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연계 의혹 부풀리고, 서방은 '장단' 맞춰
3대 공여국 미·독·EU 포함 18개국 지원 중단
"글로벌 노스, 이스라엘 신호를 맹목적 추종"
이스라엘에 집단 학살 방지 'ICJ 명령' 파묻혀
"남겨진 유일한 저항 공간은 가상의 집단기억"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지난 1월 하순 이 기구의 직원 12명이 10·7 하마스 기습 공격에 연계됐다는 의혹을 이스라엘이 제기한 뒤 주요 지원국 25개국 중 상위 1~3위인 미국, 독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18개국이 '즉각' 기부 중단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17일 알자지라에 따르면, 2022년 총예산은 11억 7000만 달러였으며, 미국 3억 4390만 달러, 독일 2억 210만 달러, EU 1억 1420만 달러 순이었다. 이에 대해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의 저자인 이스라엘 역사학자 일란 파페는 "UNRWA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글로벌 노스'(서구 선진국)"라고 비판했다.
"글로벌 노스, 이스라엘 신호를 맹목적 추종"
하마스 연계 의혹은 지난 1월 26일 필립 라자리니 UNRWA 집행위원장의 성명을 통해 최초로 공개됐다. 당시 라자리니 위원장은 그런 의혹에 대한 정보를 이스라엘로부터 받아 자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이스라엘과 서방 언론들은 이 의혹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UNRWA의 순수성에 먹칠하면서 급기야 기구의 폐기와 다른 기구로의 관련 업무 대체로까지 여론을 몰아왔다. 그 과정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UNRWA의 하마스 연계 의혹을 증폭시키려고 폭로전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11일에는 가자 북부의 UNRWA 본부 건물 지하에서 하마스의 지하 터널이 발견됐다며 사진·영상을 공개했고, 이틀 뒤인 13일엔 이스라엘의 메라브 일론 샤하르 주제네바 대사가 취재진에게 이메일 성명을 보내 UNRWA 소속 교사들의 집에 인질들이 억류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제기한 혐의와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 유엔은 이 의혹의 진상 규명을 위해 카트린 콜로나 전 프랑스 외무장관이 이끄는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라자리니 위원장은 14일 성명을 통해 "UNRWA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으며 앞으로 두 달 정도 진행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날 스위스 RSI 인터뷰에서 "향후 조사에서 UNRWA 직원들이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부터 하마스 측과 정치적 유대를 맺는지, 무기 사용이나 터널 제공 등 그간 제기된 각종 의혹들을 모두 검토하면서 UNRWA가 이런 일을 어떻게 예방할지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에 집단 학살 방지 'ICJ 명령' 파묻혀
조사 결과는 지켜보면 되겠지만, 이스라엘이 이 의혹을 미국과 유엔에 넘겨준 시점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제소에 따라 1월 11~12일 제노사이드(집단 학살) 범죄 혐의로 이스라엘이 사상 최초로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 법정에 불려 나온 시기와 겹치고 있다. 라자리니 UNRWA 위원장의 '입'을 빌어 관련 의혹을 제기한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에 제노사이드 방지와 가자 주민의 인도적 상황개선 등 6개 항의 조치를 명령했다. 그러나 ICJ 뉴스는 하마스 연계 의혹 뉴스에 파묻혔다.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서방국들이 장단을 맞춰주면서 상황은 심리전에 탁월한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네타냐후는 궁극적으로 UNRWA 해체를 유도하고 가자 남부의 최종 피란처인 라파에 대한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정당화'하는 데 하마스 연계 의혹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1949년 출범한 UNRWA는 그야말로 팔레스타인 난민에 특화된 유일한 기구다. 가자와 서안,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지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500만 명을 상대로 교육, 의료 등 필수 서비스 제공과 인도적 구호 활동, 구호시설 운영 등의 일을 해왔다. 가자 전쟁 이후 가자 전역에 154개 피란민 보호시설을 운영 중이다. 고용 직원 수는 1만 3000여 명이다. 현재 가자 주민 최대 200만 명이 UNRWA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이 중 UNRWA로부터 머물 곳과 음식, 의료 서비스까지 제공받는 이들은 100만 명에 이른다. 라자리니 위원장은 이스라엘의 UNRWA 해체 요구에 대해 14일 성명에서 "근시안적 요구다. 지난 20년간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에게 정부에 준하는 수준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한 기관은 UNRWA 외엔 없다"며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이며 UNRWA를 없애는 것은 또 다른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사퇴 요구에도 "지금 매우 중요한 순간에 처해 있는 만큼 배를 버릴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75년 맞은 UNRWA, 주민 500만 명에 교육·의료 지원
미국의 진보적 유대 매체인 '주이시 커런츠'는 'UNRWA 해체 작전'이란 13일 자 기사를 통해 "최근 미국 등의 기부 중단은 귀향(歸鄕)이란 팔레스타인 난민의 꿈을 말살하기 위한 꽤 오래된 시도의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주이시 커런츠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 과정에서 자행한 나크바(대재앙) 당시 고향에서 강제로 내쫓긴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그들의 자손들은 그 이후로 "때론 폭력적, 때론 비폭력적으로" 귀향을 시도해왔다.
