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과 진보언론에 만연한 '양비론'의 한 발원인 듯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명재 에디터
이명재 에디터

경향신문의 19일자 지면에 이대근 칼럼 <조국은 왜?>가 실린 것이 적잖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듯하다. 이 글은 “눈앞의 이익을 좇은 거대 양당이 비례위성정당이라는 정치괴물을 합작함으로써 조국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면서 조국이 한동훈에 비해 부족할 게 없으니 "한동훈이 뜬다면, 조국은 왜 안 되는가"라고 묻는다.

얼핏 조국을 위한 변론처럼 보이지만 글의 요지는 이른바 ‘조국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염치 없게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며 꾸짖는 것이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문제가 조국을 '불공정의 감옥'에서 해방했다고 냉소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그는 조국의 귀환을 ‘한국 정치 부재증명’으로 ‘현실정치의 한 증상’이라는 개탄을 하기에 이른다. 

그의 글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은 그가 한때 경향신문의 보도를 이끌던 이였음은 물론 경향을 넘어 진보의 한 논객으로 불리면서 이른바 '진보언론'의 논지의 한 흐름을 선도했던 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난 1월부터 외부필진 자격으로 경향신문에 돌아와 칼럼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경향의 외부 칼럼니스트이지만 그의 글이 보이는 한국사회와 정치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경향과 진보언론이 조성하는 여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에 대해 주목하고 얘기하려는 것은 사실 그의 글 자체라기보다는 그의 글이 대표하는 것, 드러내는 것, 그의 글이 보여주는 진보언론 현실의 한 단면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이다.

 

19일자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의 제목. 
19일자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의 제목. 

양비론의 진짜 문제, 온전하게 이뤄내기 힘들다는 것

그의 글들은 무엇보다도 '양비론'으로 집약된다. '상호 적대하고 혐오하는 정치적 양극화'를 지적하는 그의 글은 대개 양 진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쪽이 문제이지만 상대쪽도 문제이라는 것이며, 한쪽의 결과는 다른 쪽에 원인이 있다는 식이다. 경향과 한겨레의 지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비론이 그로부터, 최소한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 있는 이들 신문의 양비론의 한 기원에 그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게 하는 글들이다. 

그의 이같은 논지는 이 신문에 정기기고하고 있는 또 다른 '진보 논객' 강준만 교수의 최근의 일련의 글들과도 겹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문패를 달아 실리고 있는 강 교수의 칼럼들은 '양비론에 대한 옹호'를 내세우고 있다. 경향신문 1월 25일자 칼럼은 '양비론 혐오가 정치 개혁을 죽인다'는 제목으로 “우리 사회에서 무조건적인 양비론 비판이 절대적 우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같은 양자택일 강요가 적대적 공생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양비론은 그 내용과 맥락을 따져야지 양비론 자체에 대한 비판은 무의미하다. 개별적 비판을 해야지 모든 양비론은 문제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강 교수의 양비론을 위한 변론, 지극히 옳다. 사실 양비론은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향할 바이기 때문이다. 양비론이 비판받아야 할 것은 양비론 그 자체가 문제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양비론은 권장할 사항이며,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잘못이어서가 아니라 거꾸로 양비론을 제대로 전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안들의 옳고 그름은 어느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쪽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쪽은 전적으로 틀리다거나 한쪽은 전적으로 타당하며 다른쪽은 완전히 오류일 수는 없다. 양쪽의 그릇된 점을 제대로 짚어내는 양비론은 물리쳐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비는 안이하고 용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이루기 힘든 것이다. 어떤 사안이든 간에 그와 관련된 사실들을 포괄하면서 일부에 갇혀 산술적 양비에 그치지 않아야 전체상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비론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은 양비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제대로 된 양비를 이뤄냈느냐에 있는 것이다. 

피상적이고 표피적이며 기계적인 양비론의 문제는 대개 한쪽을 비판하면서 다른쪽을 비판해야 온전해진다는 식의 양비론에 머물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기계적 균형을 선택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하고 엄밀한 '기계적' 균형을 이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비론은 거의 이 같은 양비론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건 의도의 문제가 아닌 능력의 문제인 것이다. 그럴 때 양비론은 쉬운 길을 택하고 만다. 한쪽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다른쪽에 대해서는 대략의 인상비평에 머무른다. 한쪽의 티끌과 반대쪽의 들보같은 흠을 똑같다고 해버린다. 한쪽의 잘못에 대해서는 송곳을, 다른 쪽에 대해서는 쇠망치를 휘두른다.  

같은 사실이라도 상황과 국면에 따른 사실의 무게의 가감과 가중을 해야 하며, 그를 위해 빈틈 없는 무결 무오류의 초정밀 저울이 필요하지만 정밀하고 투철한 계측 없이 '같은 것을 다르게' 하고 '다른 것을 같게' 해버린다. 

'기계적 중립'을 깨겠다고 나선 한겨레와 경향이 보이고 있는 양비론은 과연 이런 함정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그러나 이들 신문의 양비론은 예컨대 여당의 폭주와 무능을 비판하다가 “야당은 어떤가”라고 느닷없이 물줄기를 돌리는 식이다. 여야의 대립을 정치권의 ‘무한대결’로, '정쟁'으로 이름 붙이고 그런 정쟁이 정치 혐오와 냉소를 키운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보도야말로 실은 냉소와 혐오를 키우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가 위의 25일 경향 칼럼에서 개탄하는 것처럼 ‘정치개혁을 죽이는’ 것이고 이대근 교수가 위의 칼럼에서 얘기한 걸 빌리자면 우리의 정치를 '표류'하게 한다. 

