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정치화는 검찰정권의 명을 재촉하는 올가미

정현주 문화연구가
정현주 문화연구가

지금 대한민국이 울고 있다. 심장에 커다란 상실과 슬픔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힌 고통을 느끼며 흐느끼고 있다. 여기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생존자가 있다. 유가족은 애도 권한을 박탈당했다. 슬픔과 절망이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 들고 있다. 삶이, 죽음이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시대다.

애도의식은 관례다. 사람이 죽으면 가족뿐만이 아니라 친밀하게 상호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애도의식을 치른다. 애도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애도가 생존자의 생존전략의 연장선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생존자는 진정한 애도의식을 통해 대상에 대한 존재의 부재로 인한 관계의 단절과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고인을 추모한다. 고인과 작별하면서 상실과 슬픔에 빠져 있던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 모든 과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일반적으로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애도는 끊임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완결된 애도란 불가능하다. 애도의식이 끝나더라도 생존자는 긴 시간에 걸쳐 반복적인 애도를 통해 고인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기억을 통해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고인을 온전하게 떠나보내는 것이 가능해야만 생존자는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욕망 유지가 가능해진다.

반면 국가권력이 죽음을 유린하면서 진정한 애도를 박탈하면 생존자는 깊은 상실과 슬픔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국가의 개입으로 진정한 애도의식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생존자는 고통을 그대로 떠안은 채 국가권력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패배의식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슬픔과 절망 속에서 트라우마를 겪고 피폐해진 상태로 삶에 대한 욕망을 상실할 수도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정치의 본질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생사여탈을 결정짓는 인간의 행위이다. 정치는 포괄적으로 생명정치의 기제 안에서 작동될 수밖에 없다. 정치와 생명‧삶은 분리 불가능한 관계다.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의미와 서사가 사적영역을 넘어 공적영역으로 확장되는 사례가 있다. 바로 정치적인 죽음이 그렇다. 정치적인 죽음이 발생하면 그 죽음은 정치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장(場)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국가가 죽음의 의미를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을 그리고 현재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대상으로 그러하듯이.

이 글은 희생자를 위한 애도가이다. 생존자에게는 생존전략 탐색서이기도 하다. 생존자가 진정한 애도가 거부당한 국면에 서있더라도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만은 상실하지 않기를 바란다. 생사여탈권을 쥔 포악한 정치세력이 날카로운 칼날을 마구 휘두르는 최악의 상황이라도 말이다. 분명 더 나은 삶을 향한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 에로스는, 그들 타나토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욕망으로 충만해 있으니까.

생명‧삶 : 조에와 비오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생명‧삶’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로 구분해 사용했다. ‘조에(zoe)’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 등 모든 ‘생명체가 단순히 살아 숨 쉬는 자연적 상태’를 가리킨다. 반면 ‘비오스(bios)’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 등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즉 ‘비오스’는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삶’ 또는 ‘문화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지칭한다. 조에와 다르게 비오스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특정한 삶의 양식을 추구한다.

따라서 ‘정치적 조에(zoe politike)’라는 말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자연적 상태의 생명’을 뜻하는 조에는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삶’을 뜻하는 비오스에 포함된다. 이 글에서 말하는 ‘삶‧생명’이란 인간이 정치적‧문화적 존재로서의 삶을 사는 ‘비오스’에 해당한다.

죽음을 관리하는 국가

검찰정권이 앞장서서 총체적으로 생명정치의 기제를 무겁게 작동시키고 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양회동 건설노동자의 죽음을 국가차원에서 개입해 미시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치적 죽음에 관해 고인과 유가족을 대상으로 한 죽음의 정치화이다. ‘정치적 죽음’이란 정치권력이 개입돼 발생한 희생을 말한다. 정치적 죽음은 권력 작동의 속성상 필연적으로 죽음의 정치화를 요구한다. 정치적 죽음에 대한 ‘죽음의 정치화’란 희생자의 행위에 대해 ‘동기의 순수성’과 ‘행위의 자율성’을 의심받게 만들기 위해 죽음을 둘러싼 정보와 의미를 직간접적으로 조작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행위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양회동 씨의 죽음은 명백하게 정치적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에 관한 담론이 공적영역에서부터 생성됐다. 고인 입장에서 진정한 애도의식이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정치적으로는 여전히 현존하는 실재 영역에서 특수하게 호명되며 존재하게 된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관례와 자신의 의지대로 애도의식을 거행할 수 없다. 정치권력이 죽음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시로 장례절차에 개입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를 조작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가족 자신이 ‘죽음의 정치화’의 대상이 됐다.

