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변과 독설로써 흥한 두 사람, 다른 듯 흡사

'김대중 정신' 말하나 DJ의 말의 겉만 봤던 이낙연

말로 지금 자리 차지한 한동훈, 그 말이 명암 가를 것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해 벽두부터 그의 이름이 자주 상기되고 있다.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길 위에 김대중>의 상영을 통해서도 그가 다시 기억되고 있지만 야당의 한 정치인에 의해서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환기가 더욱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 바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그는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유난히 많이 강조한다. 김 전 대통령과 동향이기도 하고 자신이 언론계를 떠나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도 김대중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지난달 제3지대 신당을 창당하겠다며 민주당을 탈당할 때도 그는 어김없이 ‘김대중 정신’을 꺼냈다. “포용과 통합의 김대중 정신이 실종됐다"는 것이 그의 24년간의 정치적 고향 민주당 탈당의 변이었다.

 

이낙연 새로운미래 인재영입위원장이 29일 충북 제천시 화산동 제천문화회관에서 열린 새로운미래 충북도당 창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2024.1.29 연합뉴스
이낙연 새로운미래 인재영입위원장이 29일 충북 제천시 화산동 제천문화회관에서 열린 새로운미래 충북도당 창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2024.1.29 연합뉴스

김대중과의 각별한 인연을 얘기하는 이낙연에게서는 특히 김대중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낙연 전 대표의 정치인으로서의 성공은 무엇보다 ‘말’에 힘입은 바가 컸다. 문재인 정부 때의 국무총리 시절 국회에서의 상대당 질의 추궁에 대한 재치와 기지 있는 답변으로 그는 일약 민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급 인물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김대중의 말을 계승하는 이로 여기는 듯하다. 사실 그에게서 김대중의 유창한 언설, 정확하고 예리한 말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잖았다.

김대중을 닮겠다 했지만 김대중의 삶은 못 봐

그러나 그를 떠오르게 했던 '말'은 또한 그를 표류하게 하고 있다. 지금의 그의 처지는 ‘몰락’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더라도 민주당에서 단연 선두주자였던 그의 위치가 상당히 밑으로 떨어져 있는 건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말'에서의 전락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전 대통령 박근혜 씨에 대한 사면 검토'로 대표되는 그의 문제발언들이 그 하강을 가져온 것으로 얘기된다. 그러나 그 전락은 단지 몇몇 발언들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김대중을 닮겠다면서 그의 말을 닮으려 했지만 사실은 오로지 김대중의 말만을 봤기 때문이다.

이는 김대중을 닮겠다고 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러나 왜 그런 이를 찾기가 어려운가, 라는 질문과 닿아 있다. 김대중의 말의 역설은 김대중에게 말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말은 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김대중은 말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에게 말은 단박에 쌓인 것도, 쌓으려 해서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불렸지만 그의 말은 말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의 생전 즐겨 했던 말을 빌려서 바꿔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김대중의 말만을 보는 것은 김대중 정치의 긴 역정에서 그 고난을 취하지 않고 영광만을, 그 과정을 보지 않고 그 결과만을 취하려는 것과 같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는 이는 그 고난이 주는 힘을 얻지 못한다. 김대중의 고난을 자신의 절실한 질문으로 삼지 못하는 이는 결국 자신의 말 또한 힘을 잃는다.  

김대중에게 말은 삶을 살듯이, 말한 대로 사는 것이었다. 입으로 뱉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몸에 쌓이고 기록된 것이었고, 말하는 것은 입으로가 아니라 그 몸으로 던지는,  그러므로 말 이전에 행위였다. 몇날 며칠의 불면의 밤의 뒤척임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의 말은 고난과 비바람에 찬 그의 삶, 고난과 불면의 고뇌와 번민의 결과였다.

똑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그것이 단지 그 일이 그 사람에게로 오는 '경험'에 그치는 것이 있고 그가 그 일을 겪어내는 '체험'이 되는 것이 있다라ㅡ고 할 때 김대중의 체험과 같은 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삼지 않을 때 '김대중의 계승'은 얻어질 수 없다. 그 체험이 없다면 김대중의 삶을 얘기하는 이, 그를 잇겠다는 이에 의해 김대중의 삶은 뒤집혀져버리는 것이다. 

이낙연은 김대중의 삶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나와버렸다.  

