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의 사회학, 더 비기닝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학교폭력과 그에 대한 복수를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가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최근 제2대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었던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국민의 공분을 사 낙마하였다. 정순신 아들의 학교폭력은 사회적 강자들의 배제를 통한 계급적 구별짓기가 폭력의 형태로 극단화되어 나타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법이 그 폭력의 부당성을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여론의 악화를 의식한 윤석열 정부는 정순신을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시키고 부랴부랴 학교폭력 기록이 있는 사람에게 대입과 취업에서 불이익을 주는 정책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왕에 시행되어 오던 정책들로 딱히 새로운 건 없다. 윤석열 정부는 정순신 아들의 학교폭력과 그것을 덮는 법 기술을 개인적 일탈과 정책적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가려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나날이 질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가 그렇게 마냥 덮고 가도 되는 문제일까? 그러기에는 학교폭력 문제를 나날이 악화시키는 낡은 교육시스템과 학교폭력에 반영되는 사회적 갈등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사회 갈등이 투영되고 교육시스템이 악화시키는 학폭
학교폭력은 양적으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저학년에서 많고 중학교 고학년,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적어진다. 학폭 피해를 당한 적이 있느냐는 설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2022년의 경우 ‘초4, 5, 6학년은 각각 5.5%, 3.5%, 2.2%’ ‘중1, 2, 3학년은 각각 1.2%, 0.9%, 0.5%’ ‘고1, 2, 3학년은 각각 0.3%, 0.2%, 0.2%’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적어진다. 하지만 질적 양상은 반비례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악화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저학년의 학교폭력이 대체로 청소년기의 자기 정체성의 불안정에서 비롯되는 우발적인 성격이 크다면, 중학교 고학년과 고등학교의 학교폭력은 다소 의도적으로 자기 정체성의 불안정에 뿌리를 두면서도 사회적 문제를 반영하는 측면이 크다. 학교폭력 문제의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그 기반이 되는 청소년기 자기 정체성의 불안정과 학교폭력과의 관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실붕괴, 왕따, 학교폭력 등 단어는 80년대까지는 우리사회에 없었거나 있어도 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단어가 아니었다. 이 단어들이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X세대가 등장하여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에 열광하던 93, 94년 무렵이다.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교실붕괴, 왕따, 학교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하며 이 단어들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왜 하필이면 90년대 초에 왕따, 학교폭력, 교실붕괴가 심각해지며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것일까? 그것은 X세대라는 신세대의 등장, 즉 90년대 초 4, 5년 사이에 일어난 아이들의 질적 변화와 관련이 깊다.
우연히도 1500여 명의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89년에 해직되어 아이들이 놀라운 질적 변화를 보이던 시기에 학교 밖에 있다가 94년에 복직이 되었다. 복직한 교사들은 한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상당수의 복직교사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아이들 좋아하는 선생이 아이들에게 돌아갔는데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89년에 교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과 전혀 다른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들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그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하나 분명한 것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아이들과 소통경험이 많은 선생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들이 아이들과의 소통이 단절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전반적으로 교사와 학생 간의 소통이 단절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할 수밖에 없었다. 교사와 학생 간 소통의 단절은 교육의 사활이 걸린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육은 최종적으로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에 의해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시기 청소년들에게서 시작되었던 머리 물들이기 문화를 고리로 아이들의 변화가 어떤 것인지 왜 변한 것인지를 추적했었다. 그 추적하는 과정까지 얘기하자면 별도의 긴 글이 필요할 것이니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을 빌려 결론만 이야기하겠다.