 

2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관련 야4당과 함께하는 진실행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대표 분향하고 있다. 2023.6.28. 연합뉴스
2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관련 야4당과 함께하는 진실행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대표 분향하고 있다. 2023.6.28. 연합뉴스

외상적 사건의 장소성

이태원 참사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할 점은 장소성이다. 해밀톤호텔 서편에 위치한 골목길은 참사가 발생한 현장이다. 희생자가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현장으로 이제는 정치적 장소가 됐다. 유가족이 소복을 입고 그 골목길에 누워서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유가족에게 그 사건 현장은 외상적 사건을 당한 고통스러운 장소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 생존자가 회피하지 않고 그 장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면서 겪었을 고통을 자신의 신체에 투영시키며 재현하는 애도의식으로 제의적 행위다. 이 때 생존자에게는 외상적 경험을 당한 장소성 그 자체가 비극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참사 당일 이태원 일대는 권력 시스템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마약 단속을 위한 경찰인력 수십 명이 배치됐다는 점에서 권력 시스템이 강력하게 작동됐던 것이다. 동시에 극단적으로 무정부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헬로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충분히 많은 인파가 모일 것으로 예상됐지만 시민의 안전을 목적으로 도시를 관리해야할 경찰은 부재했다. 그래서 참사 당일 이태원은 정치적으로 모순된 시공간이 됐다. 필연적으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정치적 죽음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적인 시공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 작동의 목적과 지향성이다. 마약 단속을 목적으로 배치된 경찰은 범죄자 검거라는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했다. 시민의 안전은 그들 활동의 목적 지향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기획된 도시의 무정부상태는 ‘마약사범 대거 검거’라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해 권력자가 정치적 성과를 극대화시키기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즉 국가권력에게 정치적 성과 이외의 시민의 생명 따위는 부차적인 의미만 있었을 뿐이다.

 

21일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미사를 마친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 씨의 장례행렬이 경찰청으로 향하고 있다. 2023.6.21. 연합뉴스
21일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미사를 마친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 씨의 장례행렬이 경찰청으로 향하고 있다. 2023.6.21. 연합뉴스

“건폭” 벌거벗은 생명

윤석열 검찰정권이 공식석상에서 건설노조 조합원 일반을 대상으로 “건폭(건설노조+조직폭력배)”이라고 낙인찍은 그 순간 이미 죽음의 징후가 예고돼 있었다. 이 발언을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우선 건설사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하지만 정치적 맥락에서는 권력자가 그들을 대한민국의 법치영역 경계 밖으로 추방시켜 국민의 주권 자격을 박탈해 “벌거벗은 생명” 상태로 만들어 반사회적인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법치의 대상이 아니라 응징하고 처벌해야할 반사회적인 존재가 됐다. 그들이 “건폭”으로 호명되는 그 순간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에서 정치적 망명객의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권력자가 이렇게 낙인찍어 배제하려는 의도는 타자화를 통해 건설노조 조합원들을 포섭하려는 것이다.

“건폭” 발언 이후 건설노조 조합원들의 활동은 조폭들의 활동과 의미가 동일해졌다. 조합원들의 활동은 조폭들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공갈, 협박, 사기와 폭력을 일삼는 반사회적인 행위와 다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이 양회동 씨의 조합활동이 업무방해와 공갈행위로 규정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이고 사건의 진실이다. 5월 1일 양회동씨는 “정당한 노조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라고 한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유서를 통해 양회동 씨가 노조활동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고 인식하며 참된 가치를 추구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노조활동이 법으로부터 “업무방해 및 공갈”이라는 조폭활동과 동일한 잣대로 규정 당했다. 한순간에 법으로부터 자신이 추구해 왔던 참된 가치가 조폭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몰가치적 행위로 규정당한 것이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추구해 왔던 참된 삶에 대한 가치가 부정당하고 파괴당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훼손당하고 자존감이 무너진 그는 분신을 선택하며 저항했다. 분신은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다. 결국 이 저항적 죽음은 공개적으로 “건폭” 발언을 했던 그 시점부터 예고된 정치적 죽음이었다.

