 아리셀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아리셀 대표이사와 아들인 본부장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족들은 경기도 광주 아리셀의 모회사인 에스코넥 본사 앞에서 규탄시위를 하고 있고, 화성시청 분향소 앞에서는 시민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아리셀과 모회사인 에스코넥, 그리고 에스코넥의 원청인 삼성전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합리적인 배·보상, 또 관계자 처벌과 정부의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은 요원할 뿐이다.
"정말이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어요. 화재 벨 소리가 나서 공장 마당에 나왔더니 3동 공장 전체가 찜통처럼 연기가 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펑펑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길래, 그냥 옆에 있는 개울 공원 쪽으로 뛰었어요." 지난 6월 24일, 아리셀 참사 현장에서 살아서 퇴근한 50대 여성 재중 동포 노동자의 얘기다.
지금도 트라우마 시달리는 생존 노동자들
이 노동자는 화재가 발생한 3동 공장이 아닌, 2동 공장에서 일했기에 죽음을 면했다. 2동에서는 리튬 이온 전지를 둘러싸는 케이스를 적절한 크기로 절단하는 작업을 했다. 케이스를 절단해 3동 공장으로 보내면 그곳 노동자가 이 케이스에 리튬이온 셀을 넣어서 최종 조립·포장하는 작업을 한다. 그가 일한 지 2주 만인 6월 24일 화재 참사가 발생했고, 23명의 노동자가 살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필자가 만난 재중 동포 노동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살아 돌아온 게 다행이다, 그런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날 새벽에 동네(시흥시 정왕동) 사는 친구 동생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그 친구가 저한테 아리셀 얘기를 해서 일하게 된 거였거든요. 친구 동생이 월급이 괜찮다더라 해서 저도 일하게 된 거였는데, 정말이지 마음이…"
필자는 시흥시노동자지원센터가 주관하는 시흥시 거주 재중동포 노동자의 노동실태 파악을 위한 조사·연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 여성 노동자 또한 이 조사를 하면서 만났다. 이미 아리셀에서 일하던 지인을 통해 정왕동 소재 인력업체를 소개받아 아리셀에서 일을 시작한 사례다.
정말이지 기본적 안전교육이나 자신이 취급하는 리튬 이온 전지에 대해 최소한의 교육이나 안내는 없었다. 그가 일하면서 들었던 작업 관련 얘기는 한국인 관리자가 "얘기한 대로 정확하게 잘라요, 안 그러면 큰일 납니다"라는 얘기가 전부였다. 정말 천운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우연이라 해야 할지 그는 살아서 집에 올 수 있었다. 참사 현장에서 살아서 퇴근한 노동자에게 시흥시는, 나아가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해 주었을까?
"없어요. 7월 초에 시흥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경찰서 가서 4시간가량 얘기하고, 서명하라고 해서 서명하고, 그게 다예요. 정말이지, 그 뒤로 일을 못하겠어요. 화재 난 거를 보고 있는데, 폭탄 터지면서 뭐가 막 날아다니고 연기가 엄청 나는데 숨이 막혀요. 진짜 한 보름 동안은 잠을 거의 못 잤어요, 그 장면이 계속 떠올라서. 지금도 계속 그래요, 일을 못 해서 그냥 쉬고 있어요."
참사 현장에서 살아서 퇴근한 노동자는 3개월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당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참사 당일 대통령이 직접 방문까지 하면서 수습에 만전을 기하라고 했지만, 참사 현장에서 살아서 돌아온 이주 노동자에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유가족의 요구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주 노동자에 가혹한 한국 사회와 노조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이주 노동자에게 무관심하고 가혹할까? 한 인터넷 사이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필자가 만난 재중동포 노동자, 그리고 참사 희생자는 여전히 '○깨 새끼·년'으로 불린다. 아리셀 참사 희생자인 재중 동포 노동자에게 '누가 너희더러 여기 와서 일하라고 했냐?'라는 비난과 참사 희생자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이 얼마라는 뉴스, 그리고 '정말 떼○들이 한국에 와서 떼돈 벌었네'라는 조롱만이 난무할 뿐이다.
세월호 참사가 교통사고라는 얘기만큼이나 어이가 없는 주장이지만, 참사 희생자 유족의 요구도 귓등으로 듣는지라 윤석열 정부와 한국 사회가 참사 생존자를 살펴보지는 더더욱 않는다. 세월호 참사를 대했던 박근혜 정부처럼 '소 닭 쳐다보듯' 무심하거나 아니면 일차원적이면서 원색적인 비난 뒤편에서 손 놓고 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단식농성장 앞에서 벌어진 '폭식 투쟁' 뒤에 박근혜 정부가 숨었던 것처럼.
한국 사회 노동조합을 포함한 조직노동은 어떨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구처럼 그런 조짐이나 흐름이라도 있을까? 필자가 일하는 시화·반월 공단 지역의 노동조합 관계자의 인식 또한 보통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저시급, 아니 그 밑이라도 받겠다면서 일을 하니까, 여기(시화공단) 노동조건이 좋아질 수 있겠냐고요, 그러니까 임금이 정말 바닥일 수밖에 없어요, 문제죠."