몸의 가치와 정신적 가치, 무엇을 높게 평가하는가의 차이
푸코는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와 같이 인간의 몸, 즉 육체 노동력을 통제할 필요성이 큰 시대에는 정신적 가치는 높게 평가하고 몸의 가치는 낮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의식구조가 형성된다고 했다. 그래야만 인간의 몸을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8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이 파업을 했다고 하자. 관리자는 여공들에게 “정신적 가치는 높고 몸의 가치는 낮으니 육체노동을 하는 너희들은 싸게 받는 게 맞고, 육체노동을 하는 너희들은 정신노동을 하는 나의 말을 잘 듣는 게 맞다”는 논리를 펼 것이다. 정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몸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산업화 시대 여공들은 관리자의 논리를 반박하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순응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산업화 세대인 우리들의 의식구조는 미셸 푸코가 말한 대로 정신의 지위는 높고 몸의 지위는 낮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식구조를 가지면 자기 몸을 매체로 자기를 표현하는 문신과 같은 문화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유럽 중세에 이런 문화는 이교도나 악마 추종자의 표시로 취급되었고 산업사회에서는 범죄자나 사회적 일탈자의 표시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90년대 초 머리 물들이기가 신세대의 청소년 문화로 등장하여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신세대들이 머리 물들이기를 문신과 같이 자기 몸을 매체로 자기를 표현하는 문화를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문화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의식구조에서 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정신의 지위가 낮아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뜻한다. 90년대 초 4, 5년 사이에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산업화세대와 반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이들에게서 그러한 의식구조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90년대 전후로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지식기반사회,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지식기반사회에서 큰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지식노동이기 때문에 ‘몸–육체노동력’을 통제할 필요성이 산업사회에 비해 현저히 적어진다. 또한 소비사회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광고의 메시지는 “몸의 욕구는 중요하니까 잘 채워야 해, 그걸 얼마나 고급스러운 브랜드로 채우는가가 너의 가치를 결정해”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몸의 지위가 높아지고 ‘머리=이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지식기반사회 아이들의 의식구조 변화
산업화 세대와는 반대로 아이들의 의식구조에서 몸의 지위가 높아지고 ‘머리=이성’의 지위가 낮아지는 변화가 일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아이들이 학교시스템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근대산업사회 학교시스템은 “몸의 욕구는 천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에 의해 늘 감시 통제되어야 한다”는 산업화 세대 의식구조를 그대로 제도화해 놓은 것이다. 학교시스템에서 ‘국가-학교장-교사’는 ‘머리=이성’에 해당하고 학생은 몸에 해당한다. 이것이 근대산업사회의 훈육교육이다. 산업화 세대는 학교 시스템과 자신의 의식구조가 똑같기 때문에 학교교육에 상대적으로 잘 적응했다. 하지만 의식구조에서 몸의 지위가 높아지고 ‘머리=이성’의 지위가 낮아진 아이들은 학교의 권위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화된 가치와 취향이 획일적인 시스템과 맞지 않기 때문에 학교 시스템과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정면충돌로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 교실붕괴이다.
자기 정체성은 인정을 받기 위해 모델이 되는 아버지 교사 등 어른의 욕망을 자기 욕망으로 가져오면서 형성된다. 의식구조에서 ‘머리=이성’의 지위가 높은 산업화 세대는 모델의 권위를 잘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 형성이 상대적으로 쉽고 정체성이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식구조에서 ‘머리=이성’의 지위가 낮아진 아이들은 모델이 되는 어른의 권위를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 정체성 형성이 어렵고 정체성이 유동화되어 불안정하다. 왕따는 유동화되어 불안정한 자기 정체성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고정시켜 안정화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반에서 노스페이스 파카를 입지 않은 구성원을 왕따시키면 노스페이스 파카를 입은 나머지 구성원들은 극히 부분적이지만 단일한 정체성을 획득하여 일시적으로 자기 정체성이 안정되는 듯한 효과를 얻는다. 하지만 이 효과는 말 그대로 일시적이어서 왕따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다른 대상을 찾아 반복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자기정체성이 불안정하면 불안정할수록 폭력적 양상을 띠게 된다.
보면 개별적 학교폭력의 책임은 가해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돌아가지만 전체적인 학교폭력의 책임도 아이들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들의 의식구조 변화는 본격적인 지식기반사회, 소비사회로의 진입이 가져온 객관적인 변화이고, 싫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전체적인 학교폭력의 책임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책임은 변화를 못 따라가 변화된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자기 전개를 가로막고 왜곡시키는 낡은 학교시스템, 낡은 사회시스템, 낡은 산업사회형 의식과 관행에 있는 게 아닐까? (<‘더 글로리’의 사회학, 진정한 왕의 귀환>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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