죽음의 정치화의 목적은 죽음의 탈정치화

정권이 필사적으로 죽음을 관리하며 죽음의 정치화 작업에 열중하는 진정한 목적은 희생당한 죽음에 대한 탈정치화다. 죽음의 정치화는 본래적으로 정치적 죽음을 탈정치화 하려는 의도와 속성을 갖는다. 죽음의 정치화는 희생당한 죽음에 대해 ‘동기의 순수성’과 ‘행위의 자율성’이 의심받도록 기획되고 그 의도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의미를 조작한다. 권력자의 의도대로 죽음의 의미를 조작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태원 참사에 대해 “즐기다 일어난 사고”, "놀러 가서 죽은 것" 등과 같이 구체적인 발화로 드러난다.

국가권력에게는 반드시 정치적으로 희생된 죽음의 의미에 대해 죽음의 정치화라는 조작 과정을 거쳐 새롭게 가공된 탈정치화 된 죽음의 의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죽음 그 자체의 진실 된 국면만으로는 권력 유지에 자신이 없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이완되는 현상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다.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국가권력에게는 죽음의 정치화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탈정치화가 강화될수록 최고 권력자가 책임져야할 정치적 압박감을 덜어낼 수 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양회동 씨의 죽음에 대해 처음부터 국가권력이 깊숙이 개입해 죽음의 정치화 작업을 진행해 왔다. 현재까지 이들 죽음에 대한 의미의 조작화 작업은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으로 정치적 죽음에 대한 탈정치화 작업이 실패한다면 오히려 죽음의 정치화가 검찰정권의 명을 재촉하는 올가미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권에게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그러했듯이 현 정권은 숙명적으로 이들 희생된 죽음에 대한 죽음의 탈정치화 작업에서 끝까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된 셈이다.

 

폴뤼네이케스의 시체 앞에 선 안티고네. 위키백과
폴뤼네이케스의 시체 앞에 선 안티고네. 위키백과

「안티고네」를 통해 본 최고 권력자의 무도한 욕망

그리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 등을 통해 죽음의 정치화를 시도하다가 파국을 맞는 권력자의 최후를 그려냈다.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가 추방당하자 큰아들 폴뤼네이케스와 작은 아들 에테오클레스가 골육상잔 끝에 서로를 살해한다. 크레온이 최고 권력자가 된 후 폴뤼네이케스에 대해 애도뿐만이 아니라 매장까지도 금지하면서 불복종의 대가는 죽음이라며 명령을 어긴 시민은 죽이라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반면 에테오클레스에 대해서는 바른 법도와 관습에 따라 애도의식과 매장을 허락한다.

크레온의 고인에 대한 애도와 매장 여부에 관한 판단 기준은 생전의 삶이었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 대해 나라를 지키다 죽은 장수로 폴뤼네이케스에 대해서는 침입자이자 국가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로 판단했다. 이와 같은 판단이 형제의 죽음을 관리하는 즉 애도와 매장여부까지 연장됐다.

