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집권 임박, 동독 주민 소외 등 난제 수두룩

<포린폴리시> '두 독일 이야기'…동독 재평가 소개

지워진 동독…거론하면 "향수" "독재 찬양" 뭇매

전후 서독서 나치 전력자들 대부분이 면죄부 받아

"보수, 나치 척결과 동·서독 데탕트 오랫동안 훼방"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오른쪽 세번째)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오른쪽 다섯번째)이 3일 함부르크 성 미카엘 교회에서 독일 통일 33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2023.10.03  [AP=연합뉴스]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오른쪽 세번째)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오른쪽 다섯번째)이 3일 함부르크 성 미카엘 교회에서 독일 통일 33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2023.10.03  [AP=연합뉴스]

"독일이 재통일되고 33년이 되면서 독일 문화에서 균열이 생기고 있다. 극우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권력에 다가서 있고, 행동가와 지식인은 독일이 '제3 제국(나치 독일)' 시대 벌어진 일들을 넘어서는 사건들을 다루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의 앨리슨 미컴 부편집장은 '두 독일 이야기: 재통일 후 33년, 그 나라의 상처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선명하다'란 1일 자 글에서 이렇게 썼다. 독일 출신의 미컴은 브라운 대학을 나와 베를린의 글로벌공공정책연구소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 미컴은 '그 벽을 넘어: 동독의 한 역사'(카트야 호이여, 베이직북스)와 '나치스 이후: 서독 문화 이야기'(마이클 H. 케이터, 예일대 출판사) 등 최근 출간된 두 권의 책 내용과 독일 재통일 이후 세대로서 자기 경험을 섞어가면서 현 독일의 핵심 문제를 진단했다. 동독은 1990년 10월 3일 서독에 흡수통합이 됐다. 3일인 오늘로 재통일 33주년이다.

현대 통일 독일의 국가적 서사 대부분이 동독은 잠깐 반짝하고 몰락한 게 마땅한 역사의 일탈이란 가정을 전제로 한다고 미컴은 봤다. 그는 "오늘날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의 과거(나치 독일)에 쏟는 노력을 고려하면, 대다수 독일인들이 제3 제국보다 훨씬 더 지속됐고 훨씬 최근에 무너진 동독 역사를 얼마나 하찮게 취급하고 있는지 놀랍다"고 적었다.

 

독일 신호등(사회민주당·빨강, 자유민주당·노랑, 녹색당·초록) 연립정부 수뇌부가 30일(현지시각) 브란덴부르크주 메제베르크성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1박 2일간 비공개 내각 심화 회의를 한 연정은 내년부터 4년에 걸쳐 법인세 320억 유로(45조9천억원)를 감면하는 '성장기회법' 추진에 합의했다고 이날 발표했다. 왼쪽부터 자유민주당 소속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 사회민주당 소속 올라프 숄츠 총리, 녹색당 소속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 2023.08.31. EPA 연합뉴스
독일 신호등(사회민주당·빨강, 자유민주당·노랑, 녹색당·초록) 연립정부 수뇌부가 30일(현지시각) 브란덴부르크주 메제베르크성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1박 2일간 비공개 내각 심화 회의를 한 연정은 내년부터 4년에 걸쳐 법인세 320억 유로(45조9천억원)를 감면하는 '성장기회법' 추진에 합의했다고 이날 발표했다. 왼쪽부터 자유민주당 소속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 사회민주당 소속 올라프 숄츠 총리, 녹색당 소속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 2023.08.31. EPA 연합뉴스

"억압적 정치체제에도 사회 이슈에선 동독 앞서"

미컴은 오늘의 독일을 병들게 한 요인 중 일부는 서독 엘리트들이 동독의 유산을 분별 있고 경멸적이지 않게 대하지 못한 결과라는 동독 태생인 호이여의 시각을 전한다. 독일의 권위주의적 인물 대다수가 절대적 확신을 갖고 '소련 위성국가'였던 동독을 단정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동독에 대해 호이여는 재평가를 시도한다. 억압적인 정치적 시스템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사회적 이슈에선 동독이 서독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고, 이런 동독 사회의 진보적 부분은 나름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동·서독을 비교하면, 2차 대전 후 서독 여성은 대부분 가정으로 돌아간 반면, 동독에선 여성 고용률이 91%에 달했고, 서독과 달리 여군에게 전투 임무를 부여했다. 낙태가 합법적으로 가능했고, 유급휴가는 헌법상 권리로 명시됐다. 서독에선 낙태가 불법이었다. 

또한 경제적 평등과 사회 신분 이동 측면에서 동독은 서독이나 통일독일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1967년 노동자 계급 출신 대학생의 비율은 동독에서 약 33%였던 반면, 서독은 3%였고 재통일 이전까지 5%를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노사이드' 조아진 작.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독일군은 스페인 내전 당시,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비행기 24대로 폭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피카소는 이 참상을 대작으로 그려냈다.
'제노사이드' 조아진 작.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독일군은 스페인 내전 당시,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비행기 24대로 폭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피카소는 이 참상을 대작으로 그려냈다.

