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칼럼] 난니 모레티의 새 영화 ‘찬란한 내일로’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는 매력이 철철 넘친다. 무엇보다 감독치고 잘 생겼으며, 그것도 지적으로 잘 생겼는데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물로 뽑힌다. 모레티는 공산주의자이고, 그것도 가장 순수한 시절의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아마도 안토니오 그람시주의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주의적 신념을 가진 인물임에도 그의 영화가 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유머가 ‘철철’ 넘치고, 눈물까지 ‘철철’ 흘리게 할 만큼 따뜻하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면 그건 모레티의 영화를 생각하면 된다.
그가 내놓은 새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바로 그런 내용의 작품이다. 보면서 중간중간 한참 깔깔대게 하는데 결국은 울게 만든다.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게 바로 영화가 말하고, 영화가 행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감독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찍는 감독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감독 조반니(감독 모레티 자신)이다. 그는 지금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5년 만에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화 제목이 바로 <찬란한 내일로>이다. 영화 속 영화의 배경은 1956년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소련식 공산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소련이 탱크를 몰고 침략, 진압하던 때였다. 헝가리 서커스단 ‘부다바리’는 이를 피해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콰르디촐로’라는 마을로 공연을 온다. 초청 공연을 기획한 인물은 공산당 기관지 루니타의 편집장 엔니오 마스트로얀니(실비오 올란도)이고 그는 그람시 지부의 지부장이기도 하다. 엔니오 옆에는 늘 베라(바보라 보불로바)라는 이름의 충실한 공산주의 여성이 따라다닌다.
영화는 영화와 ‘영화 속 영화’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이런 식이다. 콰르디촐로 마을 얘기가 나올 때 그 인물들을 연기할 배우 중 한 명, 특히 역사의식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젊은 남자 배우 한 명은 조반니 감독에게 이탈리아에 무슨 공산당원이 200만 명이나 있느냐는 식으로, “대본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항의를 한다. 조반니 감독은 그에게 그때는 그랬었다며, 이탈리아에 공산당원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며 그 배우에게 짜증을 낸다. 조반니의 영화는 이렇게 시작부터 난항이다. 배우들에게 역사 교육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조반니 감독은 이해 불가일 만큼 정신세계가 복잡한 인물이다. 40년 된 아내이자 파트너로서 그의 영화만 프로듀서를 한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는 이제 그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려 한다. 그가 주는 정신적 부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파올라는 조반니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한국 영화인들과 소주 한잔 건배하는 착한 지식인의 영화
조반니의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중간에 투자자인 피에르(마티유 아말릭)가 돈 사고를 쳐서 촬영이 중단된다. 피에르는 경찰에 잡혀가면서 조반니 감독에게 영화를 살리려면 넷플릭스를 꼭 만나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파올라와 함께 조반니를 만나는 이탈리아 넷플릭스 관계자들은 말할 때마다 자신들 채널이 전 세계 190개국에 방영된다는 점만 세 번씩 반복한다. 게다가 당신 영화는 발화점이 너무 늦다며, 모든 영화는 2분 안에 그걸 보여줘야 한다고 말해 조반니를 질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다행스럽게도 중단 위기의 영화는 한국 영화제작자들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다. 그들은 조반니의 영화가 ‘예술과 공산주의의 죽음’ ‘사랑과 윤리의 죽음’을 얘기하는 작품이어서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한국 영화인들은 파올라가 처음으로 남편 아닌 다른 감독과 제작하는 폭력적인 갱스터 영화에도 투자한다. 감독은 이전에 <괴물>이란 영화를 만들어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아마도 이건 모레티가 봉준호와 박찬욱을 합쳐서 설정한 인물로 보이며 한국 영화의 상당수가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 대목으로 보인다) 조반니 감독은 이 폭력 영화의 감독과 8시간 동안 한 장면의 유해성, 무의미성을 놓고 설전을 벌인다. 어쨌든 조반니 감독은 한국 영화제작자들과 자신의 영화 마지막 장면 촬영을 앞두고 소주로 건배를 하기도 한다. 조반니는 한국말로 “건배”를 외치며 한국식으로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영화 속 영화를 두고 영화 속 영화의 한국 제작자들이 ‘예술과 공산주의의 죽음’을 그린 작품이라고 품평하듯이 모레티의 이번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현대예술, 현대영화가 어떤 의미를 잃었으며, 현대사회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상실했는지를 묻는다. 지적인 모레티는 늘 그랬듯이 이번 영화에서도 친절하고 따뜻하게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다. 그 점이 좋다. 결론을 열어 놓는 척하면서도 사실 아무런 답을 내지 못하는 다른 영화 작가들과는 달리 비록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허상일 뿐이라도 답을 내려고 노력한다. 모레티의 이번 영화는 한 마디로 노력이 만들어 내는 희망의 영화이다. <찬란한 내일로>는 곧 ‘더 나은 미래로’를 갈망하는, 착한 지식인의 영화이다.
