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에서 공권력과 국민의 대치 구도를 상징
하청업체 노동자가 '귀족노동자'라 우기는 국가권력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기득권'으로 왜곡하는 언론
'노동=불법폭력, 경찰=합법폭력' 뒤틀린 대국민 홍보
한 노동자가 어떠한 보호 장치도 없는 사각형 철탑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사진 한 장이 내 폐부를 깊숙이 찌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그 노동자에게는 다가올 국가폭력 앞에서 자신을 보호할 저항 수단이라고 해봐야 양 손에 든 가느다란 철재 파이프 두 개가 전부였다. 경찰들은 카메라를 지상에서 공중에 높이 떠 있는 피사체들을 정조준하면서 사건을 기록하고 있었다. 무장경찰 다수와 노동자 한명이 대치하며 공중전을 벌였던 사건, 카메라는 그 폭력적 상황을 조용히 응시하며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해체해버린 보호망
뉴스 속 짧은 동영상은 사건의 진실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사진 속 그 피사체의 인물은 바로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 김준영 사무처장’이었다. 원래 철탑에는 엉성하게나마 보호기능을 할 수 있는 지붕과 추락 방지를 위한 철재 구조물이 설치돼 있었다. 철탑 둘레는 “하청노동자 노동3권을 보장하라! 하청노동자 쟁의권 쟁취를 위한 농성장”이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감싸고 있었다.
사건은 기습적으로 진행됐고 김준영씨가 제압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5월 31일 오전 5시를 넘긴 시각, 전남 광양시 광양제철소 앞에 있던 철탑 위의 노동자 진압을 위해 경찰과 소방대원 등 총 6명이 사다리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준영씨는 철탑에 설치돼 있던 철재 보호 장치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어떠한 보호 장치도 없는 사각형 철탑 위에서 위태롭게 혼자 서게 됐다.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7m 아래로 추락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무장경찰은 김준영씨를 삽시간에 제압했고 그는 곤봉을 맞고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지상으로 끌려 내려왔다. 사건은 그렇게 종료됐다.
현수막 문구가 말해 주듯이 이번 사건은 본사 및 하청기업과 노동자와의 사이에서 노동3권 보장 및 단체협약 등의 결렬로 파국을 맞았고 이로 인한 갈등과 대결이 핵심 사안이다. 김준영씨가 철탑 위로 올라가기까지 그 배경에는 총 6년 동안 노사가 극심하게 대립해 온 주름진 시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상상된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 중인 대한민국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은 자본과 노동 간의 대립관계에서 거대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수년간 미디어는 반복적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귀족노동자라고 명명해 왔고 그들이 기득권이라는 기호를 체계적으로 재생산시키며 확대해 왔다. 이제 그 이데올로기 작업은 완결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다른 기호들을 접합시켜 가치가 전도된 제2의 혹은 제3의 의미 군을 생산해 내고 있다.
현재는 완결된 기호체계에 다른 기호를 접합시켜 최저시급을 받는 임시직 하청업체 노동자까지도 귀족노동자라는 기호가 확대 재생산되고 일반화된 것이다. 국힘당 김기현 대표는 이 사건에 대해 “기득권층인 노동자들이 불법시위를 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말하며 임시직 하청업체 노동자가 기득권이라고 강조했다.
노동자가 귀족이고 기득권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중산층이 포섭된 지는 이미 오래 됐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우연히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스튜어트 홀은 “지배 이데올로기는 바로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세상을 경험하는 정신적 환경”이라고 분석하며 이데올로기에 대해 알튀세가 말했던 “필연적으로 상상적인 왜곡을 통해 개개인이, 생산 관계와 거기서 파생돼 나오는 관계와 맺게 되는 상상적인 관계를 자신에게 계속 재현해 준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의 중산층이 노동자가 기득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기까지는 미디어의 의도적인 반복과 수신자인 그들의 허구적 상상력과 경험 및 관계들이 접합된 과정이 있었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대중이 권력집단이 미디어를 통해 전파하는 기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수용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도가 높아지게 된다.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작동하는 몰가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
반복적으로 노동자는 “귀족”이라고 강요하며 암기시키면서 대중을 포섭하는 미디어 국면에서 수신자들은 노동자는 귀족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광범위하게 노출된다. 그들은 발신자가 송출하는 기호에 상상력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바람 빼기를 반복하며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관계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변형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인식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국면에서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기반해 생산 유통된다. 그 사건에 얼굴과 이름, 행동, 속성, 성격을 부여하며 구체적으로 행위자가 실재하며 그 사건의 영역 내에서 작동한다.
철탑 위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한 이미지 및 동영상이 보여주는 동작들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을 전달하는 것처럼 재구성되고 재현돼 사실성을 한층 강화시켜 준다. 그 결과 수신자는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현장이고 사건이라는 점을 쉽게 눈치 채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재구성되는 사건은 진실을 은폐하며 수신자에게 자극적으로 상상력을 부추긴다. 진실은 노동과 거대자본의 대립과 협상의 파국이며 이에 대한 노동자의 계급적 저항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자본을 화면 밖으로 이탈시켜 놓고 마치 노동과 국가권력이 대립하는 것처럼 사건을 재구성하고 재현한다. 즉 이탈시켜 놓은 자본은 국가권력으로 치환되고 노동과 국가권력의 대립이 사건의 본질인 것처럼 왜곡시키는 것이다.