이를 막고자 이스라엘은 1950년대 가자를 침공하고 폭격해왔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부터 2005년 철수 때까지 가자를 점령하고, 2007년부터 가자를 전면 봉쇄해 "하늘 열린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의 의지까지 꺾지는 못했다. 나크바 70주년인 2018년 3월 수만 명의 팔 주민들은 '귀국 대행진' 시위에 나섰고 매주 금요일 가자의 이스라엘 접경에서 행진했다. 이스라엘군의 저격과 드론 공격으로 200명 이상 숨지고 3만 6000명 이상이 부상했지만 1년 넘게 이어졌다.
이스라엘 '파괴 공작' 희생양된 유엔 팔 난민기구
이 과정에서 UNRWA 해체를 위한 이스라엘과 미국의 '시도'는 집요했다. 이 유엔 기구가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향 꿈을 부추기고 폭력을 조장한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였다. '주이시 커런츠'의 페테르 베이나르트 선임기자는 "2018년 유출된 이메일에서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는 이 기구가 '현상을 영구화하고'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며, 평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UNRWA 파괴'를 시도했음이 드러났다"고 썼다. 당시 미국 내 주류 유대인 단체 대다수가 이를 환영했다. 추후 트럼프 행정부는 UNRWA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했으나,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21년 취임한 직후 복원하기도 했다. 네타냐후도 2018년 "팔 난민 문제 영구화"를 이유로 UNRWA 해체를 촉구했으며, 최근인 지난 1월 말에도 "UNRWA는 팔레스타인 난민 이슈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재차 비난했다.
베이나르트 선임기자는 "UNRWA가 팔레스타인 난민을 귀향하도록 유도하는 게 아니다"면서 "UNRWA를 없앤다고 팔레스타인인 정체성의 중심인 귀향 열망을 뿌리 뽑진 못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팔레스타인 학자인 유수프 자바린은 "영토적인 의미에서 팔레스타인 사회는 총체적으로 패배했다. 남겨진 유일한 저항의 공간은 가상의 집단 기억이다"라고 말했다. 베이나르트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지도자들의 이율배반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심한 역경을 겪었어도 전 국민의 귀국 열망이 시온주의의 중심이다"라며 이들 유대 지도자가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향 열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극히 역설적"이라고 말했다.
하마스 연계 의혹 부풀리고, 서방은 '장단'
하마스 연계 의혹을 받은 UNRWA 직원은 12명(9명 해고, 1명 사망, 2명 신원 확인 중)이며 이는 가자 내 UNRWA 고용인력 약 1300명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상황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미국 등 서방국들이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게 현 상황이라는 게 베이나르트의 견해다. 그는 "아직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고 진위 확인이 어렵다. 그런 증거를 봤다는 언론인들이 없다"고 말했다. UNRWA를 없애고 다른 기구로 바꿔야 이스라엘의 안보가 개선되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에 대해 "가자에서 활동하는 모든 구호 기구는 UNRWA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인력을 가자 거주자로 충당하기 때문에 대체한다고 해서 이스라엘 안보가 개선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네타냐후가 워싱턴 내 그의 동맹 세력과 함께 앞으로 몇 달 안에 UNRWA를 망가뜨리거나 심지어 없애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부상과 질병, 기아 등으로 죽어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구호 기구도 적절하게 UNRWA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라자리니 UNRWA 위원장은 "전쟁 발발 후 가자지구 피란민 보호시설 가운데 150곳 이상에서 피해를 봤고 일부는 완전히 건물이 파괴됐다. 유엔 기구를 대놓고 무시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쟁 종료 후 조사위원회를 꾸려야 할 것"이라며 이스라엘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언급했다. 2000만 유로 지원을 약속한 레오 바라드카 아일랜드 총리는 13일 의회 연설에서 "이스라엘은 세계 어느 나라의 얘기도 경청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인의 말도 듣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은 분노에 눈이 멀었다"고 말했다.
◇ UNRWA 지원금 중단(18개국): 호주, 오스트리아, 캐나다, 에스토니아, 핀란드, 독일, 유럽연합,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일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뉴질랜드, 루마니아, 스웨덴, 스위스, 영국, 미국. (알파벳순)
◇ UNRWA 지원 지속(7개국): 벨기에, 아일랜드, 노르웨이,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스페인, 튀르키예. (알파벳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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