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개혁과 금융개혁…개혁 빙자한 개악
“미국에는 정당이 둘이야. 하나는 공화당, 우리로 치면 보수당이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주당. 우리로 치면 음…. 그것도 보수당이지.” 오래전인 1960년대 초 ‘beyond the fringe’라는 제목의 영국의 시사 코미디는 미국 정치판을 그렇게 풍자했었다.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권운동 지원,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이름의 복지사회를 추진했던 당시의 민주당조차 영국 기준에서는 보수정당이었다.
학자들이 지적하듯 미국의 정당은 자본과 노동 기반의 보수-진보가 아니라 자본을 포함한 다양한 이익집단과 사회운동 세력들의 연합조직(coalition)이다. 여기에는 유혈 폭력까지 동원한 사회적, 정치적 억압으로 진보운동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배경도 작용한다. 따라서 미국식 진보-보수 구분은 유럽 수준에서는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민주당은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고 뉴딜이라는 큰 성취를 이룩했다. 그런 민주당이 80년대 ‘신민주당(New Democrats)’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뉴딜 노선을 폐기하고 중도우파의 길로 뛰어든다.
1985년 ‘민주당 리더십 회의’로 본격화된 중도우파 노선
그 걸음은 1985년 설립된 ‘민주당 리더십 회의(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약칭 DLC)’로부터 본격화된다. 70년대에도 새 길을 모색하려는 당 내부의 노력은 있었지만 문제 제기 수준에 머물렀다. 리더십 회의가 만들어진 결정적 계기는 1980년과 1984년 레이건에게 당한 민주당의 궤멸적 패배다. 특히 84년 선거에서 먼데일은 자신의 출신 주만 빼고 49개 주에서 모두 졌다. 이후, 당내 보수파인 남부(예: 조지아주)와 서부(예: 애리조나주)의 주지사, 하원과 상원의원들이 조직을 구성하면서 당의 노선과 정책 변화를 주도한다.
DLC는 ‘신민주당’이라는 구호 아래 두 가지 과제를 추진한다. 하나는 신민주당의 정체성에 맞는 차기 지도자를 물색하는 것, 둘은 당의 노선과 정책 방안을 새롭게 다듬는 것이었다. DLC는 1989년 발표한 ‘현실을 외면한 민주당의 정치(Politics of evasion)’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당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정체성이라고 판단했다. 60년대 이래 뉴레프트의 영향으로 당이 여성, 흑인, 이민자, 실업자, 성 소수자 등을 위한 정치조직으로 인식되면서 백인 중산층 유권자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당은 ‘리버럴-진보’라는 이미지는 물론, 그동안 유지해온 ‘교조적 리버럴-진보 노선(liberal fundamentalism)’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1990-91년 DLC 의장을 맡았고,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아칸소 주지사를 지낸 클린턴이다. 클린턴은 일찍부터 “나는 다른 종류의 민주당원”, 즉 중도보수 성향이라고 선언하면서 대선에 임했고 1992년 당선, 1996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루스벨트 이래 재선에 성공한 첫 민주당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만들었고, 선거조직으로 활약한 DLC도 정치적 승리를 일궈냈다.’
한편 DLC는 1989년 당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홍보전략 수립, 정책대안 제시를 위해 진보 정책연구소(Progressive Policy Institute 약칭 PPI)를 세운다. 연구소는 균형예산, 정부 규제와 시장이 적절하게 섞인 혼합경제 정책을 세우고, 동시에 의료보험 확대와 인종 평등정책 등의 진보적 의제도 담았다. 앞서 언급한 보고서는 연구소의 첫 성과물이다. 그러나 내용은 사회복지, 소득 불평등, 고용 문제 등을 기업과 시장의 논리로 해결한다는 즉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를 사실상 수용한 것이었다. 이를 당은 뉴딜도 신자유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라고 불렀고, 클린턴이 추진한 복지와 금융개혁은 그 길을 대표하는 두 가지 사례다.