권력자의 권한과 판단의 문제

크레온은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모두에게 마음대로 어떤 법령이든 적용할 권한이 있는” 최고 통치자였다. 애초부터 그는 정치의 본질인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판단한 최고 권력자에 대해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최고 권력자는 마음대로 그 권한을 남용해도 되는 것일까. 절대 권력자의 판단은 항상 정의로운가. 아니면 지혜와 용기와 절제가 결여된 판단 오류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레온은 “분별없는 생각의 가혹하고도 치명적인 실수여!‧…아아, 슬프도다. 불행한 내 결정이여!”라며 자신의 판단이 어리석었다며 뒤늦게 한탄한다. 파수꾼은 “판단해야 할 사람이 잘못 판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라며 모든 권한을 가진 최고 권력자일지라도 판단은 항상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최고 권력자의 판단은 누군가의 생명‧삶의 경계를 결정짓는 중대한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사후 세계에도 질서체계가 있었다. 그들은 장례식을 치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사후 세계로 가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영원히 세상을 떠돌게 된다고 믿었다. 이를 모를 리 없었던 크레온은 형 폴뤼네이케스의 죽음을 ‘비오스’에서 탈구시켜 ‘조에’ 상태로 방치하길 원했다. 반면 동생 에테오클레스에 대해서는 ‘비오스’가 추구하는 가치가 존중받기를 바라며 애도와 매장을 허락했다. 폴뤼네이케스에 대해 애도의식을 박탈한 것은 그가 사후세계로 가지 못한 유령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크레온에게는 두 형제의 생전 삶과 사후 세계에 관해서 분절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열려 있었다. 즉 두 시신 모두에 대해 예를 갖춰 애도의식과 매장을 허락할 수 있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덕목은 고인이 생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 그와 무관하게 죽음 이후를 맞이한 시신에 대해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연민과 자비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왕좌에 오른 크레온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죽음의 정치화를 통한 권력 강화였다. 하지만 시민들의 욕망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즉 최고 통치자의 관용과 자비심을 원했던 것이다. 최고 통치자인 크레온과 시민들의 엇갈린 이 욕망이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결국 그의 비정한 성품과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절제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판단이 불행의 원인이 됐다.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현실 정치에서도 자주 목격 된다. 윤석열 검찰정권이 건설노동조합 조합원들을 향해 “건폭”이라고 발언할 때마다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인정받는 현상이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크레온이 원했던 정치적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폴뤼네이케스와 이스메네되기를 강요하는 검찰정권

현 검찰정권은 배제하고 추방시켜야할 벌거벗은 생명인 폴뤼네이케스로 상징되는 인물이 필요했다. 건설노조 조합원들을 “건폭”이라고 낙인찍은 이유다. 그렇지만 “건폭”이 죽음에 이르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효율적으로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배제해야할 우리 안의 타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건폭”으로 낙인찍은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신체를 훈육해 복종시켜야할 포섭의 대상이다. 양회동 씨가 분신하면서 그 훈육 과정에는 정치적 죽음을 탈정치화 하려는 의도를 가진 기획된 죽음의 정치화도 포함됐다.

안티고네의 여동생 이스메네는 통치자의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인물이다. 이스메네처럼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배제도 포섭할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면서 정치권력에 불복종하며 저항했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석굴에 가두는 징벌로 그녀가 이스메네처럼 훈육과정을 통해 순종하고 복종하는 신체가 되기를 바랐다. 최고 권력자는 불복종으로 저항하는 안티고네를 이스메네화 해서 복종하는 신체를 바탕으로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복종하는 신체를 원했던 그의 목적은 실패하고 만다.

에로스 대 타나토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에게는 응집과 통일을 지향하는 삶에 대한 사랑의 충동인 에로스와 파괴와 해체를 지향하는 죽음에 대한 충동인 타나토스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 세계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끊임없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전투의 장이다. 또한 삶과 죽음은 서로를 융합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안티고네는 삶의 본능인 에로스로 충만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오빠의 시신을 조에 상태로 방치하라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저항행위는 신의 불문율에도 부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통치자의 포고령은 자신의 가치인 에로스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크레온의 포고령이란 한낱 인간의 판단에 불과할 뿐 신들의 불문율인 천륜을 무시할 만큼 강력할 수는 없었다.

현재 검찰정권은 안티고네가 추구했던 에로스 대신 타나토스로 생명‧삶을 지배하며 우리들의 삶의 근원을 뿌리 채 뽑아버릴 기세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난 에로스의 자식들이다. 우리는 그들 타나토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욕망으로 충만해 있다. 안티고네가 그랬듯이 에로스는 타나토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이 검찰정권에게 크레온이 오이디푸스에게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매사에 지배하려 들지 마세요. 그대가 지배했던 것들도 평생토록 그대를 따르지는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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