화면 밖으로 이탈된 자본권력과 화면 안에서 악당 캐릭터 재현하기
이 사건에 대해 국힘당의 청년최고위원 정예찬은 한 마디로 노동자를 “마체테를 휘두르는 악당”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폭력에 노출된 노동현실을 영화에서 악당 캐릭터가 등장하는 한 장면으로 가볍게 치환시켜 버린 것이다. 정예찬의 발언은 국힘당 김기현 대표가 했던 발언의 의미를 확대 강화시키면서 동시에 영화의 대사를 인용해 이 사건에서 노동자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 그리고 계급성을 왜곡하면서 폭력성을 극대화시켰다.
구체성을 띠며 작동되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동안 기업들이 6년 동안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며 노동현장에서 불법을 저지른 시간들은 화면 밖으로 밀어버리고 은폐시키면서 노동자와 국가권력이 대립하는 상황이라는 현재성을 부각시킨다. 이 지배 이데올로기는 한 장의 사진이나 짧은 동영상으로 사실성을 강화시키고 구체적이지만 기만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재현된 이미지들은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아닌 노동과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는 국가권력 즉, 노동자와 경찰이 대치하는 국면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더 구체적으로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폭력성과 불법성만을 확대 강화시키면서 노동자는 악당이라는 캐릭터를 핀으로 고정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국힘당의 발언이 저항 없이 중산층에게 수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동자는 귀족이고 기득권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저시급을 받는 임시직 하청 노동자가 귀족이고 기득권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몰가치적이다.
구체적으로 공권력을 상징하는 경찰은 강박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대리하기 때문에 권력행사 과정에서 신중함과 절제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찰은 노동자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과정을 생략한다. 경찰의 폭력이 순식간에 직접적으로 행사된다. 이를 바라보는 수신자들은 공권력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비난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의도대로 자신의 상상력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재현시키는 행위에 동참한다.
폭력비판
화면 밖으로 이탈돼 존재가 배제된 자본권력 대신 국가권력이 노동자와 대치하는 상황 재현은 화려하게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경찰과 노동자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경찰의 행위는 법집행을 목적으로 한 승인된 폭력으로 분류된다. 노동자의 저항적 행위는 승인되지 않은 폭력으로 분류되며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신비한 마술 쇼는 폭력을 독점한 국가권력 그 자체인 경찰이 행사하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대신 노동자의 저항은 승인되지 않은 폭력 행사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때 지배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을 매개로 치밀하게 작동한다.
자본권력과 노동자계급이 직접 물리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면 절대적으로 성립되지 않았을 폭력에 대한 정의가 국가권력이 자본권력을 대리하면서 경찰은 적법한 폭력을, 노동자는 적법하지 않는 폭력 행사의 주체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에 노동자의 파업권이 보장돼 있다는 사실도 승인된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권력 앞에 손쉽게 잊어지게 돼 버리는 것이다.
자본의 대리인인 다수의 무장경찰과 한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비대칭적인 권력 상황에서 서로를 향해 곤봉과 쇠파이프를 휘두른다. 이 행위는 분명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설명하자면 서로에 대한 인간의 폭력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경찰이 법집행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승인된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권력과 노동자가 쇠파이프로 저항하는 그 폭력이라 불리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동일한 의미의 ‘폭력’이라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철탑 위에서 이루어진 파업은 그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위태로운 행위였다는 것을 말이다.
옥중서신
그날 지상으로 끌려 내려온 김준영 노동자는 구속됐다. 그리고 며칠 전 그가 쓴 옥중서신이 공개됐다. 그는 편지에서 150만 조합원 모두가 오를 수 있고 온 국민에게 소리칠 수 있는 넓고 높은 철탑에 올라주세요! 누구도 끌어내릴 수 없는 그 철탑에서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한 하청 노동자들이 이 땅 곳곳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고, 하청 노동자도 노동3권을 온전히 누려야 할 국민이라고 외쳐주세요”라고 썼다.
다시 한번 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몰가치적 행태를 강조하고 싶다. 정치권력을 독점한 지배계층은 노동자가 기득권이고 흉기를 휘두르는 악당이라고 재현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하게 구조화 한다. 하지만 옥중서신에서 드러나듯이 파업 중인 그 노동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다른 하청 업체의 노동자들과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며 노동3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노동자의 파업은 생존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권리투쟁인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최저임금을 받고 노동3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기득권이 바로 노동자들인 것이다.
김준영 노동자에 대한 철탑 위 공중전은 윤석열 검찰정권 하에서 공권력과 국민이 대치하는 국면을 상징하게 됐다. 며칠 사이에 경찰이 시민들에게 뒷수갑을 채우고 바닥에 엎드리게 해 놓고 신체를 유린한 채 연행을 기다리는 장면의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국가권력이 승인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상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파업현장이든 문화행사든 가리지 않고 점점 더 빠르게 반복되고 있다. 국가권력의 승인된 폭력행사가 과잉된 국면에서 국민은 언제라도 처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가고 있는 중이다. 공고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치밀하게 작동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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