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칼럼] 71년 민항기 납치사건 그린 ‘하이재킹’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영화 ‘1987’을 쓴 시나리오 작가 김경찬의 새 작품 ‘하이재킹’(감독 김성한)은 단점도 보이지만 장점이 더 앞서 있는 작품이다. 그 장점 중에는 시선을 끄는 것을 넘어 가슴에 와닿는 대목이나 장면도 있다. 그건 장점을 넘어 미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스토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는 다소 뜬금없는 얘기일 수 있겠으나, 이런 대목이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다. 속초-서울 민항기 부기장 태인(하정우)은 비행기 안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납치범(여진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 같이 살자. 더 이상 너 같은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납치범의 눈빛이 흔들린다. 둘의 이 대결을 보고 있으면 관객들도 이제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북으로 납치되지 않고 무사히 착륙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빨갱이로 몰린 빨갱이 아닌 청년이 시도한 비행기 납치 사건
영화 ‘하이재킹’은 1971년 1월 23일에 발생한 대한항공 포커27(프로펠러 여객기 기종) 납북 미수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55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승무원은 기장, 부기장, 수습 조종사, 항공 보안관, 스튜어디스 등 5명이었으며 납치범은 김상태라는 인물이었다. 김상태는 기내 보안관에 의해 사살됐지만 그 과정에서 사제폭탄이 터져 수습 조종사가 몸으로 이를 막고 사망한다. 비행기는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비상 착륙해 승객 전원은 생존할 수 있었다.
영화 ‘하이재킹’의 진짜 미덕은 작품 속 사건이 남북간 갈등에 의한 테러 ’따위’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다. 근데 그건 포스터만으로는, 지금까지 영화에 공개되거나 알려진 정보만으로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 ‘하이재킹’은 남북 문제가 아니라 남남 문제이다. 남한 사람들, 우리 자신들이 만든 이념의 갈등으로 벌어진 대형 사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용대라는 인물, 곧 여진구가 맡은 캐릭터는 남한 사회가 만들어 낸 용공분자이다. 강원도 고성이 고향인 그는 아마도 가족이 6.25 전쟁 과정에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상태이고 그래서 그는 늘 당국의 감시와 탄압, 북의 간첩이라는 고발, 적어도 내통자라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던 모양이다. 당연히 정치적 사회적으로 특히 경제적으로 수세에 몰렸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빨갱이 새끼가 무슨 공부를 하냐며, 그것도 담임 교사가 차별을 하고, 툭하면 경찰들이 집안을 뒤지고, 이런 저런 구실을 삼아 그를 잡아 가고 때리고 했을 것이다.
빨갱이 아닌 온갖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고, 죽이고 탄압했던, 극한의 레드 콤플렉스 사회, 그런 사회가 납치범으로 하여금 사제폭탄을 끌어 안고 ‘기수를 북으로 돌리라’고 외치게 했던 셈이다. 여기서 빨갱이 취급을 받을 거면 차라리 저쪽으로 올라가 진짜 빨갱이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빨갱이 사냥은 순전히 독재자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깔아 놓은 정치적 포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북괴’가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감추고 싶었던 실제 사건
젊은 세대라면 두 가지 점에서 이 영화에 의문을 표할 텐데, 첫 번째는 다소 단순한 것으로 50년도 넘게도 전인 1971년에도 한국에 국내선이 있었느냐는 것일 수 있다. 모든 비행기의 역사는 단거리에서 장거리로 점차 확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도 국내선부터 만들어진 후 서울-도쿄 노선, 서울-LA 노선 등으로 확대됐다. 그러니까 1971년 남한의 경제수준으로 볼 때 서울-속초 국내선은 맞는 얘기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탑승할 때 고무신을 벗는 할머니도 있었으며 닭을 안고 타는 아줌마도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을 뿐이다.
청년 세대 관객들이 진짜 의심스러워 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두 번째 의문부호는 1971년에 민항기를 북한으로 납치하려는 하이재킹 사건이 실재했느냐는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큰 사건이 왜 지금껏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다. 이 자진 월북용 비행기 납치 사건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한 감추거나 은폐됐어야 하는 일이었다. ‘자유 대한’ 남한에서는 자진 월북이나 자생적 공산주의자는 ‘없다’. 아니 지난 수십년 간 그건 ‘없는 일이어야만’ 했다. 모든 일은 ‘북괴’가 조종하고 일으킨 사건이어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1971년 실제로 벌어진 대한항공 납치사건이 지난 50여년 간 역사의 무덤 속에 파묻혔던 이유이다. 그래서 젊은층 관객들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근거로 한다는 점에 의아해한다. 진짜인지를 의심한다.
