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방해와 거짓말은 대통령도 쫒겨난다는 교훈

<워싱턴포스트> 없는 한국 언론 환경은 큰 차이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실장
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실장

‘이종섭 호주대사 사건’이 점차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아넣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17일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가 민주당 후보의 약점을 캐내려고 워싱턴DC의 워터게이트에 있는 민주당 후보 사무실 도청을 시도한 데서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사무실에 무언가를 훔치러 들어간 범인들이 경비원에 붙잡힌 단순 절도 사건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범인들의 인적 사항을 보고 수상하게 여긴 <워싱턴포스트>의 새내기 기자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의 취재를 통해 이 사건은 닉슨 진영이 조직적으로 계획해 실행한 정치 사건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탄핵 직전까지 몰리게 한 닉슨의 은폐 시도와 거짓말

이 사건에 처음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닉슨은, 이 사건을 덮기 위해 중앙정보국에 수사를 방해하고 은폐하라고 지시하면서 스스로 목을 조르는 대형 정치 추문에 휘말렸습니다. ‘배관공’으로 불린 범인들의 재판과 상원 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수사 방해와 은폐 사실이 드러나면서 닉슨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탄핵당할 치욕적인 상황에 몰렸고, 궁여지책으로 1974년 8월 9일 사임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가장 큰 교훈은 대통령이라도 수사를 방해하고 거짓말을 하면 쫓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P=연합뉴스) 미국 정부 산하 '닉슨 도서관'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닉슨 전 대통령의 증언 내용을 10일 도서관과 온라인상에서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1973년 3월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하고 있는 장면.
(AP=연합뉴스) 미국 정부 산하 '닉슨 도서관'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닉슨 전 대통령의 증언 내용을 10일 도서관과 온라인상에서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1973년 3월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하고 있는 장면.

이종섭 사건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닮은꼴로 전개되고 있다고 보는 이유는 먼저 해병대 채 상병 죽음 사건은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럼에도 채 상병이 속해 있던 해병대 1사단장이 업무상 과실치사죄의 피의자로 수사 대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개입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점 등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실의 전화를 받고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의 이름을 피의자 명단에서 빼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호주대사로 갑자기 임명한 일입니다. 그러자 대통령 또는 대통령실의 개입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사실을 알고 있고 폭로할 가능성이 있는 이 전 장관을 대사로 임명해 해외로 도피시키려 한다는 의혹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피의자 신분이라 검증에서 통과될 리가 없는데도 윤 대통령이 그를 대사로 임명한 점, 공수처의 출국금지 조치가 취해진 상태인데도 법무부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출금 조치를 풀어준 점, 정식 신임장도 없이 사본만 들고 서둘러 나간 점, 호주대사는 장관급이 임명된 적이 없다는 점 등 숱한 의문점이 뒤따랐습니다.

워터게이트 닮은 수사 방해, 거짓에 거짓 더하기

그의 대사 임명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보도가 나오자, 대통령실이 조직적으로 여론 조작 공작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3월 14일 익명으로 ‘공수처와 야당, 친야 언론이 결탁한 공작’이라고 했고, 바로 그날 오후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공수처가 수사를 안 하고 오랫동안 출금 조치를 한 것을 공개 비판했습니다. 15일엔 황상무 시민사회 수석비서관이 출입 기자들과의 점심 자리에서, ‘엠비시 어딨어’하면서 회칼 테러 발언을 했습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들의 일련의 언동을 보면,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언론 압박을 꾀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종섭 호주대사 귀국 관련한 주요 신문 사설 (2024년 3월 22일자)
이종섭 호주대사 귀국 관련한 주요 신문 사설 (2024년 3월 22일자)

공수처, 이종섭 수사 외풍에 떠밀리면 안 된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종섭 ‘도주 대사’ 사건을 보는 일반 시민의 날카로운 눈은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대사가 10일 남의 눈을 피해 도둑처럼 호주로 피했으나, 여론의 압박에 못 이기고 11일 만에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그 귀국 이유가 너무 황당합니다. 22일치 주요 중앙 일간지의 사설을 보면 친윤 신문인 <조선일보>을 제외하고는 모두 방위산업 관련 공관장회의를 급조해 들어온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화상회의나 4월 말로 예정된 전체 공관장회의 때 해도 충분한 회의를, 이종섭 한 사람을 위해 급조한 것에 대한 매서운 질타입니다. 정부의 감세정책과 긴축재정으로 한 푼이라도 예산을 아껴야 할 상황인데, 비즈니스 좌석표를 끊고 특급호텔 객실을 제공해야 하는 공관장을 가외로 다섯 명이나 허투루 불러들이는 코미디 같은 짓을 눈뜨고 지켜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결국 <조선일보>도 다른 신문들보다 하루 늦은 23일, '출발부터 엉크러진 이종섭 호주 대사 제 역할 할 수 있겠나'라는 사설을 내보냈습니다.

급조된 공관장회의 일제히 비판한 언론, 그 이상은 없나

이처럼 거의 모든 신문이 이종섭 대사의 명분 없는 귀국을 비판한 것은 국내 여론이 하나로 통일된 매우 드문 사례입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이 대사의 귀국을 두둔하기에 바쁩니다. 대통령실과 이 대사는 오히려 이 대사가 국내에 머무는 동안에 소환 조사를 하라고 요구까지 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에 대한 압박이자, 수사 방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참패한 뒤 ‘국민이 늘 옳다’고 반성의 말을 했는데,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이 대사의 편법 귀국에도 채 상병 수사에 대한 윤 대통령과 이 대사의 외압 의혹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거짓에 거짓을 더하고, 수사를 방해하는 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이 대사 사건을 워터게이트 급으로 키우는 일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진실을 파헤친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같은 기자가 있었지만, 한국 미디어에는 그런 기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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