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 공고화 넘어 과거를 바꾸고, 도덕률을 바꾸려 한다

지난 26일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 추모식은 어느 해보다 비통한 분위기였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빈 무덤(허묘) 앞에서 올리는,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라고 했던 안 의사의 유언을 지켜주지 못한 죄스러움과 자책은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올해의 추념에는 더욱 지극한 비감이 서려 있었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제 그만 고집 부리시고 고국으로 돌아오라”고 통절하게 얘기했지만 100여 년간 타국의 구천을 떠도는 의사의 유해를 찾는다고 한들 안 의사의 혼백이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 2023년의 대한민국에 돌아오고 싶어 할 것인가.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 추모식' 행사장에 안 의사를 추모하는 대형 현수막이 놓여 있다. 2023.3.26 연합뉴스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 추모식' 행사장에 안 의사를 추모하는 대형 현수막이 놓여 있다. 2023.3.26 연합뉴스

이미 안중근의 이름으로 안중근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행해지고 있지만,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일본의 무도한 주장이 일본이 아닌 한국인들에 의해서 나오는 일이 조만간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미 일장기가 서울의 도심에서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펄럭이는 초현실적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2023년 대한민국 3월의 풍경이다. 대일 굴종과 예속을 선도하는 망언과 망상과 망동이 고개를 쳐들고 있고, 서울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이 그 같은 굴종과 망언들을 ‘미래로의 결단’으로 칭송하고 있다. 다른 어디보다도 언론이, 그리고 다른 어느 언론보다도 대한민국을 이끄는 신문 조선일보가, 그 굴종과 굴욕의 현실을 선동하고 응원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벌이고 있는 일이며, 대한민국의 언론이 벌이고 있는 일이며, 언론을 이끄는 신문 조선일보가 벌이고 있는 일이다. 대일본 굴욕과 굴종의 길로 치닫는 윤석열 정부에 대해 3월 내내 친윤 친일 보도를 쏟아내며 조선일보가 앞장서고 있는 일이다.

'3.1절의 자식' 조선일보의 배신

1910년 3월 안 의사 순국으로부터 113년, 2023년 해방된 지 77년이 된 대한민국의 현실, 그 기막힌 일들이 다른 때도 아닌 3월인 것에 역사의 아이러니, 통분스런 아이러니가 있다. 자주독립을 선언했던 3.1절과 안 의사의 순국이 있었던 3월에 이 절통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3월의 자식’인 조선일보가 벌이고 있는 일이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더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3월생(1920년 3월 5일)이다. 그것은 창간일이 그렇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 탄생이 3.1절의 결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조선일보는 3.1절 한국 민중의 저항에 놀란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내 준 선물이었다. 문화통치가 한편으로는 강압과 탄압이었지만 다른 한편 회유였던 것의 한 선물이 조선일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의 통치전략에 따른 당근책이기 전에 먼저 조선 민중의 피와 희생으로 얻어낸 쟁취였다. 조선일보는 3.1운동을 아버지로 둔 3월의 자식인 것이다.

태생에서부터 그 모체가 된 대정실업회의 이름이 일본 천황의 연호인 대정(大正)을 딴 데서 보여주듯 출발부터- 몇 년간의 예외적인 사회주의 논조를 제외하고- 친일 행각으로 일관했던 것이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기가 막히는 것은 '3.1운동의 자식' 조선의 배신보다도 그 배반과 패륜이 한 번도 단죄되지 않고 오히려 보상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 전도된 현실의 하나는 박정희 정권에 의한 굴욕적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차관이 조선일보 일가에 주어져 코리아나 호텔의 건립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일본 황군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와 친일 언론 조선일보 간의 독재정권에서의 권언의 추악한 유착이었다. 서울 한복판을 관통하는 세종대로 보도 앞으로 비죽이 내민 이 건물의 오만은 죄과에 대해 징벌 대신 포상을 받은 그 득의양양의 표정에 다름아니다. 

면면한 조선일보의 친일과 독재에의 유착은 지난 수십 년간의 강철동맹에서 이제 한층 더욱 굳건해지고 있다. 지난 3월 한달간 펼쳐진 권력의 폭주의 한 양상은 TV조선과 관련된 방송통신위원회에 대한 집요한 수사와 구속으로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방송 장악과 함께 특히 조선일보에 대한 불이익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의 협박이며 선포와도 같다. 

이 같은 공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권언동맹으로 기득권을 공고화하는 것, 그럼으로써 영구지배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지금의 유착과 공세는 단지 그에 머물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21세기의 황국 신민'으로, '정신적 식민지'로 지배하려 하려는 것이다. 일제의 총칼 대신 펜이라는 칼로 한국 국민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정신적 식민지'로 영구지배 전략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권력의 강고화, 그것이 아니다. 그보다 한국사회를 향해 조선일보가 시도하고 있는 것의 진정한 본질은 '새로운 윤리학'을 쓰려고 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윤리학의 내용은 '순응하라'는 것이다. 불복종은 포기하라는 것이며,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며, 숨 죽이고 살라는 것이다. 힘 있는 것이 정의이며 이기는 것이 정의다, 라는 새로운 정의의 기준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반인간적 보도에서 보였듯이 지난 세월호 참사 때 그랬듯이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구경거리로 즐기라는 것이 이 새로운 윤리의 끔찍한 교리다. 

이 새로운 윤리학은 그러나 그것이 근원적으로 결코 윤리가 될 수 없는 것이어서, 차라리 윤리의 폐기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새로운 윤리학이 아니라 윤리 자체를 없애려는 것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조선일보가 제시하는 한국사회의 미래다.

자연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흐르지만 인간의 현실에서의 시간은 많은 경우 오히려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어떤 미래를 그리느냐가 역으로 과거를 결정 짓는 것이다. 2023년 3월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100년 전으로 되돌아가 1919년 3월, 1910년 3월에 있었던 일을 바꾼다. 미래가 현재를 바꾸고 다시 그것이 과거를 바꾼다.

2020년 3월 5일 조선일보는 창간 100년 사설에서 “지난 100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 '비장한' 말은 지난 100년간의 승리의 개가이자 다음 100년간의 승리의 호언이기도 했다. 지난 100년이 무엇이 될 것인가. 그것은 한국사회가 다음 100년을 어떤 미래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미래와 과거가 어떤 미래, 어떤 과거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인 것이다. 2023년 3월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한국사회의 응답을 지난 100년의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박하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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