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마크롱 “배은망덕” 규탄, 사퇴 촉구
4당 바르니에 총리 임명에 “민주주의 부정”
좌파 연합, 극우 RN ‘추락’ 대이변 주도
마크롱, 바르니에 소속 정당 최대 수혜
정치 생명 구한 마크롱 이제 ‘안면 몰수’
“프랑스 국민이 선거를 도둑맞았다.” 지난 7월 프랑스 총선 결선 투표에서 좌파의 희생을 무릅쓰고 극우 국민연합(RN)의 집권 저지에 크게 기여했던 극좌 ‘불굴의 프랑스’(LFI)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7일 파리 시위 도중 한 트럭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150곳서 항의 시위…“선거 도둑맞아”
4당 바르니에 총리 임명에 “민주주의 부정”
LFI가 소속된 좌파 정당연합인 신인민전선(NFP)이 제1당인데도 이틀 전 에마뉘엘 마크롱이 NFP를 물리치고 제4당인 우파 공화주의자(LR) 소속 미셸 바르니에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두고 한 비판이다. 마크롱은 정치권과 협의를 거쳐 5일 집권 여당에 ‘위협’이 되는 극우, 극좌를 빼고 하원의 불신임 투표를 넘을 수 있다고 본 바르니에를 총리를 택했다.
르몽드와 AFP, AP,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마크롱의 바르니에 총리 임명에 대한 항의 시위는 이날 수도 파리, 서부 낭트와 라발, 서남부 보르도, 남부 니스 등을 포함해 프랑스 전역의 150곳에서 벌어졌다. LFI와 청년 단체 중심으로 조직된 시위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한때 긴장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주최 측은 파리 16만 명(경찰 추산 2만6000명) 등 전국적으로 30만 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다.
파리에서 시위대는 오후 2시 바스티유 광장에서 집회를 가진 뒤 행진했다. 시위대는 일부는 바르니에 총리 임명을 “권력 강탈”, “유권자 의사 거부”,“민주주의 부정”이란 표현을 써가며 마크롱의 ‘배신’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탄핵과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몇몇 참석자는 “내 표는 어디 있나?”란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마크롱 배신 규탄, 즉각적 탄핵·사퇴 촉구
“패배에 겸손하게 승복하는 게 민주주의”
행진 대열 선두에 있던 멜랑숑 대표는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는 승리를 받아들이는 예술일 뿐 아니라 패배에 겸손하게 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면서 선거 결과를 무시한 마크롱을 ‘반민주주의자’로 격하했다. 멜랑숑은 “프랑스 국민은 봉기하고 있다. 이제 혁명 단계로 들어섰다. 중단도 휴전도 없을 것이다. 장기전을 해나가자”라고 호소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낭트 시위에 나선 LFI의 앙디 케르브라트 의원은 마크롱의 바르니에 총리 임명을 "민주적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시위대는 "유일한 해결책은 탄핵", "바르니에 반대, 카스테트 찬성"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루시 카스테트(37)는 경제학자이자 파리시 재정국장으로 NFP가 총리 후보로 내세운 인물이다. 보르도에서도 시내 중심 광장에서 '마크롱 쿠데타 반대'란 구호 아래 시위가 벌어졌다.
좌파 진영이 느낀 마크롱에 대한 ‘배신감’은 지난 6월 30일(1차)과 7월 7일(결선) 치러진 프랑스 총선 과정을 살펴봐야 이해할 수 있다. 이 총선은 그에 앞서 6월 6~9일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크롱이 극우 대약진에 밀려 참패가 불가피하자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승부수를 던진 데 따라 실시된 것이다. 당시엔 총선 결과에 따라선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 국민연합(RN)에 사상 처음으로 집권할 기회를 줄 우려가 큰 위험한 승부수로 평가됐다.
실제로 1차 투표에선 우려한 대로 극우 RN의 위세가 확인됐다. RN은 1차에서 하원 전체 577개 선거구 중 총 297곳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단독 과반(289석)도 가능한 수치였다.