하지만 또,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결국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셈인 관객들은 영화 중간 쯤이 되면 오히려 작품이 그리는 시선, 정치적 시각이 매우 좋다고 느끼게 된다. “다 같이 살자. 앞으론 너같이 억울한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아마 이 대사만큼은 작가 김경찬이 생각하고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모든 역사는 영화를 통해 윤색이 되기 마련이며 다만 그 ‘윤색의 윤리학’을 올바로 지켰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반공영화 아닌, “다 같이 살자”는 의미의 영화
‘하이재킹’은 반공주의의 영화도 아니고, 남북 체제를 비교하고 우위를 따지는 프로파간다(선전물)도 아니며 오래 전의, 다 잊혀진 ‘한물간’ 역사 얘기도 아니다. 일정한 윤색은 필수였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 지금의 한국사회를 겨냥해 만든 역사 드라마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이재킹’은 정치적 올바름(PC : Political Correctness)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젊은 세대가 그토록 싫어한다는 PC를 강요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강요하지 않는 정치주의, 정치적 감성이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영화는 1971년의 시대에 대해 그 앞뒤의 맥락을 전혀 깔아 놓지 않는다. 1968년 1월 21일에는 북한 무장 테러리스트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를 급습,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했고 1972년에는 유신헌법으로 박정희의 총통 독재체제가 구축됐으며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에는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해 8명을 사형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일련의 사건들을 영화 ‘하이재킹’은 비교적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데 그건 작가 김경찬이나 감독 김성한의 ‘의도한 기획’처럼 느껴진다. 막대한 돈을 들여 만든 하이재킹 드라마, 곧 납치액션극인만큼 박진감과 서스펜스만으로, 그러니까 그 흥분감과 흥미만으로도 충분히 젊은 관객을 끌어 보겠다는 심산같은 것이다.
그건 마치 영국 출신 할리우드 감독 폴 그린그래스가 2006년에 내놓은 ‘플라이트93’의 의도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9.11 테러 당시 월드트레이드센터나 펜타곤으로 충돌 예정이었던 UA93기가 펜실베니아 생크스빌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는데, 그 직전 비행기 안에서 테러범과 승객들간의 일대 혼전이 벌어졌음을 그려 나간 이야기이다. ‘플라이트93’도 앞뒤 설명이 부족하지만 그건 9.11 테러라는, 현존하는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만약 영화 ‘하이재킹’이 ‘플라이트93’을 롤모델로 했다면 그건 엄청난 착각을 저지른 셈이 된다. 그보다는 관객들에게 영화의 맥락을 알려주는 친절함을 더 챙겼어야 옳았다.
영화 속 아직도 어른거리는 사상의 자유 사냥꾼들
영화를 액션 영화로 보여주겠다는 건 과욕 때문이라기보다는, 상업영화 시스템을 너무 잘 알아서 벌어진, ‘역설의 무지 때문’이라 느껴진다. ‘요즘 아이들’에겐 설명이 필요한 법이고 그 설명은 길지 않게, 짧게, 스타카토 기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전체 이야기의 구성이 좀더 완성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영화가 설명을 구구절절 하지 않았다 해서 영화가 아주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소위 그 박진감이란 것에는 늘 한계가 있는 법이다. 국내선이라는 작은 기종의 기내 공간을 설정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액션의 합은 그 수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비하면 영화의 서스펜스(긴장감)는 잘 짜여진 편이다. 이런 비극의 역사 드라마는 감동과 공감이 더 중요하다. 그걸 위해서는 말과 설명이 때론 좀더 정교하게 필요한 법이다.
하정우의 대사, 영화 속 태인의 머리 속에는 “다 같이 살자, 더 이상 억울한 사람이 없게” 중에서 ‘더 이상 억울한 사람이 없게’에 방점이 찍혔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는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다. 영화 ‘하이재킹’은 사상적으로 용공(容共)이 허용되지 않았던 ‘피의 빨갱이 사냥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 낸 사건을 그린다. 지금 역시 사상의 자유란 측면에서는 사냥꾼들의 만행이 계속되고 있는 시대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 ‘하이재킹’이 얘기하려는 대목이다. 영화를 잘 알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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