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제재 뚫고 국제무대서 '건재' 과시 기회
10개국 GDP, 세계의 35.6%로 G7 넘어
반서방 성향의 지정학적 실체로 부상 중
"중·러 목표는 옥좌서 미국 끌어 내리기"
"인·브는 비동맹 입장에 중간 지대 모색"
"불공정한 미국 질서에 진짜 불만 반영"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이 최선을 다해 고립시키려 했지만, 러시아는 국제 왕따와는 거리가 멀 뿐더러 이제는 미래 국제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역동적 그룹의 핵심 멤버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브릭스, 회원국 확대한 후 첫 정상회의
10개국 GDP, 세계의 35.6%로 G7 넘어
신흥경제국 연합체인 '브릭스' 정상회의가 10월 22~24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리는 것과 관련해 베를린 소재 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 센터의 알렉산드르 가부에프 소장과 상파울루 소재 제툴리우 바르가스 재단(FGV)의 올리버 슈튄켈 국제관계대학원 부교수는 '브릭스를 위한 투쟁'이란 24일 자 <포린 어페어즈> 공동 기고에서 "푸틴에겐 승리의 순간"이라면 이렇게 평가했다. 카잔은 볼가강 유역에 있는 러시아 연방 내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의 수도다.
올해 7월부터 의장국을 맡은 푸틴은 날로 국제적 위상을 더해가는 브릭스의 정상회의를 주최함으로써 서방의 집요한 공세에도 자신의 '건재'를 알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얘기다.
다가올 카잔 정상회의는 브릭스가 10개국으로 확장되고 첫 정상회의다. 2010년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창설 멤버로 확정하고 이들 5개국의 첫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을 정한 브릭스는 올해 1월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사우디아라비아의 가입을 승인했다. 그러나 사우디는 브릭스 활동에는 참여하고 있지만, 전통적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탓인지 공식 가입은 미루고 있는 상태다. 브릭스 10개국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GDP의 35.6%로, 서방 주요 7개국(G7)의 30.3%를 넘어섰다. 브릭스 10개국 인구는 전 세계의 45%인 반면, G7은 10%도 채 안 된다.
글로벌 사우스에 영향력 확대하는 브릭스
반서방 성향의 지정학적 실체로 부상 중
브릭스의 확대와 그에 따른 영향력 강화 흐름은 지속될 것이란 게 가부에프와 슈튄켈의 예상이다. 글로벌 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개도국·저개발국)를 포함해 많은 나라가 미국과 그 하위 파트너인 G7, 미국 주도의 군사블록에서 소외되거나 가담을 꺼리는가 하면, 미국이 떠받치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금융 기구들의 행태에 좌절한 나머지 대안을 찾고 자율성의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부에프-슈튄켈은 그 대안과 관련해 "이런 것 중에서 브릭스가 가장 중요하고, 적절하며, 잠재적으로 영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카잔 정상회의를 앞두고 공식 가입 신청을 한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은 물론이고 알제리, 방글라데시, 바레인, 베네수엘라,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카자흐스탄, 태국, 콜롬비아 등 30여 개국이 가입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단순한 신흥경제국 모임이었던 브릭스가 이제 글로벌 사우스를 대변하고 반서방 성향을 지닌 지정학적 실체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8일 유엔총회가 60년 가까운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을 1년 안에 중단할 것을 이스라엘에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 이날 표결에서 브릭스 10개국 중 인도와 에티오피아가 기권했고 8개국이 찬성했다. 위에 거론된 가입 희망 국가들도 모두 이스라엘 불법 점령 중단 결의에 가세했다.
이에 반해 G7에선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의식해 미국은 반대했고 영국‧독일‧이탈리아‧캐나다 4곳은 기권했으며 일본과 프랑스는 찬성했다. 브릭스와는 달리 대오가 흐트러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자 대학살에 대한 미국의 '이중 잣대'에 환멸을 느낀 중동·아랍, 동남아 등 글로벌 사우스 국가 대부분이 이심전심으로 등 돌리면서 미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퇴조하는 모양새다.
브릭스 정체성·미래상 둘러싼 내부 논쟁
반서방 그룹과 비동맹 그룹 간 줄다리기
그러나 이번 유엔총회 표결은 브릭스의 내부 결속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인도가 '기권'을 통해 다른 브릭스 국가와 차별화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간의 '특수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 같은 아주 민감한 지정학적 이슈와 관련해 인도가 철저히 국익을 우선시하며 모호하고 소극적인 외교 스탠스를 보여온 것과도 관련이 있다. 반이슬람, 극단적 힌두교 신자인 모디는 2017년 인도 총리론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했으며, 그 이후로 인도는 친팔레스타인에서 벗어나 친이스라엘 경향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부예프-슈튄켈에 따르면, 브릭스의 원년 멤버 사이에는 브릭스의 정체성과 미래상과 관련해 간 중요한 입장 차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브릭스가 미국과 서방이 만든 현 글로벌 질서에 대항하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고 있다. 반면, 인도와 브라질은 현존 질서를 민주화하고 거버넌스 개혁을 통해 세계를 미국 일극 체제에서 진정한 다극 체제로 안내하는 데 이바지하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길 희망하고 있다.