좌파 연합, 극우 RN ‘추락’ 대이변 주도
마크롱, 바르니에 소속 정당 최대 수혜
그러나 2차 결선 투표에선 1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43석을 얻는 데 그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좌파 정당연합 ‘신인민전선’(NFP)이 182석으로 의회 제1 당이에 올랐고, 마크롱의 르네상스 등 범여권 연합인 ‘앙상블’이 168석을 확보해 2위가 됐다. 극우 RN은 3위에 그쳤고 4위에는 이번에 총리를 배출한 45석의 공화주의자’(LR)였다그리고 독립 우파 15석, 독립 좌파 13석, 독립 중도 6석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최대 수혜자는 중도우파인 마크롱의 앙상블이었다. 1차에서 70곳에서 1위를 보였던 앙상불이 결선에선 그 두 배가 넘은 168석을 챙겼기 때문이다. 정통 우파인 공화주의자(LR)도 1차에선 20곳에서 1위였으나 결선에선 두 배가 넘는 45석을 챙겼다. LR은 이번에 총리까지 챙겼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한 셈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런 대이변을 만든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극좌 ‘불굴의 프랑스’(LFI)였다. 멜랑숑이 대표인 LFI는 ‘극우 RN의 집권 저지’를 최우선 목표로 내걸고 녹색당과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사회당, 공산당 등을 묶어 신인민전선(NFP)이란 범좌파 정당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좌파, 결선서 ‘대승적인’ 후보 일괄사퇴
정치 생명 구한 마크롱 이제 ‘안면 몰수’
좌파 연합인 NFP는 1차에서 극우 RN의 가공할 위력이 확인되자, 결선에서 RN 후보 탈락을 위해 3자 대결 구도에 있는 후보들이 일괄 사퇴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
결선투표에 진출한 후보 중 224명이 사퇴했다. NFP 469명 중 134명(28.5%), 앙상블은 337명 중 82명(24.3%)으로 좌파의 사퇴가 더 많았다. RN 후보가 있는 3자 대결 선거구에서 일괄사퇴함으로써 '비 RN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사퇴 대상은 6월 30일 1차 투표 결과 각 선거구에서 3위를 기록했던 NFP 후보들이었다. 르몽드는 투표 48시간 전 "반극우"를 표방하며 결행한 후보 224명의 사퇴가 이번 총선의 성격을 바꿨다고 평가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한 중도 연합 앙상블의 대오는 다소 모호했다...좌파 후보들은 일사불란하게 사퇴했다. (“프랑스 ‘공화주의 연대’로 극우 정부 출범 저지했다” 김진호 ‘시민언론 민들레’ 2024.07.08.)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좌파 NFP의 입장에선 바르니에 총리 임명은 마크롱 대통령이 자신들의 정치적 희생 덕분에 기적적으로 정치 생명을 구하고도 이제 와 안면을 몰수한 만큼 배신감이 드는 건 당연할 법하다. 희생 문제는 차치해도 NFP가 182석의 엄연한 제1당이란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는 건 선거에서 드러난 유권자의 의사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엘라베 조사 “55%가 마크롱 선거 도둑질”
극우 RN은 “감시하겠다”…총리 일단 인정
여론조사 결과도 이런 흐름을 그대로 보여줬다. 6일 발표된 엘라베(Elabe)의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74%가 마크롱이 선거 결과를 무시했다고 여겼으며, 55%는 마크롱이 선거를 “도둑질했다”고 여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멜랑숑은 "총선 2차 투표는 (극우) RN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졌는데 그 입장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임명됐다"고 비판했다.
극우 RN은 제1당인 좌파 연합을 배제한 데 의미를 부여하고 일단 ‘묵인’하는 모양새다.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는 "바르니에 총리는 의회와 민주주의에서 핵심적인 정치 세력이 된 RN의 민주적 감시하에 있다"며 "이제는 RN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RN은 바르니에 정부가 자신들을 정치 세력으로 존중하고, 이민과 안보 문제를 중요시한다면 불신임안에 찬성하지 않겠다고 조건을 걸기도 했다.
이로써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대통령과 총리의 소속 정당이 다른 네 번째 ‘동거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조기 총선 60일 만이다. 올해 73세의 바르니에는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수립 이래 최고령 총리다. 정통 우파 공화당원인 바르니에는 3선 하원의원에 상원의원 한 차례, 장관 3차례를 지낸 베테랑 정치인이다.
바르니에는 6일 앞으로 구성할 정부에 중도, 중도우파, 우파뿐 아니라 온건 좌파 인물들도 포함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제4당 출신인 만큼 연립 정부 내에서 그의 운신 폭은 협소할 수밖에 없어 주도권은 마크롱이 쥘 공산이 크다.
좌파 연합에선 바르니에 내각 불신임 투쟁을 다짐한 반면, 3당인 극우 RN은 바르니에 정부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감시를 내세우고 있어 앞으로 바르니에 중도우파 정부는 지금보다 더 ‘오른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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