혁명이나 변혁은 영화 한 편 만드는 것 같은 '소동의 미학'
모레티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이번 작품 역시 유머가 넘쳐서 좋다. 이탈리아어 특유의 리듬감과 어우러지면서 장면 하나하나에 코믹함이 느껴지고 그래서 영화 전체적으로는 소동극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 속 영화에 서커스단이 나오는 만큼 서커스단에는 코끼리와 호랑이 불곰 등이 나와야 하는데 조반니 감독은 코끼리가 두 마리가 아니고 네 마리여야 한다고 고집, 스태프들을 애먹인다. 호랑이는 헝가리에서, 불곰은 파리에서, 코끼리는 베를린에서 데려와야 하는 식이어서 제작진은 정말 골머리를 싸안는다.
조반니 감독은 영화 속 영화의 베라 역을 맡은 여배우가 감독의 디렉션을 넘어서서 자기만의 연기와 대사를 해댈 때마다 “돌아 버리겠다”고 한탄한다. 디테일이 너무 강해 미술팀 소품팀을 달달 볶는다. 그람시 지부에 스탈린 초상화가 걸려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가 하면, 당시 지부 사무실 벽에 걸린 기관지의 머리기사(한 컷 스치듯 나오는)의 제목이 길다, 짧다를 반복한다.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다. 영화 음악을 맡고 있는 딸이 자신보다 그녀의 애인(폴란드 대사로 늙은 남자다)에게 사운드트랙을 먼저 들려주는 것도 못내 섭섭하다.
영화 속 영화 <찬란한 내일로>의 조반니 감독은 모든 소동을 겪으며 어쨌든 영화를 완성해 낸다. 그 과정을 그린 영화로 역시 세상일이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들 듯, 그렇게 소동의 미학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혁명이란, 그리고 세상의 변화란, 선언적이고 이념적인 게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겪는 일상의 디테일 같은 것들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헝가리 사회주의가 침략당하는 와중에도 베라 당원과 엔니오 지부장 사이에서는 로맨스가 싹트는 식이다.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사회를 변혁시켜야 하는) 영화감독(정치가 혹은 혁명가) 조반니도 아내 파올라의 이별 통보와 딸아이의 느닷없는 연애와 결혼,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수많은 이견과 충돌, 심지어 코끼리 수를 맞추는 것 하나하나까지 그 갈등을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며 세상이 바뀌어져야 영화가 좋아진다. 모레티의 영화는 하나의 변증법적 사회과학 교과서이다.
순결한 이성의 공산주의자가 영화를 만났을 때
영화 속 조반니 감독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부르는 칸초네 가사가 가슴에 남는다.
“난 항상 출발점에만 머무르는 느낌이야 / 당신의 방 밖 세상에서 문을 닫고 도망쳤지 / 당신이 내 삶의 이유란 건 잊지 않고 있어 / 이것이 정녕 사랑일까 / 대화할 때마다 놓치는 평정심을 갈구하고 /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삶에서 행복한 척해 / 그리고는 그리움을 그저 흘려보내면서 / 당신의 손을 붙잡고 또 한 번 말하지만 / 그건 그저 말일 뿐 / 그건 그저 말일 뿐 / 그건 그저 말일 뿐 우리가 한 말일 뿐 / 어서 내일이 다가와 모든 걱정이 사라지길 / 시간이 흐르게 두면 모든 게 분명해지길 /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결국 / 영원히 순간일 뿐이니까 / 나와 당신에게 / 그건 그저 말일 뿐 /그건 그저 말일 뿐 우리가 한 말일 뿐 / 그건 그저 말일 뿐 말일 뿐, 말일 뿐, 말일 뿐”
순결한 이성의 공산주의자가 영화를 만났을 때란 어떠한 때인가. 찬란한 내일을 위하여,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그리하여 더 위대해질 미래를 위하여.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