이 양비론은 작은 차이를 보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능이기도 하며 나태이기도 하다. 그럴 때 쉽게 빠지는 것은 근본주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게 그것이고 결국 다를 게 없다는 것, '근본적으로' 둘 다 똑같다는 논리다.    

이대근 교수는 <조국은 왜?> 칼럼에서 "윤석열·한동훈도 조국처럼 불공정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조국도 윤석열 한동훈만큼 불공정했다, 가 아니라 그 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조국 교수에게 씌워진 혐의와 윤석열 한동훈 두 사람의 파행과 폭주를 비슷한 것인 양 비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는 별반 다를 게 없는 불공정의 사례로 둘을 비교하면서도 양측의 불공정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 교수는 경향신문의 칼럼난에 복귀한 지난 1월의 칼럼에서 이재명 대표와 윤석열을 똑같이 비판하면서 대통령 부인이 고액의 선물을 받은 명품백 사건과 야당 대표의 선거제 공약 번복을 같은 것으로, '나쁜 정치'라며, 역시 똑같다고 나무란다.

그가 지난 2월 27일자 칼럼 <이재명 사퇴를 권함>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정치세력들이 경쟁을 하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상대보다 나아지고자 하는 노력, 좌절하고 벽에 부닥치지만 단 1센티미터의 진보라도 이루려는 새로운 시도와 변화가 있더라도 그 따위는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으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한 달여 전인 2009년 4월 16일에 그가 쓴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칼럼의 단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개혁이든 노무현이 함부로 쓰다 버리는 바람에 그런 것들은 이제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다.” 그는 노무현 당선 자체가 ‘재앙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노무현과 참여정부가 실패한 것만큼이나 뭔가를 해 보려고 했던 모든 노력과 시도들을 '재앙'이었을 뿐이라고 선언하고 만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30일 앞둔 11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관계자들이 투표함 등 물품을 점검하고 있다. 2024.3.11 연합뉴스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30일 앞둔 11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관계자들이 투표함 등 물품을 점검하고 있다. 2024.3.11 연합뉴스

총선은 신구 권력 간의 진흙탕 싸움일 뿐? 

이런 그에게는 이번 총선에서 어느 당이 이기든, "선거로 심판한다"는 얘기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한국 사회의 2년 간의 퇴행과 추락과 파탄을 숨막히는 경험으로 거친 끝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선거에 걸고 있는 염원과 절박감은 그의 눈엔 다만 헛되고 허망한 일일 뿐이다. 그는 조국혁신당의 창당을 조국의 '단순 복수극'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조국혁신당에 대한 지지를, 단지 한 개인의 복수극에 열광하는 대중의 무분별함으로 비하해버린다.

그에겐 지금의 선거전은 다만 '신구 권력'간의 권력 다툼일 뿐이다. “대결정치는 당연히 사회갈등을 해결하는 협치가 아닌, 신구 권력 엘리트들 간의 구원을 둘러싼 권력투쟁이 될 것이다.” 그에게는 낡은 권력과 새로운 권력, 정확히 말하자면 낡은 구태와 새로운 구태간의 진흙탕 싸움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양비론보다도 더욱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양비론의 원인이자 결과인 정치 허무주의를 낳고 있는 그의 현실에 대한 눈이다. 그는 스스로를 대중들 위의 우월적 판관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듯하다. 대중들의 삶이 펼쳐지고 이뤄지며 문제들을 겪어내는 현실에서 자신은 빠져나와 있다. 그 현실의 밖에서, 또 그 위에서 그 안의 사람들을 무관한 제3자처럼 들여다보고, 아래의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그래서 그의 현실비판에는 정작 '현실'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대중들을 훈계하고 계몽하려는 듯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눠주며 어둠에 빛을 비춰주듯 가르치려는 마음은 칭찬할 일이다. 단 가르치려거든 제대로 가르쳐야 하며, 무엇보다 다른 이를 가르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과 함께라야 한다. 그가 근본적인 얘기를 하려는 것, 그런 발본적인 인식으로 사람들을 매섭게 나무라고 이끌려는 것은 비판을 살 일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 그 자신에게도 그 같은 훈계와 계도가 반드시 갖춰야 할 '근본'에 대한 요구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그같은 요구를 스스로 면제해버린다면, 그런 이의 글은 아무리 비장하더라도, 겉으로는 빛나 보일지라도 그건 금빛으로 도금된 쇠붙이 글에 불과해질 뿐이다. <굿바이 노무현> 칼럼에서 그는 "이제 그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고 노무현을 보냈다. 노무현을 향한 그 말처럼 누구에게든 '낙조'의 시간은 그같은 자기엄격성이 없어질 때 맞게 돼 있다. 

이 교수는 위의 칼럼에서 시인 장석주의 시를 빌어 '대추 한 알도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고, '대추 안에 태풍 몇개, 천둥 몇개, 벼락 몇개가 있다'고 했다. 태풍과 천둥과 벼락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영글고 익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언론을 통해 글을 쓰고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 사람들을 이끌며 '계몽'하는 것, 거기에는 성찰적 반성이라는 태풍과 천둥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어떤 직업에서건 그 직업의 윤리가 있듯 대중들에게 주목받는 글을 쓰는 이에게도 그에 따르는 윤리가 있다면 그 태풍 몇 개, 천 둥 몇 개, 벼락 몇 개를 글에 실어 사람들에게 내려치는 이는 그 천둥과 번개를 자기 자신에게도 내려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위 칼럼의 한 대목 "우리의 삶이 표류하듯"이라는 말처럼 어떤 화려한 글이든 간에 그런 글은 독자들을, 그러나 누구보다 그 자신을 '표류'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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