시화공단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를 바라보는 노동조합 관계자의 얘기이다. 즉자적이면서 일차원적인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비단 시흥시,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의 대선이나 유럽의 선거를 보면 이주 노동자 문제를 포함한 난민 문제가 선거를 좌우하는 핵심 정치 의제이자 공약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연합 의회 선거, 프랑스 총선에서는 이주 노동자와 난민 추방을 제기한 극우 정당이 1당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심지어 최근 오스트리아 총선에서도 이주 노동자와 난민 문제에 극우적인 정책을 내건 나치 정당이 원내 1당이 되었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극우 정당의 정책이 무엇이겠는가? 이주 노동자가 자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잠식하기에 유입을 막아야 하고 극단적으로는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요구일 뿐 '도둑 노동자' 아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감소시킨다는 주장만큼이나 마타도어성 주장에 불과하다. 한국을 포함해 대부분 국가에서 이주 노동자는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 필요성 때문에 엄격하게 수입·관리(?)되는 노동력이다. 한국 정부가 엄격하게 유입을 통제하고 있음에도 불법·탈법으로 담장을 넘은 '도둑'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E계열 비자가 아닌, F계열, H계열 비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주 노동자를 수입하고 관리하는 정부의 노동정책은 저임금을 활용하고자 하는 한국 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이주 노동자의 존재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장 조건 개선이 어렵다는 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일 뿐이다. 일부 주변부 업종·직종 노동시장에서 임금·노동조건에 대한 하방 압력이 가중될 수는 있으나 해당 업종이나 직종은 대부분 3D 업무이기에 이미 한국 노동자가 기피하는 업종, 직종으로 노동시장 내 하방 압력은 미미하다. 그런데도 현재의 저임금 구조, 낮은 질의 일자리가 횡행하는 상황을 이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셈이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백번 양보해 이주 노동자의 존재가 일자리 질을 낮추는 주원인이라면 노동조합은 무엇을 해야 할까? 조직하면 된다. 노조 조합원으로 조직하면 된다. 노동조합의 궁극적인 교섭력은 노동시장 내 공급을 장악하는 것이고, 조직화와 임단협 교섭을 통해 바닥을 끌어 올리면 된다.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은 작업장, 나아가 노동시장 내 교섭력을 잠식하는 이질적 존재의 등장에 즉자적으로는 배제해 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직화를 통해 노동시장 내에서 교섭력을 높여 왔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구 산별노조의 등장은 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업·업종 차원에서 이질적 존재인 이주·주변부 노동자 조직화를 통해 전체 노동시장 내 교섭력을 높여 왔던 것이다.
100년 전 얘기가 아닌, 최근에는 미국의 전미서비스노조(SEIU)가 성공적인 이주 노동자 조직화를 통해 조합원 200만 명이 넘는 미국 내 최대 산별노조가 되었고, 2008년 오바마 대통령 당선에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Yes, We Can'(그래, 우린 할 수 있어)이라는 오바마 대선 캠페인 모토는 원래 전미서비스노조의 핵심 구호였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에서 이주 노동자 조직화는 초보적인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지닌 자신만의 정체성에 기반한 일종의 구조적 경계 때문이다. 한국 대공장 노조가 정규직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에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에 소극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주 노동자 조직화가 한국 노조의 '로도스'
그렇더라도 한국 사회 이주 노동자 문제 해결의 시작은 결국 조직화일 수밖에 없다. 이주 노동자가 한국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잠식하기 때문이 아닌, 이주 노동자 자신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이다. 아리셀 참사가 집약해서 제기하는 노동자 산업안전 문제부터 공장 밖 이주민 차별에 이르기까지 주요하게 일관된 목소리를 제기해 왔던 조직은 동서를 막론하고 노동조합밖에 없다. 비단 이주 노동자 문제뿐만 아니라 무지개로 대표되는 LGBT(성 소수자) 문제, 기후 위기 문제 등, 노동조합은 작업장 밖의 민감한 공동체 문제에 적극적으로 이슈를 제기해 왔다.
두 자리 숫자로 대표되는 아리셀 참사 희생자 규모 때문에 한국 사회가 관심을 가질 뿐, 재중 동포, 나아가 이주 노동자는 지금도 매일 같이 어디에선가는 죽거나 다치고 있다. 언제까지 이들을 외면하고 방치할 것인가? 한국의 노동조합이 인종·민족이라는 정체성 속박을 뛰어넘어 이주 노동자·이주민과 연대할 수 있는가가 향후 한국 노동운동의 진전, 또는 퇴행을 규정할 것이다. "이주 노동자, 얘기도 하지 마라, 있는 조합원들 다 떨어진다"는 퇴행적 인식에 안주할 수는 없다. 지금은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는 이솝 우화의 얘기가 한국의 노동조합에게 필요한 시기이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한국 노동조합의 실력과 능력이 가감 없이 드러날 것이고 실패든 성공이든 이를 통해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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