복지개혁과 금융개혁, 개혁 빙자한 개악
19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클린턴은 “지금까지의 연방 복지제도를 끝장내겠다”라는 공약을 내세웠다. 요체는 60여 년을 이어온 사회안전망과 관련한 뉴딜의 틀을 철폐한다는 것이었다. 1996년 만들어진 복지개혁 법안의 핵심은 빈곤가정 지원제도의 전면적 개편이었다. 소득수준과 부양가족을 기준으로 하는 지원방식을 폐지하고, 취업 또는 취업에 준하는 각종 활동을 조건으로 하고, 지원 액수 및 지원 기간도 대폭 축소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예산은 연방과 주 정부가 반씩 부담하되, 지원방식과 내용, 기준설정, 예산집행 등, 모든 복지 실무는 주 정부로 이관됐다. 당시 입법안의 하원 표결에서 공화당은 2명을 제외한 230명 찬성, 민주당은 찬성 98, 반대 98; 상원에서는 공화당 53명 전원 찬성, 민주당 찬성 25, 반대 21.
1999년의 금융개혁 역시 뉴딜의 규제제도를 철폐하는 것이었다. 일반금융과 투자금융, 보험, 증권, 주택대출 부문으로 업무영역을 분리했던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ull Act)'을 폐지한 것. 발의한 의원들 이름을 따 ‘그램-리치-블라일리 법(Gramm-Leach-Bliley Act)'이라고도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금융 선진화법(The financial services modernization act)’이다. 기존의 업무 구분이 구식이며 경쟁을 저해하기 때문에, 다양한 서비스를 한 곳에서 제공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연관 기업 간의 인수합병도 자유롭게 해 금융 서비스 산업을 ‘선진화(modernize)’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원 표결에서 공화당은 찬성 205, 반대 16. 민주당 찬성 138명, 반대 69. 상원에서는 공화당 53명과 민주당 1명 찬성, 민주당 반대 44.
클린턴은 복지개혁과 금융개혁을 재임 기간 자신의 큰 업적이며 민주-공화 양당 협치의 모범사례로 내세웠다. 특히 복지개혁에 대해서는 1960년대 이래 제기돼온 해묵은 과제를 해결한 생산적 정치라는 찬사도 이어졌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복지개혁은 빈곤 문제의 악화를, 금융개혁은 투기를 조장하면서 부동산과 주식 거품을 낳았고 2008년 금융공황의 씨를 뿌렸다. 입법 이후 복지 수급 세대는 빈곤층의 68%에서 23%로 떨어졌다. 클린턴은 이를 복지 의존증을 줄인 개혁의 성공 징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같은 기간 빈곤선 이하의 가계는 두 배로 늘어났고, 하루 2달러가 채 안 되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극빈층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미 클린턴 정부의 복지 담당 차관은 법안이 빈곤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라며 항의 표시로 사표를 던지기도 했고, 상당수 각료들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심지어 클린턴 자신도 법안이 복지 수급 부분을 과도하게 삭감했음을 인정했다.
한편 클린턴 2기는 경제성장과 금융규제 철폐로 대표된다. 금융 선진화법에 뒤이어 2000년 ‘선물거래 선진화법(Commodity Futures Modernization Act)’이라는 대출 규제 철폐 법안도 만들어졌다. 금융 선진화법이 재벌급 금융기업을 낳았다면, 선물 선진화법은 약탈적 고리대금업의 고삐를 풀어주었다. 신생 인터넷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한 ‘닷컴 버블’ 사태가 터지고, 몇몇 정책 당국자들이 과도한 탈규제의 부작용을 지적했었다.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비아냥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린스펀 연방은행 의장과 클린턴 정부는 듣지 않았다. 금융산업을 키우기 위해 탈규제-자유화는 필수이며 방만한 대출이나 주식투기 등은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당시 법안토론 과정에서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은행은 이제 너무 커져서 무너지도록 놓아둘 수 없는(too big to fail) 괴물이 될 것이며, 결국 정부의 구제금융이 동원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의 예언은 정확하게 9년 후, 2008년 금융공황으로 현실화했다.
