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사라지고 '교육'이 사라져버려
학교폭력의 예방과 대책은 역설로 가득하다. 학교폭력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강 건너 불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유령이며 가정파괴범이고 들이닥친 산불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자녀의 학교폭력 해결과정 문제로 인해 낙마하였던 A변호사의 사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가해자의 부모가 자녀의 학교폭력에 대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대신 교육청 재심청구, 행정소송, 집행정지 신청 등 온갖 법적 조치를 동원하여 자녀의 전학을 막으려 한 것이다. 가해자는 명문대학교에 진학을 하였지만 피해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결심에 내몰렸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당시 학부모의 신분이 검찰 고위공직자로서 인권보호담당관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학교폭력문제의 해결과정에서 부모의 경제력과 권력이 개입하면 어떠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력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목격하였다.
피해자의 고통과 회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가해학생 측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폭력적 대처가 가능하다는 학교폭력의 역설에 분개하지만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넷플렉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처럼 피해자 자신의 은밀하고 화려한 복수는 언감생심이다. 오히려 우아한 거짓말의 피해자 어머니 류현숙(김희애 분)의 역할이 현실적일 뿐이다. 피해자의 자력에 의한 성공적 복수는 그 부모가 데스위시의 브루스 윌리스 혹은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학교폭력 상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역설은 피해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모두 가해자에 대한 분개와 처벌에 초점을 맞추느라 정작 피해자의 회복과 상처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못한다. 학교폭력의 해결과정에는 교육적 고려가 아니라 사법적 처리 과정과 부모의 경제력 차이가 큰 영향을 끼친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었을 때, 그 당시 부모의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총체적 역량이 해결과정에 대한 개입량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그 부모를 포함한)의 총체적 동원 자산의 차이가 심할 때 가해자는 더욱 대담해지고 피해자의 방어력은 약해진다. 학교폭력이 단위학교의 학교폭력 전담기구를 거쳐 교육지원청의 학교폭력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로 넘어가면 가해자에게는 화해와 용서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진다. 몇 호 처분이 주어질 것인지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공권력이 피해자를 대신하여 화해와 용서의 과정을 대신 하거나 가로막는 경우도 발생한다. 피해자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학교폭력 해결과정에서 두 번째로 사라지는 것은 교육이다. 학교폭력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교육적 해결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막상 사회적 이슈가 되거나 심각한 정도의 폭력으로 규정되어지면 교육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법이 삐집고 들어온다. 처음에는 문틈으로 슬며시 삐집고 들어왔지만 이제는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선다. 이 과정에서 사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사회적, 경제적 강자이자 기득권 층일 경우가 많다. 특히 사법적 조력은 가해자 편에서 더욱 더 필요로 하고 초기부터 적극적인 활용의 유혹을 받는다. 학교에서 교육보다 사법적 처리과정이 더욱 더 힘을 떨치게 된 것은 학교와 교육당국 자체의 책임이 크다.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과 매뉴얼에는 교육적 해결과 사과와 용서를 통한 화해의 길보다는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법률적 지뢰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교사들을 보호해 주는 장치가 부족한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넘쳐난다.
학폭 경험, 소수의 가정에서만 건강한 성장으로 이끌어
학교폭력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 번째 역설은 가족 안에서 발생한다. 자녀의 학교폭력 사안에 대해 보다 더 크게 분개하고 흥분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문제를 확대하는 부모가 자녀를 더 사랑하는 부모라고 치환되는 역할극이다. 평소에 대화가 없던 부모도 자녀가 학교폭력의 피해 혹은 가해 학생이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동맹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되는 전략과 전술의 대부분은 자신의 학창 시절의 경험에서 빌려오게 된다. “문제 학생 뒤에 문제 부모가 있다”라는 오랜 속언처럼 경험의 빈약함과 심리적 여유 없음은 교육적 해결보다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는 대리 결투로 환승된다. 이 경우 아이들은 이미 화해를 하였건만 그 부모들의 격분은 상대방 부모의 예의 없음과 겸손하지 못함으로까지 확대된다. 상대방의 인성교육을 바로잡겠다는 응징을 통해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과잉의무감이라는 호랑이 등에서 좀처럼 내려 올 수 없다.