양측의 입장 차는 '미국의 뿌리 깊은 적'인 이란의 가입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란의 가입으로 반미, 반서방 경향이 짙어질 것을 우려해 인도가 반대했지만 중·러가 강하게 밀어붙여 성사시켰다고 한다. 가부에프-슈튄켈은 "반서방 국가들과 비동맹 국가 간의 이런 투쟁이 글로벌 질서 자체에 중요한 결과를 낳으면서 브릭스의 미래를 형성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푸틴 "도로 규칙 결정에 미국 독점 끝내야"
"중국, 현 질서 개혁보다 다른 질서 건설"
가부에프-슈튄켈이 보기에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브릭스가 "미국의 지배적인 패권으로부터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갖게 됐다. 중국, 인도 등 브릭스 멤버들의 관계를 통해 서방의 각종 제재를 '완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서방에 맞서는 더 광범위한 싸움의 일환으로 여기며 미국의 위상을 훼손하는 일이라면 뭣이든 하고 미국 패권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지원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견해다.
그 대표적 사례로 △ 중국·이란·북한과의 첨단 군사기술 공유 △ 유엔 대북 제재 체제 파괴 △ 국제 금융 거래에서 미국 달러화의 지배력 약화와 브릭스 회원국 간 대안 지불 제도 마련 등을 꼽았다. 이와 관련해 푸틴은 지난 7월 러시아의 브릭스 의장국 활동은 미국 주도 질서란 "고전적 식민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의 일환이라면서 도로 규칙을 설정하는 데 워싱턴의 "독점"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권을 쥐고 브릭스 팽창을 실질적으로 밀어붙이는 주체는 중국이라고 지적했다. 2012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집권 이후 야심 찬 '굴기'를 내세우면서 미·중 패권 경쟁은 가열되고 그에 따라 지난 10여 년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가부에프-슈튄켈은 "중국은 자국의 부상을 막고자 미국이 현 글로벌 질서를 지탱하는 동맹과 기구를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이들은 시진핑의 일대일로(중국-중앙아-유럽을 잇는 육상·해상 실크로드)와 글로벌 안보구상(GSI), 글로벌 발전구상(GDI), 글로벌 문명구상(GSI)을 거론한 뒤 "이들 구상은 단순히 현 질서의 개혁보단 다른 질서를 건설하겠다는 중국의 욕망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고 논평했다.
"중·러 목표, 옥좌서 미국 끌어 내리기"
"인·브, 비동맹 입장에 중간 지대 모색"
중·러의 공동 목표는 미국을 글로벌 패자의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고 이를 위해 미국의 제재에도 끄떡없는 대안적 금융 및 기술 플랫폼 구축을 시도하고, 최선의 길은 브릭스 최대 활용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중국은 회원국을 가능한 한 많이 확대하길 원한다. 그렇게 해서 강력하고 꽤 큰 블록의 리더가 되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인도와 브라질은 스탠스가 다르는 게 이들의 견해다. 두 나라는 현재 건설된 국제 시스템을 공격하지 않고 주로 글로벌 거버넌스 개혁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비동맹 스탠스'를 취하며 서방과 중·러 사이에서 중간 지대를 찾으려 애쓰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서방의 러시아 고립 시도를 지지하길 꺼리고 서방 제재에 따른 반사적 경제 이익을 취하면서도 서방과의 관계 단절이나 반서방 블록 가담을 원치 않는다.
그렇지만, 브릭스 내에선 멤버십이 중요한 혜택을 준다는 폭넓은 컨센서스가 있다. 많은 나라의 경우 브릭스와의 관계 강화가 미국, 유럽연합(EU)과의 협상에 지렛대 역할을 할 뿐아니라, 막대한 중국의 투자와 무역을 결정할 시진핑을 대면할 특전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개적인 반서방 캠프와 비동맹 캠프 간의 입장 차에도, 모든 회원국은 세계가 미국 주도 일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향하고 있고, 다극성이야말로 국제적 규칙과 규범, 그리고 글로벌 안정에 위협이 되는 패권 세력을 제약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란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가부에프-슈튄켈은 "서방 정책의 입안자들은 이런 기준점이 되는 브릭스 회원국 간의 합의를 자주 간과하고 있다"면서 "많은 나라에는 브릭스 가입이 매우 매력적 제안이다"라고 덧붙였다.
"불공정한 미국 질서에 진짜 불만 반영"
"브릭스, 커질수록 응집력 약해질 우려"
이번 카잔 회의에서 브릭스 추가 확장의 합의 여부와 확장 규모가 당연히 관전할 포인트다. '반서방 블록화'를 꺼리며 대서방 관계도 잘 가져가려는 인도와 브라질은 추가 확대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지만, '반서방 블록화'를 가속화하려는 중국, 러시아의 적극성을 고려하면 몇몇 나라의 가입은 이뤄질 공산이 크다. 문제는 가입한 뒤 '어느 편에 설 것인지' 하는 점이다.
가부에프-슈튄켈은 브릭스를 "오합지졸" 또는 "글로벌 질서에 직접적 위협"으로 보는 서방의 시각을 평면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치적 그룹으로 브릭스의 등장은 미국 주도 질서의 불공정성에 대한 진짜 불만들을 반영하는 만큼 쉽게 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중·러의 대전략변화로 인해 그룹 내 차이 역시 커지고 현재의 확장은 응집력을 약화시킬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브릭스 멤버가 확대될수록 응집력은 약해지고 더 취약질 우려가 크다는 얘기다.
브릭스의 미래와 관련해 이들은 미·중 간의 기술 경쟁이 극단으로 치닫고 두 개의 양립 불가한 기술 영역들이 등장할 때 양다리 걸치기가 더욱 힘들고 전쟁 등 민감한 지정학적 이슈에서도 공통분모 찾기가 쉽지 않을 걸로 이들은 봤다. 끝으로 가부에프-슈튄켈은 "브릭스 저변에는 현 질서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미국과 다른 서방 강국들은 이 그룹 내부의 역학관계를 감안해 브릭스를 진지하게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중간국들의 브릭스 가입을 막기 위해 힘으로 '위협'함으로써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켜선 안 된다는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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