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호 미국톺아보기] ‘make america great again’ 구호에 담긴 뜻

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적지 않은 나라들이 국가의 목표나 정체성을 담은 공식 구호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가 대표적이다. 합중국 미국의 공식 구호는 ‘신의 가호를!’이라는 뜻의 ‘In god we trust’이다. 본래는 ‘다양성 속의 조화’를 의미하는 ‘E Pluribus Unum(Out of many, One)’이었다. 건국 직후 T. 제퍼슨, B. 프랭클린 등의 제안을 논의를 거쳐 의회가 확정했다. 그것이 1956년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바뀐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분명히해야 한다는 반소·반공주의 정치인들, B. 그래햄 같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미국의 국가 공식문장(1782년 확정)
미국의 국가 공식문장(1782년 확정)

그럼에도 미국의 국가공식 문장에는 여전히 본래의 모토가 새겨져 있다. 그것이 종교적 냄새를 풍기는 공식 구호보다 건국정신에 더욱 부합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치인들도 대중 연설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함께 섞여 시작했고, 이후의 역사 또한 그렇게 이어져온 만큼, 그를 반영하고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를 포괄하는 통합의 사회가 미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사실상 분단국가이다. 인종과(예; 백인과 흑인) 지역(예: 북부와 남부)은 가장 두드러진 두 개의 분계선이고, 정치적 격차(예: 미국은 과두정 국가라는 진단)와 경제적 격차(예: 압도적 소득 불평등 체제)는 사회를 가르는 또 다른 분계선이다. 정치경제적 계급의 분계선이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보다 근원적인 것은 인종과 지역을 가르는 분단의 문제이다. 뿌리는 17세기 남부에서 기원하는 흑인 노예제도이다. 이런 점에서 인종과 지역의 분단은 노예제 문제로 수렴되고, 백인종주의(white racism)는 노예제 문제의 또 다른 얼굴이다. 신학자 J. 월리스는 그것을 ‘미국의 원죄’라고 불렀다. 노예제는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의 가열한 투쟁 속에서 공식적으로는 허물어졌다. 오래 굳어져온 유무형의 불평등과 차별문제도 1960년대의 민권운동을 정점으로 점차 개선되었다. 그러나 원죄의 함정은 지금까지도 깊고 강고하다.

트럼프는 그 함정으로 미국을 이끌고 간 가장 최근의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트럼프는 미국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한 가장 최근의 인물이기도 하다.

트럼프 현상의 본질

그는 지금 내년 대선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재임 중 두 번의 탄핵 소추를 당했고 퇴임 후 국가기밀 문건 불법 유출, 회계부정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공화당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압도적 1위의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20년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당선됐을 때인 2016년보다 무려 천만 표가 늘어난 7400만 표를 얻었다. 바이든의 8100만 표와 함께 역대 대통령 선거 최고의 득표수다. 그 이전까지는 2008년 오바마의 6900만 표였다. 그에 앞선 2016년, 트럼프는 거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었었다.

당선부터 낙선,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트럼프 지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21년 일군의 정치학자들이 이 물음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2011년부터 수집된 유권자 인터뷰 자료를 분석한 결과, 트럼프 현상의 핵심에는 ‘Activating animus,’ 즉, 유권자들의 ‘사악한 심보’가 놓여 있다는 것. 풀어 말하면, 민주당 지지 성향이라고 생각되는 소수집단-인종적(예: 흑인과 히스패닉), 종교적(예: 모슬렘), 문화적(예: 게이, 레즈비언 등) 소수집단-에 대한 ‘animus, 즉 편견과 증오에 기초한 적개심,’ 요약하면 ‘보수 개신교 백인종주의’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연설을 한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비판 시위대와 이에 맞선 지지자 수천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와 경찰, 시위대와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 간에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으며 경찰이 최루탄까지 쏘며 해산을 시도했다. 사진은 피닉스 컨벤션센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연설하는 모습. 2017. 8. 24. 피닉스 EPA=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연설을 한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비판 시위대와 이에 맞선 지지자 수천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와 경찰, 시위대와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 간에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으며 경찰이 최루탄까지 쏘며 해산을 시도했다. 사진은 피닉스 컨벤션센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연설하는 모습. 2017. 8. 24. 피닉스 EPA=연합뉴스

2011년 정치에 뛰어들면서 트럼프는 오바마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음으로 양으로 내세우는 데뷔 전술을 구사했었다. 2016년 선거에서는 인종주의적 반감과 분열을 선동하는 발언과 유세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한 정치평론가는 그의 행태를 두고 ‘인종주의라는, 미국인들이 품고 있는 심성의 가장 사악한 면’을 건드렸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선거 전략이 트럼프의 창작은 아니다. 공화당은 1960년대 이래 ‘남부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남부의 백인 유권자들을 겨냥한 인종주의 선동전술을 채택했었고 트럼프는 그것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을 뿐이다.

현실로 나타나는 백인종주의 사례는 부지기수다. 1964년의 L. 존슨 이후 지금까지 민주당 후보는 대통령 선거에서 백인들로부터 단 한 번도 과반 이상의 지지를-당선자의 경우에도-받은 적이 없다.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의 트럼프 지지율은 2016년에는 77%, 2020년에는 무려 84%였다. 백인종주의의 유포와 확산에 복음주의 교회가 기여한 것은 미국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백인종주의 조직은 유서 깊은(?) KKK부터 오늘날의 신나치 조직에, 군대 수준의 무장을 갖춘 민병대까지 무수하다. 트럼프의 1/6 쿠데타는 이들 조직의 적극적 협조로 이뤄졌다. 그들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프의 구호는 ‘미국을 다시 백인에게(make America white again)’라는 뜻이다. 사실 백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미국인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사회구조이자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까닭이다.