많은 가정에서 학교폭력을 경험하기 전보다 그 가정은 더욱 더 폭력적인 문화에 지배되어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가족은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유지한다. 자녀들은 문제 해결과정에서 불필요한 분노와 증폭된 증오심과 상대방에 대한 미움(악마화)을 극대화하는 훈련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가정(족)에 대한 신뢰 역시 서로에게 심각하게 훼손된다. 이 피해가 맨 처음 일어났던 학교폭력에 의한 1차 피해보다 훨씬 더 크고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은 간과된다. 하지만 소수의 가정에서 학교폭력의 경험은 오히려 가족관계를 재구조화하여 건강한 성장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그 부모가 건강할 경우 학교폭력의 경험은 오히려 가족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가정을 최우선 순위에 자리매김하여 건강한 가족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폭력 과정에서 일어나는 네 번째 역설은 용서의 역설이다. 폭력의 해결과정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진심어린 뉘우침과 사과를 통해 용서를 베푸는 과정에서 심리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충분히 뉘우치지 않았음에도 피해자가 용서를 하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이른바 ‘용서폭력’이 난무하게 되어 피해자는 용서를 쉽게 결심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괴감을 가지고 자책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용서의 훌륭함을 강조하는 주변인들에게는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먼저 진심으로 공감하였는지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섣부른 용서, 특히 용서의 강요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된다. 용서의 전제 조건은 피해자가 용서를 할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준비에는 가해자의 진심어린 뉘우침과 사과, 용서 구하기가 필요하다. 이 때 피해자는 비로소 용서를 수용하고 용서 베풀기를 선택함으로써 부수어진 마음(broken-hearted)이 깨치고 열려서(broken open) 성장하게 된다(파커 파머,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필자는 이것을 학교폭력후성장(Post Traumatic Growth in School Violence:PTGS)이라고 부른다(이동갑 외, 2022, 학교폭력의 새로운 패러다임:공감∙용서∙회복∙성장).
학교에서 학교폭력은 3D 업무
학교폭력에서 일어나는 다섯 번째 역설은 학교폭력 담당자의 역설이다. 학교의 업무 중 가장 꺼리는 업무가 학교폭력 업무이다. 따라서 이 업무는 학교에서 가장 힘이 없거나 신규교사 혹은 전입을 와서 해당학교의 사정과 학생들에 대해 잘 모르는 교사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폭력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는 단위 학교에서 가장 경험 많고 학부모와 학생들을 중재할 수 있는 품성과 기법을 갖춘 교사여야 할 것임에도 대부분의 경우, 학교에서 학교폭력은 3D 업무가 된다. 이는 교육(지원)청의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학교폭력 업무는 인턴 혹은 신규 장학사의 업무가 되거나 그나마 자주 바뀌는 업무 중의 하나이다. 교육부에는 현재 학교폭력을 전담하는 과조차 없다. 현재 학교폭력 업무는 교육부 학생생활문화과 내에서 학교폭력을 대응하는 팀으로 존재한다. 소수의 행정 사무관과 주무관들이 대한민국 학교폭력 업무를 전담한다(2012년 4월 17일에 만들어진 '학교폭력근절과'가 2013년 3월 23일 '학교폭력대책과'로 바뀌었고 2015년 1월 6일 직제개편에서 폐지되었다). 교육부에 담당과가 없으니 시∙도교육청에서도 담당과가 없다. 학교폭력의 예방과 대처를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고 최고의 전문가를 배치하며 이를 위한 예산과 인력을 배치하여야 한다.
학교폭력의 과정에서 여섯 번째 역설은 ‘학교폭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더 큰 폭력들인 교육제도의 폭력, 교육과정 운영의 폭력 등 교육시스템에 의한 폭력을 감추어 주는 것이다. 특히 학교폭력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제도적 폭력 즉, 69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폭력으로부터의 시선을 강탈한다. 학교폭력에 관한 한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자신의 진정성이 가득한 경험에 소신을 더하여 울분을 토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분노를 소비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엄벌주의는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합법적이고 더 큰 폭력으로 학교폭력에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폭력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평화교육이다. 공감교육을 통해 폭력이 일어나지 않고 화해와 용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가해자도 학생이므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며 피해자와 화해할 수 있도록 변화시는 교육이 필요하다. 가해학생의 부모에 대한 교육도 필수적이다. 관련학생들이 관계를 회복하여 크고 작은 갈등이 오히려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에너지를 전환하는 것이 교육이다(이동갑∙유경희, 2021, 학교폭력을 넘어:외상후 성장으로).
