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직전까지 '대역전' '막판 뒤집기' 소설
희망고문에 국민은 절망하고 결과는 처참
언론, 리야드 예견됐는데도 객관화에 실패
대통령뿐 아니라 언론도 예측 책임 물어야
부산이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가운데, 언론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식 보도 행태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28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73차 총회에서 진행된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가 119표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하며 개최지로 확정됐다.
한국 부산은 29표로 1위 리야드와 무려 90표 차이가 났고, 이탈리아 로마는 17표를 받았다.
그동안 정부가 엑스포 유치에 올인하고 막판에 초박빙이 될 것이라고 선전했음에도 '참패'를 당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외교 대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현지 투표 결과 소식이 알려지던 시각, 한국 언론들의 속보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서울경제>는 2030 부산엑스포 유치 불발…사우디에 석패라는 제목으로 속보 기사를 내보냈고 <서울신문>도 2030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사우디에 석패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속보를 내보냈다.
석패 惜敗
명사
1. 경기나 경쟁에서 약간의 점수 차이로 아깝게 짐.
예문
다 이긴 경기였는데 순간의 실책으로 상대 팀에게 석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석패'라는 단어는 흔히 스포츠 기사에서 아까운 차이로 졌을 때 쓰는 표현으로, 주로 1점차 혹은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을 때 사용한다.
한국, 일본과 결승 연장 승부치기서 '석패'…준우승으로 대회 마무리(스포츠경향) 프로농구 SK, 동아시아 슈퍼리그 첫경기 1점차 석패(SBS) '또 골대 불운' 한국, U-17 WC 2차전 프랑스에 0-1 석패(연합뉴스) 여자배구, 독일에 2-3 석패…올림픽 예선 3연패(뉴시스)
그럼에도 주요 조간과 경제지에서 1위와 무려 90표차로 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사안에 대해 '석패'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사실 자체를 호도하는 것은 '완패' 혹은 '참패' 사실을 감추려는 모종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러한 의심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을 줄여 부르는 신조어)라는 기사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단어 역시 최선을 다한 경기에서 아쉽게 패배하거나 명경기를 보여줬을 때 쓴다.
엑스포 유치를 바랐던 부산시민의 발언을 인용하거나 위로하는 차원에서 사용한 경우는 문제 없지만, 정부가 초박빙이라고 홍보하고도 무려 90표 차이로 패배했음에도 '졌잘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석패'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인식이다.
특히 '석패' 속보가 나온 뒤, 연합뉴스 계열사인 <연합인포맥스>는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늦은 출발에도 '졌잘싸'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연합인포맥스는 기사 제목에 '늦은 출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엑스포 유치 실패 책임이 전 정권 때문이라는 식으로 비치도록 했다.
'꿈보다 해몽'식 기사도 나왔다. <매일경제>는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졌지만 대한민국 외교·경제영토 확장 '값진 수확'이라는 기사를, 조선일보 계열사인 <조선비즈>는 "졌지만 잘 싸웠다"…사우디 리야드서 韓 기업 수주 기대라는 기사를 내고, 유치 불발이 오히려 기회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이들 기사에서 '외교 참사'라는 현실 인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 전까지 '대역전' 시나리오 쓴 언론
정부의 기대와 희망사항만 그대로 받아쓰기 한 언론의 '전망 오보'도 시민들의 비아냥 대상이 되고 있다. 언론의 신뢰성도 엑스포 유치 실패와 함께 '참패'한 셈이다.
지역신문인 <부산일보>는 투표를 앞둔 지난 27일 "준비됐나? 됐다!" 1차 75표·2차 95표로 기적 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파리 현지에서 흘러나오는 막판 권역별 판세'라며 리야드가 80~95표, 부산이 70~80표 얻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판세 분석 근거는 현지에 파견된 한국 대표단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매체는 특히 파리 현지에서 만난 박형준 부산시장의 발언을 인용하며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다.
박 시장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는 사우디의 자금 지원과 한국의 기술·개발 노하우 전수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며 "이 때문에 1차에서 리야드를 지지했더라도 2차에서 부산에 표를 던질 여지는 충분하다"고 했다.
박 시장은 또한 "전통적으로 본국 지침과 상관없이 투표자가 지지 도시를 정하는 '소신 투표'가 10~20%에 달한다"며 "여기에다 로마 지지표의 상당 부분을 부산이 흡수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1차 투표에서 리야드와 25표 차 이상만 벌어지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외신을 인용한 '막판 뒤집기' 전망도 나왔다. <뉴스1>은 한국, 엑스포 유치전 막판 뒤집기하나…부산 뒷심에 외신도 주목라는 기사에서 프랑스 매체 <르 피가로> 등을 인용해 "여러 외신들이 부산의 역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썼고, <뉴시스> <중앙일보> <MBN> 등도 같은 매체를 인용해 보도했다.
<채널A>는 이번 엑스포 실패 유치 '참패'를 두고 과거 보도 내용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매체는 지난 6월 '부산 엑스포' 한 자릿수 승부…중국·북한 변수라는 제목의 단독 보도에서 "한국과 사우디의 2파전에서 179개국의 국제박람회기구 회원국 중 지난해 0 대 49에서 시작했던 스코어가 80 대 87까지 따라잡으며 한 자릿수 표차까지 쫓아왔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지난 27일 부산 엑스포 유치 내일 밤 결판…파리에서 "대역전"이라는 보도에 이어, 지난 28일에도 부산 엑스포 '운명의 밤'…숨 막히는 파리라는 제목의 보도를 하며 "결선 투표까지 우리나라와 사우디가 득표수를 뺏고 뺏기는 막판 경쟁이 치열하게 이어질 전망"이라고 했다.
이 밖에 <MBC>도 엑스포 유치 가능성은? "충분히 사우디에 역전"(27일)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했고, <YTN>도 030 엑스포 '결전의 날'...부산 '대역전극' 노린다(28일) 등의 보도를 했다.
이러한 다량의 '전망 실패' 보도는 언론이 '받아쓰기' '정책 홍보'에만 매진한 나머지 대상을 객관화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 분석된다.
<시민언론 민들레> 취재를 종합하면 외교가에서는 리야드 승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됐다. 비공개 투표인만큼 언론도 이 같은 전망을 기반으로 조심스럽게 분석했어야 함에도 '대역전' '막판 뒤집기' 등의 단어를 남용하며 과도하게 정부의 일방적인 기대만 보도했다. 그 결과, 잘못된 전망에 기인한 '희망고문'의 충격과 실망은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됐다.
이 같은 언론의 객관화 실패는 이미 여러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이 파리 BIE 총회에서 한 경쟁 프레젠테이션(PT)이다. 당시 언론은 윤 대통령의 PT에 대해 "완벽한 PT였다" "우리가 우위다" 등의 아부성 기사를 남발했다.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여론전을 펼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기사가 국내 보도에 국한됐던 만큼 이미 스스로 객관화에 실패한 사례로도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당분간 책임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엑스포 유치 등을 이유로 과도하게 해외 순방 예산을 늘려 도마 위에 올랐지만, 완벽하게 예상을 틀리고 '참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날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대국민 담화를 통해 "민관에서 접촉하며 저희가 느꼈던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며 "이 모든 것은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했다. 언론도 예측에서 벗어난 책임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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