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휴전 '당위성'만 강조, 직설적 '요구'는 배제
알제리 "이스라엘에 팔 주민 학살 면허증 부여"
러시아 "미국 안, 이스라엘의 묶인 손 자유롭게"
이스라엘, 한통속인 미국에 고맙다며 '엄지척'
가이아나 "라파에 150만 명 피란은 누구 책임?"
"15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라파에 피란해 있는 건 누구 책임인가? 누가 그곳에 대한 지상 군사공격 계획을 발표했는가? 누가 인도주의적 구호품 공급을 막는 지금의 장벽을 설치,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답을 안다." 남미 가이아나의 카롤린 로드리게스-비르케트 주유엔 대사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인질 석방과 연계된 가자 휴전안'에 기권표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보리는 이날 공식 브리핑을 통해 미국이 제시한 결의안 초안은 표결에 부쳤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에 실패했다고 밝히고 "미국 안의 내용은 모호하며, 몇몇 핵심 분야에서 이스라엘 당국의 책임을 빼놓았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 밖에 아랍권을 대표한 알제리가 반대하고 가이아나는 기권했으며, 나머지 11개국은 찬성표를 던졌다.
미국 안, 가자 휴전에 관한 '직설적 요구' 배제
하마스 비난은 담고, 이스라엘 책임은 빠져
미국 초안엔 △ 가자에서의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휴전 지지 △ 민간인에 대한 신속하고 방해받지 않는 인도적 구호 허용 및 원활화 촉구 △ 라파에 대한 지상 공격 시 민간인 추가 희생과 난민 발생 우려 표명 △ 가자에서의 인구 구성 및 영토 변경 시도 거부 △ 남은 인질의 석방과 연계된 휴전을 보장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 지지 등이 담겨 있다.
표결에 앞서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는 "안보리가 휴전 촉구를 훨씬 넘어선, 휴전을 가능하게 할 이 안을 채택하지 못한다면 역사적 실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하마스와 다른 그룹이 억류한 모든 인질이 석방되고 가자에 훨씬 더 많은 인도주의 구호를 허용하는 합의의 일환으로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휴전을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안에서 가이아나 대사가 문제 삼은 부분은 두 곳이다. 하나는 사전에 미국 등 서구 언론이 보도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 확인된 미국 안에는 안보리가 가자에서 즉각적 휴전을 '요구'(demand)한다는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그 대신, 안보리가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휴전이 '당위임을 단언한다'(determines the imperative of an immediate and sustained ceasefire")란 모호한 표현을 넣었다. 직설적으로 휴전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을 배려한 미국의 '꼼수'로 풀이된다. 다른 하나는 미국 안이 10·7 공격을 자행한 하마스에 대한 비난을 담고 인질에 대한 즉각적인 인도주의 접근을 '요구'(demand)한 데 반해, 현재 가자에서 자행되는 집단학살과 관련해 이스라엘 당국에 책임을 묻는 내용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러시아 "미국 안, 가자 휴전 논의 문 닫게 해"
휴전에 관한 '도덕적 당위' 주장한 미국 비판
로드리게스-비르케트 가이아나 대사는 "만일 이 결의안을 배경지식 없이 읽는다면, 분쟁의 어느 당사자가 가자에서 잔혹 행위를 자행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며 "초안에는 '점령 세력'(the occupying Power)이란 단어가 한번 언급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주민은 집단적 처벌을 받아선 안 되며, 타인의 범죄로 인해 인질이 돼선 안 된다"며 "이런 인재(人災)는 즉각적 휴전 없이는 멈출 수 없다. 즉각적 휴전을 명백히 요구하는 게 안보리의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대사는 미국을 네 차례나 "냉혈한"이라고 불렀다. 그는 '당위임을 단언한다'는 대목을 두고 안보리와 전 세계를 상대로 "도덕적 당위에 관한 철학적 문구들이 담긴 제품을 팔아먹으려 한다"며 평화적인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네벤자는 "미국의 제품은 지나치게 정치화됐다"며 "그 안에는 이스라엘이 라파에서 군사 작전을 실행해도 된다는 효과적인 청신호가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만약 채택된다면, 그 결의안은 가자에서의 휴전 필요성에 관한 논의의 문을 닫게 하고 이스라엘의 묶인 손을 자유롭게 해 결국 가자 전체가 이스라엘 수중에 들어가게 만들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중국 "미국 안, 모호하고 즉각 휴전 요구 없어"
알제리 "이스라엘에 팔 주민 학살 면허증 부여"
중국의 장 쥔 주유엔 대사는 미국 초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데 대해 "모호한 채 즉각적 휴전을 요구하지도 않고 어떻게 휴전을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다. 이것은 즉각적 휴전을 요구하는 절대다수 이사국의 컨센서스로부터 분명한 탈선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달 20일 알제리가 주도한 즉각적 인도주의 휴전 요구 결의안은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당시 표결에서 중국, 러시아 등 13개 이사국이 찬성했고 영국은 기권했다. 알제리 결의안 초안은 △ 즉각적 인도주의적 휴전 △ 방해받지 않는 인도주의 접근 △ 팔레스타인 주민 강제 이주 반대 △ 국제사법재판소(ICJ) 임시 명령 준수 △ 국제법상 의무 준수 등을 핵심 내용으로 담았다. 구속력이 없는 유엔 총회 결의안과는 달리 안보리 결의안은 구속력이 있다.
이날 아랍권을 대표한 알제리의 아마르 벤자마 주유엔 대사는 미국 안에 대해 "핵심 우려 사항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민간인 피해 축소를 위한 '조치들'과 '미래 작전들'을 강조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민간인들 학살을 지속할 허가증을 부여한다"고 비판했다. 벤자마 대사는 라파에서의 재앙적인 군사 작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이것은 더 많은 유혈 참극에 대한 면허증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 한통속인 미국에 고맙다며 '엄지척'
네타냐후, 미국 만류에도 라파 공격 의사 고수
미국 안에 대해 이스라엘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이스라엘의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대사는 "하마스 몬스터를 비난하는" 미국의 단호함과 인질 석방은 "연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란 미국의 확신은 진정한 도덕적 명확성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스라엘보다 라파에서 군사작전을 피하려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화재의 대부분을 껐다고 완전히 끈 건 아니다"라며 강행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일부 선출직 비상임 이사국은 미국 안과 별개로 즉각적 휴전을 요구하는 대안 결의안을 추진 중이며, 안보리는 23일 오전 회의를 열어 채택 여부를 다시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그러나 미국이 해당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다고 AFP를 인용해 연합뉴스가 전했다.
지난해 10·7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이스라엘군의 무자비한 보복 공격으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3만2000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사망자 대다수는 여성과 미성년자이다. 유엔에 따르면, 또한 이스라엘의 봉쇄 조치로 생필품이 전달되지 않아 111만 명이 굶주림 등 극심한 인도주의 재앙을 겪고 있다. 현재 가자 최남단 국경도시 라파에는 가자 전체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40만 명의 피란민과 주민이 몰려 있으며, 베냐민 네타냐후 극우 정권은 미국의 만류에도 이곳에 대한 지상군 공격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