'지워진 동독'…거론하면 "향수" "독재 찬양" 뭇매

미컴 부편집장은 "현대 독일의 정치 담론에선 동독을 그다지 심각하게 거론하지 않아도 대부분 '동독에 대한 향수'나 '독재 찬양'으로 매도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2003년 독일 민영방송 RTL이 동독의 일상생활에 관한 다큐 시리즈를 기획했다가 방영 훨씬 전에 대다수 평론가와 시민사회 단체들로부터 "독재 희석 쇼" "향수 자극 쇼"라고 뭇매를 맞았다고 전한다. 당시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는  동독인들을 재통일의 경제적 어려움을 한탄하는 "투덜이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불렀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합 당시 동독 주민의 상황에 대해 호이여는 "그들은 한때 자신의 일부였던 어떤 곳으로 돌아갈 지 질문도 받지 않은 채 그들 없이 진화했던 서독 국가에 뒤섞였다"면서 "이 새로운 현실은 빠져 죽느냐, 아니면 헤엄치느냐의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동독 군에 복무하던 여성 2000명이 생계를 잃었고, 1989~2007년 기간에 독일 정부는 동독 지역의 3세 미만 대상 공공탁아소 60% 없앰으로써 여성의 노동력 참여와 신분 상승 기회를 줄였다.

이에 대해 미컴은 "독일 재통합에 따른 사회적 불안을 한탄하는 것은 동독 정치 시스템을 용인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서독이 보여줬어야 할 품위가 결여돼 있다는 점을 소리쳐 알리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1945년 11월 21일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1946년 9월 30일 피고들이 전쟁 범죄 재판의 평결을 듣고 있는 장면. 연합뉴스 자료사진
1945년 11월 21일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1946년 9월 30일 피고들이 전쟁 범죄 재판의 평결을 듣고 있는 장면. 연합뉴스 자료사진

전후 서독서 나치 전력자들 대부분 면죄부 받아

동독의 특징을 "피해망상"으로 보는 호이여의 시각도 흥미롭다. 그 피해망상이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과 투쟁심에 뿌리박고 있다고 본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수십 년간 처형을 당했다.

동독의 나치 척결 작업은 서독보다 훨씬 나았다는 게 호이여의 주장이다. 스탈린이 동독에서 전쟁배상금을 받아감으로써 동독의 초기 경제는 타격을 받고 산업은 공동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규모의 나치 전력자들이 돈 버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했다.

이와 관련해 '나치스 이후: 서독 문화 이야기'에서 케이터 명예교수(토론토 요크대)는 미국과 영국 군사정부가 전쟁배상금에 반대함으로써 서독 경제의 붐을 일으켰고, 나치 전력자들 대부분이 면죄부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1945~46년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선 "극소수의 핵심 나치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수많은 대중들의 분노를 촉발했다고 전한다.

케이터 교수에 따르면, 서독에서 생존자 대부분은 희생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으며, 독일 노인들은 자신이 겪은 전쟁의 고통을 유대인의 고통과 동일시함으로써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를 품고 있다. 나치 전력자들이 대다수 유력 신문의 발행인이고, 학계 요직을 맡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제3 제국' 연구도 나치 전력 교수들의 격렬한 방해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서독 수도 본에 설치된 첫 의회 의원들은 8분의 1이 나치 전력자였으며, 전후 초대 대통령인 테오도르 호이스는 아돌프 히틀러 체제를 옹호한 인물이었을 정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젊은 세대와 행동가와 지식인의 도전이 시작됐으나, 독일 재통일 이후에야 홀로코스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게 됐다. 독일역사박물관은 1987년에 세워졌고,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2005년에야 문을 열었다.

 

제2차세계대전 나치전범을 단죄한 독일 뉘른베르크 재판 자료들이 미국 알래스카 옥션사 경매에 올랐다. 사진은 경매에 나온 나치 완장과 메달. 연합뉴스 자료사진
제2차세계대전 나치전범을 단죄한 독일 뉘른베르크 재판 자료들이 미국 알래스카 옥션사 경매에 올랐다. 사진은 경매에 나온 나치 완장과 메달. 연합뉴스 자료사진

"보수, 나치 척결과 동·서독 데탕트 오랫동안 훼방"

미컴은 "대체로 (사회민주당과 같은) 좌익 사상가와 정치인이 독일을 올바른 역사로 밀고 왔던 반면, 보수 세력은 나치 척결뿐 아니라 동·서독 데탕트(긴장 완화)도 오랫동안 훼방을 놓았다는 게 이 두 책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라고 지적했다.

동독을 정식국가로 승인한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구권과의 화해를 추구했던 서독의 '동방정책'은 추후 동독의 '서방정책'에 반영됐다. 미컴은 "두 국가가 서로 협력하는 길을 찾았다는 사실은 외부에 의한 조국의 강제 분단을 처음부터 반대해왔던 양측 국민 모두에 유익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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