‘제3의 길’ 찾다가 길을 잃은 민주당
사실 복지와 기업규제 문제는 1960년대부터 제기되었던 오랜 과제였다. 보수세력의 끊임없는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었고, 레이건 이후 공화당 정권 하에서 점진적으로 축소되고 느슨해져 왔다. 어떻게든 손을 봐야 했다. 그러나 클린턴 방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안을 제시하는 의원들도 있었고, 늦게라도 거부권을 발동해 재의를 요구해야 한다는 각료도 적지 않았으며, 공개비판에 나선 전현직 고위 인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클린턴과 그 주변의 참모들은—특히 자유시장 정치국 위원(free market Politburo)이라고도 불렸던 연준 의장 A. 그린스펀, 재무장관 R. 루빈과 L. 서머스 등—이른바 협치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공화당과 손을 잡고 법안 통과에 진력했다. 그렇게 뉴딜 체제의 두 축인 복지제도와 금융규제는 사실상 해체됐다.
변명하자면 이데올로기의 풍향이 바뀌고 정치 지형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1980년의 레이건 혁명과 함께 신자유주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올랐다. 1994년에는 하원·상원·주지사 선거에서 모두 공화당이 앞섰다. 정계 전체가 공화당 우위로 바뀐 것은 40여 년만의 일이었다. 소위 ‘94년 혁명’이다. 민주당 내부의 주도권도 남부에 기반을 둔 중도 보수파에게로 넘어갔다. 이 같은 정치판의 큰 변화가 클린턴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민주당이 제3의 길을 주창한 배경이다. 그러나 그 길은 1960-70년대 전개된 국내외의 거대한 변동을 성찰하고 제시한 미래의 이정표는 아니었다. 고민의 결과물이지만 그것은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당이 취해야 할 선거전략 이상을 넘지 못했고, 스스로도 ‘진보적 신자유주의(Progressive neo-liberalism)’라 불렀듯 신자유주의 노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클린턴의 정책은 그의 임기와 함께 끝나지 않았다. 금융규제 철폐의 책임을 맡았던 주요 인사들은 거의 그대로 오바마 정부로 인계되었다. 2008년, 예고됐던(?) 금융공황이 결국 터지자 보수의 티파티 운동과 진보의 오큐파이 운동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고, 클린턴과 오바마는 보수, 진보 모두로부터 비난받았다. 특히 ‘희망과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던 오바마는 ‘배신의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바이든의 민주당 역시 그 선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정표 상실의 혼돈시대, 더 무거워진 진보의 책임
역사의 흐름은 이데올로기와 함께 달라진다. 경제학자 M. 프리드먼은 백여 년간의 근대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자유방임의 애덤 스미스 물결,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케인즈주의에 기초한 뉴딜의 복지국가 물결,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자유시장의 복귀로 대표되는 하이에크 물결’이라는 세 가지 큰 흐름이 교차하는 과정으로 정리한 바 있다.
지난 40여 년을 지배해온 하이에크류의 신자유주의 물결은 이제 불신과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빈부격차 심화, 정치 양극화, 인종문제 악화, 극우집단이 키우는 증오와 폭력의 문화로 깊어지는 미국의 모순과 미국 일극체제의 쇠퇴가 큰 배경이다. 새천년세대, Z세대의 사회주의에 대한 호의적 태도,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핵심으로 내세우며 돌풍을 일으켰던 B. 샌더스의 대선 운동, 빠르게 회원이 늘어나고 있는 미국 민주사회주의 조직(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약칭 DSA)의 성장 등은 지금과는 다른 길을 요구하는 사회적 신호들이다.
진보는 앞서가는 걸음을 뜻한다.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은 진보의 의무다. 지금 국내의 모순은 외면한 채 전쟁으로 밤을 새우는 바이든의 민주당이나 이민자를 적대시하며 백인종주의를 부추기는 극우 트럼프의 공화당은 답도 아니고 새 답을 낼 역량도 없다. 오늘날 이정표 상실의 혼돈시대, 미국이든 다른 어느 곳이든 새 길을 내야 하는 진보의 책임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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