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18일 엘리엇 중재판정에 취소 소송 제기
“국제 판례상 국민연금도 국가와 연계됐다고 볼 가능성 커”
“미국도 한국과 같은 의견 냈다는 주장은 판정문과 배치”
한동훈 장관, 박근혜·이재용 구상권 청구 가능성 원천 봉쇄
송기호 “엘리엇은 배상받을 수도, 소액 주주는 못 받아”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에 배상하라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 판정에 대해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 회장에 대한 구상권 청구 가능성도 줄어든 것으로 평가된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당시 반대파들이 주장했던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ISD)’의 문제점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지적도 대두된다.
18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2018년에 제기한 국제 투자 분쟁 사건에 대해 정부는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며 “이번 판정은 자본주의 기본원칙에 반하기에 충분히 승소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국제투자자분쟁센터(ICSID)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 6931달러(한화 약 690억 원)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이에 한국 정부가 불복 신청 기한인 28일 만인 18일 취소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정부는 이날 법무부 홈페이지에 판정문도 공개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부당한 대우 등으로 삼성물산 지분을 보유 중이었던 엘리엇이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위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주가 누구인지 결정하기 위해 삼성물산 주주명부가 폐쇄된 2015년 6월 11일 기준으로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최대 외국인 투자자였다. 당시 국민연금은 11.21%의 삼성물산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최대 주주였다. 엘리엇의 주장에 따르면 합병 당시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했다. 이재용 당시 삼성 부회장은 이러한 합병비율을 통해 제일모직의 더 큰 지분을 활용해 삼성물산 지분을 더 많이 취득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삼성물산 주주들로부터 제일모직 주주들로 가치를 이전시켰다는 것이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이재용 당시 부회장은 상속세 납세 의무를 최소화하면서 삼성 일가 내에서 소유권과 지배권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것이 엘리엇의 의심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익성과 독립성 원칙에 따라 기금을 운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삼성물산 최대 주주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 조건에 찬성했다는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작업을 돕기 위해 청와대와 정부에서 부당한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 엘리엇의 주장이었다.
엘리엇은 배상금 7억 7000만 달러(약 9917억 원)를 청구했지만,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이 중 약 7%인 5358만 6931달러(약 690억 원)를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지연이자와 법률 비용 등까지 고려하면 배상금액은 약 1300억 원대에 이른다.
법무부는 중재재판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관할 인정 요건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한미FTA상 관할 인정을 위해서는 ▲ 정부가 채택·유지한 조치일 것(당국의 조치) ▲ 투자자의 투자와 관련성이 있을 것(관련성) ▲ 조치의 책임이 국가에 귀속될 것(귀속) 등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 가운데 관련성 요건과 관련 법무부는 ‘소수 주주는 자신의 의결권 행사를 이유로 다른 소수 주주에게 어떠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는다’라는 상법상 대원칙을 들어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동훈 장관은 “삼성물산의 일반 주주 중 하나인 국민연금이 자신의 의결권을 행사한 것은, 다른 주주인 엘리엇의 투자에 대한 조치로 볼 수 없다”라면서 “이러한 판정이 선례로 인정되면 국내 기업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악의적 ISDS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법무부에 따르면 삼성물산의 주주였던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도 이와 유사한 사안에서 약 2억 달러(약 2576억 원)의 손해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이 소수 주주에 불과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정하는 내부적인 동기나 과정에서 일부 시람들의 위법이 있었다고 해서 다른 소수 주주인 엘리엇에게 손해를 입힌 것으로 평가할 수 없어 관련된 형사판결을 이 중재 사건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법무부의 주장이다.
또한 법무부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제출한 비 분쟁 당사국 의견서를 통해 한-미 FTA 상 당국의 조치로 인정되는 ‘당국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비정부 기관의 조치’는 ‘그 기관이 위임받은 정부적 권한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한미FTA 관할 인정 요건 상 당국의 조치와 귀속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공공기관 등이 주주로서 의결권을 행사한 사안에서 국가에 책임을 묻는 국제 투자 분쟁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며 “취소 소송으로 바로 잡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국가의 국부펀드나 연기금 펀드의 지분권 행사도 부당한 국제 투자 분쟁 제기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 장관은 또 “중재판정부가 국민연금을 ‘사실상 국가기관’이라 판단해 의결권 행사의 책임이 정부에 귀속된다고 본 것은 한미FTA가 예정하고 있지 않은 ‘사실상 국가기관’이라는 개념에 근거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건 부당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이 대한민국 법원에 제기한 합병무효 소송 및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법원은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직권남용 등 위법행위가 있었더라도 국민연금은 결과적으로 독립된 의결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한 것도 관할 인정 요건상 당국의 조치와 귀속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단 근거다.
그러나 송기호 변호사는 국민연금이 기능적, 재정적으로 당사국과 연결된다고 보고 그 행위를 대한민국에 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 대다수 국제 판례라고 소개했다. 송 변호사는 “스페인 갈리시아 지역 산업개발공사가 스페인 정부와 독립된 민간 상업 기관이라는 주장을 배척하고 마페지니의 주장대로 스페인 정부에 귀속한 사건이 있었다”면서 “모로코 도로 건설 공사라는 상업 기업에 대해 그 기능을 평가해 사실상 국영기업으로 간주해 살리니의 입장대로 모로코 정부에 귀속한 사건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행위를 공무원의 개인적 일탈로 판단한 판례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의견서를 통해 한국의 입장에 부합하는 의견서를 냈다는 법무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송 변호사는 “판정문을 보면 미국 의견서를 인용하면서 ‘미국에 따르면, 당사국이 국가의 자격으로 위임한 규제, 행정 또는 기타 정부 권한을 가진 단체와 같은 비정부기구가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은 ’수용, 허가, 상업적 거래의 승인이나, 할당제, 수수료 또는 기타 부과금을 부과할 권한‘을 포함한다’고 돼 있다”면서 “한 장관과 법무부의 주장은 미국 의견서를 왜곡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동훈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한 구상권 청구 가능성은 원천 봉쇄했다. 한 장관은 "저희가 확신하고 취소 소송을 제기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지면 구상권을 (청구)할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기호 변호사는 “런던 법원에 간다는 것은 삼성동에 있는 상사중재원에서 중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면서 “취소 소송을 제기하기보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엘리엇에 대한 배상금이 지급되면 국내 소액 주주와의 형평성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송 변호사는 “이미 국내 삼성물산 소액 투자자들은 합병 무효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인과관계가 없다고 기각당했다”면서 “외국인 투자자는 ISD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지만, 국내 투자자는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한미FTA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송 변호사는 “한미FTA가 체결될 당시 ISD가 독소조항이라며 체결을 반대했다”면서 “국내법으로 구제받을 수 없는 외국인 투자자가 ISD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외국 투자자가 ISD를 통해 중재 청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국내 정책 결정자들에게 정책 결정의 위축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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