말로써만 흥한 이, 말로써 망한다

김대중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김대중의 말의 빛과 그늘을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대중에게 말의 뛰어남은 한편 칭송이지만 한편으로는 낙인이었고 굴레였다. 그가 빨갱이니 용공인물로 모함될 때 특히 통용됐던 것은 “말 잘하는 사람은 공산당”이라는 말이었다. 독재는 침묵을 강요했고, 침묵이 처세의 미덕이었던 때 김대중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민주주의는 다른 많은 자유와 함께 특히 말의 해방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누군가’ 세상을 '바꿔낸' 것이었다. 말로 인해 억압을 당했던 김대중과 같은 이들이 그 말의 해방을 있게 한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이낙연 전 대표는 '전과자' 발언을 하고 사과했지만 말의 해방과 자유는 그런 전과자들의 고초가 있었기에 이뤄진 것이다. 기실 이 대표는 그 말에 사과를 할 게 아니었다. 그 말에 대한 사과보다도 스스로 그 전과자들의 시대에 대해 이해하려 애써야 할 일이었다. 

이제 말을 잘하는 이들이 주목을 받고 그 해방의 수혜를 누린다. 이낙연도 그 양지의 빛과 은택을 입은 이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빛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제 그것은 권력에 위한 화로부터는 안전해졌지만 다른 화(禍)를 안고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자초하는 화이다.

달리 말하자면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과 글에 대해서도 적용돼야 마땅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로만' 흥하거나 '글로만' 흥할 때 그 번성은 화를 불러오기 쉽다.

사실은 말과 글의 문제는 말과 글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말과 글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말과 글 외의 것들의 문제인 것이다. 다른 것들에 대한 말의 상대적 비대, 과도의 문제인 것이다.

이낙연의 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말을 잘하는 다른 어떤 정치인에게로 닿는다. 여당의 대권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인물, 그는 말재간의 덕분으로 자신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이낙연 전 대표와 닮은꼴이다. 그 또한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데에 그의 말이 큰 역할을 했다. 이른바 '엄근진'으로 흔히 얘기되는 이낙연 전 대표와 대비되는, 독설과 조롱의 말로 성공한 이다. 무엇이 닮은 것인가. 그 방향은 다르지만 뿌리는 다를 게 없다. 말의 가벼움이다.

이낙연 전 대표의 말, 그 '진중하고 무거운 말'은 그러나 그의 행위의 가벼움으로 인해 결국 오히려 가벼운 말이 돼버린다. 자신이 그 당으로부터 받은 만큼의 헌신과 분투를 보여줘야 할 정당을 박차고 나오는 것에 작용한 계산과 셈법은 자신의 말들의 무거움만큼 그 말들을 더없이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비수와 표창같은 한동훈의 말을 듣는 괴로움

이낙연의 말과 다른 듯 닮은 말, 여당의 비상대책위장이 쏟아내는 수많은 말들이 있다. 상대 당을 향해 날카로운 비수와 표창같이 내던지는 냉소와 독설은 그의 잘 차려 입은 옷과 단정한 머리처럼 날렵해 보이지만 그가 거쳐온 자리, 지금의 자리의 중대함에 대비돼 가볍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러나 더욱 가벼운 것은 그 말 자체보다도 자신의 말로써 상대에게 일격을 가했다고 흡족해하는 심리, 그 심성의 가벼움인 것이다. 그런 그의 말을 매일같이 듣고 있는 상황이 적잖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있다. "내가 대통령의 아바타라면 당무 개입이 아니겠네"라는 식의 비아냥 대는 말을 여당의 대표격인 이로부터 날마다 들어야 하는 고통이다. 검찰의 특권 울타리 안에서 권력자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은총에 의해 수직상승한 그로부터, '동료'로서의 동질감도, 민주주의적 '시민'의 덕성을 발견할 수도 없는 그로부터, '동료시민'이라는 급조된 말을 들어야 하는 모욕감과 당혹감이다.    

이낙연과 한동훈. 말의 힘으로써 정치를 하고 있는 점에서 닮은꼴인 두 사람. 말의 힘으로 치솟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 말의 힘만큼의 말의 화(禍)를 겪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 그 말의 힘으로 더욱 자신을 드높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이 있다. 말이라는 칼이 흉기가 될 때 그 칼은 남들을 해치지만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해친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