교육시스템에 의한 더 큰 폭력 감춰버려
학교폭력 문제 해결과정의 마지막 역설은 담당자들의 전문성에 대한 검증이 부실하다는 역설이다. 학교폭력 사안을 처리하는 단위 학교 담당교사가 그 학교에서 학교폭력의 가장 전문가인가? 특히 학교폭력 사안을 교육지원청의 ‘학교폭력심의위원회’에 보낼 것을 결정하는 1/3이상의 학부모 위원과 교원 위원들의 전문성이 충분한가? A 변호사 아들 학폭 사건 처리과정에서 B고등학교의 전담기구 위원들과 만장일치로 학교폭력 사안을 삭제하기로 결정한 C고등학교 위원들의 전문성은 믿을 수 있는가? 단 한 명의 학부모를 제외하고는 전학 취소를 결정하였던 D 교육청의 ‘학교폭력심의위원회’ 위원들은 어떠한 전문성으로 그 회의에 참석하였을까? 이 분들의 전문성을 향상하고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는지 검증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담임교사가 자신의 교실에서 일어난 일을 사과와 화해, 용서와 회복을 통해 교육적 해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결심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 학교장 해결제를 하고자 하여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전문가가 주변에 있는가? 피∙가해학생과 그 부모를 모두 아우르는 준비된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가?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곳에 교육적 해결을 지향하는 가슴 따뜻한 위원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라.
다행히 국무총리실이 보도한 보도자료(2023. 4. 12)에 의하면 모든 교육청에 “(가칭)학교폭력예방∙지원센터”를 설치하여 학교의 사안처리, 피해회복∙관계개선, 법률서비스 등을 통합적으로 지원하기로 발표하였다(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이 곳에 최고의 인력과 지원을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당장 수 많은 전문가들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전문가를 기르고 재교육하기 위한 시스템을 정비하여야 한다. 필자는 오래전 학교폭력 분야의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폭력 대학원 대학교’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고 석∙박사 과정의 과목을 제시한 바 있다(이동갑∙유경희, 2021, 학교폭력을 넘어:외상후성장으로, 120~126). 새로운 기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전문가를 양성하여 배치하고 운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준전문가들에 의한 주변 전문가들이 판을 장악하면 진짜 전문가들은 들러리를 서기보다 조용히 물러난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
국무총리실이 2023. 4. 12자로 발표한 학교폭력 대책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학생부 보존기간을 연장하고 대입 반영을 확대하며 조치 기록을 삭제하려면 피해학생의 동의가 필수적이어야 한다. 피해자에게 가해학생 분리요청권을 부여한다. 앞의 3가지는 발생한 학교폭력에 대한 대처이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생략되지는 않았는가? 교육청에 ‘학교폭력예방∙지원센터’를 설치하여 학교현장을 지원하고 체육·예술교육 및 사회·정서 지원으로 학교폭력 예방 강화하는 것은 예방이다. 1개 학교당 평균 20개의 학교스포츠클럽을 확대하고 학생 예술동아리 지원도 확대하는 것이 근본적 변화를 유도하고 견인하는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학교에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는 한가? 23만 5880개의 스포츠 클럽을 운영할 지도자들은 학교폭력 예방 인성교육의 전문가들인가?
지금도 매년 2~3억 명이 감염되고 수백만 명이 사망하는 법정 전염병인 말라리아가 있다. 말라리아를 치료하기 위해 모기약을 개발하고 그립감 충만한 전기 모기채를 보급하고 모든 가정에 모기장을 배부하기보다는 더러운 물웅덩이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모기의 유충인 장구벌레가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없애는 것이다. 폭력이라는 장구벌레가 서식하지 않도록 공감을 교육하여야 한다. “폭력을 다룬다는 것, 폭력으로 다룬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을 확립하는 인류학적이며 본질적인 교육의 임무이다”(로제 다둔, 2006). 학교폭력에 대한 예방 교육이 가해자의 처벌을 강화하거나 생기부 기록 기간을 늘리는 것보다 평화교육, 비폭력교육, 공감교육을 통해 가해자가 되지 않고, 방관자가 아닌 방어자가 되도록 태도를 바꾸는 결단의 연습이 필요하다. 공감은 머리로만,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두 함께할 때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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