백인종주의의 형성

애초부터 다양한 이민집단으로 구성된 만큼 미국의 인종주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예: 앵글로색슨 1등, 아일랜드나 동·남유럽계는 2등). 여기에서는 흑-백 관계에 주목, 핵심만 짚기로 한다.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인종이라는 관념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자연과 과학은 피부색에 따라 인간을 구분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다. 그러나 사회는 기준을 만들어 인종을 가른다. 이유는 특정집단을 배제하거나 포함하기 위해서, 나아가 권력과 부, 특권의 배분 등을 체제화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백인종’이라는 범주는 그런 이유로 17세기 후반경 만들어졌고 이후 신속하게 제도화되었다.

 

미국의 백인종주의는 17세기 '베이컨의 반란' 이후 식민 지배계급과 당국자에 의해 채택된 '인종 분할통치' 전술의 결과다.  
미국의 백인종주의는 17세기 '베이컨의 반란' 이후 식민 지배계급과 당국자에 의해 채택된 '인종 분할통치' 전술의 결과다.  

신대륙 식민과 이주의 역사는 1600년대 초 버지니아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잘 알려진 청교도의 뉴잉글랜드 이주보다 약간 앞선 시기다. 당시 식민지 농업경제는 노예노동에 기초하고 있었다. 가난 때문에 팔려온 영국 등 유럽계 이주민과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이 일꾼으로 혹사당했다. 당시 이들 노동자들은-노예든 자유민이든-출신 지역이나(예: 영국인, 체로키, 스페인), 종교(예: 기독교, 유태교, 회교) 등으로 나뉘었지, 흑인·백인 식의 피부색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북부 뉴잉글랜드는 물론, 남부 버니지아, 메릴랜드, 캐롤라이나에 이르기까지 흑인에 대한 특별한 반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결혼도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흑인 노예가 계약기간이 끝나고 자유민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재산소유 금지조처가 시행되기 전, 돈을 모은 노예는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그러던 중 1676년, ‘베이컨의 반란’(베이컨이라는 이름의 백인 노예가 주동한) 사태가 터진다. 인종구분 없는 노예-노동자들의 반란이었다. 이유는 경제적 독립 기회의 부재, 노동 착취에 대한 불만이었다. 식민지 사업가들과 영국 관리들은 긴장했다. 식민 지배계급과 당국자에게 항상적인 불안요소였던 노예-노동자 반란이 드디어 터진 것이다. 대책 논의 끝에 이들은 이전과 구조적으로 다른 통치제제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핵심은 ‘인종 분할통치’ 전술이었다. 흑인과 백인이라는 인종으로 노동자를 가르고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법률적 장치를 만든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흑백 간 결혼 금지법이다. 이 외에도 흑인에게는 법정의 증인으로 설 권리를 없앴고, 상업행위가 금지됐으며,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고 참정권도 부정됐다. 공공장소에서 3명 이상은 모일 수 없었으며, 소유주의 허락이 없는 결혼이나 자녀 부양도 금지됐다. 흑인은 드디어 평생 노예로 규정되었다. 심지어 선대 조상 중 단 한 사람이라도 흑인일 경우 후손들 모두를 흑인으로 간주하는 소위 ‘순혈주의 조치(one-drop rule)’까지 시행됐다. 함께 일했던 백인 노동자는 이젠 흑인 노예를 관리하는 마름으로 승진했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광대한 토지를 받는 특권도 주어졌다.

흑인 노예 만들기 - 역으로 말하면 백인 만들기 - 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적(예: 창세기에 나오는 햄의 저주), 문화적(예: 검은색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논리는 물론, 후에는 흑인의 지능이 낮다는 골상학 같은 사이비 과학까지 동원되었다. 백인이라는 미국판 귀족(?)은 이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사고(white supremacy)와 백인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white nationalism), 즉 백인종주의의 시작이다.

트럼프의 경고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을 가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아이러니다. 이유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분단 때문이다. 양극화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실상은 분단이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 부와 소득의 공정한 분배의 문제, 사회를 규제하는 가치와 도덕의 문제에서 미국은 철저하게 갈라져 있다. 백인종주의는 핵심 원인 중 하나다. 이를 깨우쳐준다는 점에서 트럼프 현상은 미국이 자기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고이자 교훈이다.

 

트럼프 현상은 지배 엘리트들의 반동의 정치가 돌아오고 있다는 징표다. 

여기서 새겨야 할 것은 트럼프는 주동자이자 매개자라는 점이다. 그는 지지자들이-넓게 말하면 미국의 백인들-이미 품고 있는 인종주의적 적개심을 자극하고, 풀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트럼프는 이들에게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달리 말해 그를 지지한다는 것은, 평상시에는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소수집단에 대한 적개심을 푸는 대리만족의 기제인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을 일러 컬트 집단 같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볼 때 트럼프 현상은 지배 엘리트들의 사악한 의도와 반동의 정치가 초래하는 사회적 위험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매우 적확한 사례이기도 하다. 트럼프나 트럼프 아류들이 없다면 문제의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트럼프와 그의 아류들이 돌아오고 있다. 군사주의와 함께 미국이 빠진 또 하나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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