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대가 모슬희한테 준 위임장이 이상해
사건 전개를 보면 언뜻 후견계약서 같은데
피후견인 쓰러진 뒤 즉시 써먹을 수는 없어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최근 시청률 20%를 넘기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를 통한 시청까지 반영할 수 있다면 실제 시청률은 훨씬 높을 것이다. 필자도 처음에는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마주치는 재방송을 간간이 보다가 몇 주 전부터는 시간에 맞춰 TV를 켜고 본방 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 주인공 백현우의 직업이 변호사이다 보니 직업병이 도진 나는 ‘저 장면은 말이 안 된다’ ‘작가가 너무 미드를 많이 본 것 같다’면서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남편을 향해 TMI를 마구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 제8회는 이 드라마 전체에서 클라이막스 직전 ‘위기’가 고조되는 아주 중요한 회차였다. 모슬희가 홍만대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고 퀸즈 일가가 그녀의 계략으로 인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모슬희가 가지고 있는 ‘위임장’은 그 모든 위기를 창출해 낸 가장 중요한 무기로 등장한다.
<눈물의 여왕> 홍만대가 모슬희에게 써준 위임장의 정체
홍만대는 자신의 팔순 잔칫날 모슬희와 함께 법무법인을 찾아가 그녀에게 위임장을 작성해준다. 이후 홍만대가 중독되어 의식을 잃게 되자 모슬희는 홍만대가 작성해 준 위임장으로 홍만대의 ‘법적 보호자이자 의결권 위임자’로서 홍만대의 모든 권리를 대행하게 된다. 모슬희는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여 퀸즈 일가를 모조리 회사 임원에서 해임하는데 그에 그치지 않고 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실에 누워있는 홍만대를 가족들이 면회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일가 전체를 맨몸으로 퀸즈타운에서 내쫓았다.
늘 내 TMI에 수동적이던 남편이 이 대목에서 먼저 물었다. “의결권 위임장이라더니 그걸로 저게 다 가능해?” 내 대답은. “제목만 위임장이지 그 내용은 후견계약인 것 같은데?”
‘법적 보호자이자 의결권 위임자’라는 표현은 드라마 속에서 모슬희의 변호사가 사용한 표현이다. 홍만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퀸즈 일가를 모슬희가 막아서면서 홍만대를 면회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때 모슬희와 함께 나타난 변호사의 대사에서 그런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 ‘법적 보호자’라는 표현은 변호사의 입에서 나온 것임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대단히 부정확한 표현이다. 현실에서 변호사들이 사용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법적 보호자’와 가장 유사한 표현으로는 ‘법정대리인’이라는 용어가 있으나, 이 드라마 속 사안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법정대리인이란 본인(여기서는 홍만대)의 대리권 수여에 의하지 않고 대리권을 부여받은 자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법률에 의해 당연히 대리권을 부여받는 미성년자의 친권자, 법원의 선임 심판에 의해 대리권을 부여받는 후견인 등이 이에 속한다. 드라마 속에서 모슬희는 법원에 의해 선임되지 않았고, 홍만대와 일정한 신분관계에 있지도 않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홍만대와 작성한 위임장이라는 이름의 문서를 통하여 대리권을 부여받은 것이어서 ‘법정대리인’에는 해당하지 않음이 명백하다.
모슬희가 홍만대의 모든 권리(재산적 권리뿐 아니라 신상보호에 관한 권리까지)를 대리한다는 설정, 모슬희 측에서 내민 서류를 보고 백현우가 ‘공증 서류가 조작됐을 경우 사문서 위조 및 위조 사문서 행사는 물론 공정증서 원본 부실 기재죄까지 피할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 것, 홍만대 회장이 사망하고 나면 모슬희가 모든 권한을 잃게 된다는 설정으로 보아 아마도 홍만대와 모슬희가 작성한 서류는 그 본질이 ‘후견계약서’이며, 그에 따라 모슬희는 홍만대의 ‘임의후견인’이 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정황은 위임장 아닌 후견계약서, 현실적 권한 행사는 불가능
민법 제959조의14(후견계약의 의의와 체결방법 등)에서는 후견계약에 대한 정의 및 형식, 그리고 개시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후견계약은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 있거나 부족하게 될 상황에 대비하여 자신의 재산관리 및 신상보호에 관한 사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다른 자에게 위탁하고, 그 위탁사무에 관하여 대리권을 수여하는 계약이다. 후견 계약은 반드시 공정증서로 체결하여야만 하고, 그 효력은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한 때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만약 홍만대가 작성해준 위임장이 단순히 의결권을 위임하는 서류에 불과했다면 모슬희는 홍만대의 다른 재산(예를 들어 퀸즈타운)에 대한 관리 권한은 행사할 수 없고, 홍만대의 치료, 입원, 면회 등에 관하여도 결정할 권한이 없을 뿐더러 백현우가 ‘공증 서류 조작’, ‘공정증서 원본 부실기재죄’ 등을 언급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 홍만대가 모슬희에게 작성해 준 위임장이 사실은 후견계약서임이 스토리의 맥락상 분명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위 위임장을 후견계약서로 본다면 사소한 설정 오류가 발생한다. 드라마 상에서 홍만대 회장은 자신의 팔순 잔칫날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모슬희와 공정증서로 후견계약을 체결하는데, 바로 그 당일 생일잔치가 끝난 후 장기를 두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병원 복도에서 모슬희가 퀸즈 일가에게 위임장(후견계약서)을 내밀면서 자신을 홍만대의 법적 보호자(임의후견인)라고 주장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민법 제959조의14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후견계약의 효력은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한 때부터 발생하므로 모슬희가 공정증서로 후견계약을 체결한 바로 그 당일에는 후견계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시간적·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모슬희는 우선 가정법원에 임의후견감독인의 선임을 청구하고, 가정법원의 감독인 선임 심판을 기다려야만 하는데 통상적으로 이러한 절차는 나의 경험상 약 6개월 전후의 시간이 소모된다. 후견감독인이 선임되기 전까지 모슬희는 후견인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홍만대의 입원 및 치료를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퀸즈 일가를 퀸즈타운에서 내쫓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모슬희가 타인의 신분을 도용하여 계약을 체결한 것도 후견계약의 무효 사유가 되지만 이 부분은 후견 계약 무효심판을 거치는 긴 절차가 요구되므로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감동 주는 한류 드라마 위한 강한 디테일
혹자는 일개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디테일에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조하며 이건 직업병의 일종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변명하고 싶다. 최근에는 넷플릭스에서 <젠틀맨 : 더 시리즈>라는 영국드라마를 보다 말고 구글에서 영국 상속법 규정을 싹 다 뒤진 후 이런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영국드라마에서도 법률적인 디테일을 모두 정확하게 챙기지는 않는다.’
<눈물의 여왕>에서 약간의 법률적인 부분에 관한 혼동과 설정 오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대본이 정확한 디테일을 구비할 때 그것을 알아보는 누군가에게는 감동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재작년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드라마는 작가가 변호사 출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디테일에 강했기 때문에 매회 감탄하면서 시청했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지금은 한류 열풍을 타고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이 시점이 아닌가. 타국의 시청자들이 일차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통해 우리 문화를 학습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어느 정도 디테일에 집착하면서 대본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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