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발안 국민투표, 그리고 국민법관
걸으면서 체험했던 대만 사회의 강점
대만은 지금 민주주의 꽃 피우는 중
중국, 무력 점령한다면 인류의 손실
2017년 여름, 타이페이에서 카오슝까지 약 360km를 걸어간 적이 있다. 대학에서 해직되고, 핵 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서울에서 로마까지 걸어간 생명탈핵실크로드의 순례 도중이었다.
촛불혁명 직후여서인지 대만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칭찬하면서 나그네를 환영해주었던 기억이 뚜렷하다. 당시 느꼈던 대만 사회의 장점, 그리고 최근의 민주주의 발전을 함께 반추해본다.
지진과 탈원전
대만은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서 그런지 일본 못지않게 지진이 잦은 나라다. 1999년 진도 7.6의 큰 지진으로 수천 명이 희생됐고, 2016년에 진도 6.4의 지진이 발생해 14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2017년 5월에도 진도 5.0의 큰 지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국민투표로 탈원전을 실현시킨 나라다. 순례 도중 대만국립대학에서 그들의 경험을 듣는 세미나를 가졌다.
대만 탈원전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일찍이 제4기 원전 건설을 두고 갈등을 빚던 대만에선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하면서 제4기 원전건설이 중단된다. 2012년 3월에는 타이베이, 타이중, 가오슝에서 약 22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2014년 국민당 정부가 제4기 원전을 시운전하려고 하자 4월 타이베이에서 약 5만 명의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했다. 총통부 점거까지 시도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시 마잉주 총통과 민진당 쑤전창 주석은 영수회담을 개최하여 제4기 원전 건설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합의했다.
그래서 2016년 총통선거에서 2025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운 민진당 차이잉원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8년에는 원전 재추진 여론이 일시적으로 고조되었으나, 최종적으로 2021년 12월 국민투표에서는 ‘제4원전 가동’은 반대가 찬성보다 약 45만 표 많아 결국 2025년 5월에 마지막 원자로를 폐쇄하였다. ‘원전 없는 나라’로 재탄생한 것이다.
국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한 탈원전의 역사
당시 그들의 처절했던 투쟁 역사를 들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세상일은 그저 되는 것이 없다. 원전의 건설은 자본의 힘으로 추진된다. 그런 힘을 막아내는 시민들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꾸어내고자 하는 열망과 내부 에너지에도 좌우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열망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장치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 대만의 투쟁과정에서 눈여겨볼 것은 여야 합의에 의한 국민투표로 탈원전 여부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원전(핵발전소)은 당대와 미래세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국가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시설이다. 이를 수용할지에 대한 의사결정의 권한은 단임 정권이 임의로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버겁다. 정권교체에 따라 좌우될 정책이 아니다. 이 문제는 독립적으로 국민이 직접 의사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대만의 국민주권 의사결정능력 돋보여
요즘 세상은 개인능력이 커진 데다,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의사결정의 대상과 기회의 총량이 증대하고 있다. 권력의 총량도 비례하여 커지고 있다. 이를 제대로 다룰 의사결정시스템으로 개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특히 자본의 힘이 민중을 압도하는 현대에서 삼권분립 정도의 대의제(代議制) 민주주의는 거의 모든 의사결정영역에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대리운전’과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시대의 요구에 걸맞은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라는 의사결정시스템이 그 성공적인 솔루션이다.
중요한 정책은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것, 이것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의 민주주의 선진 국가들이 행하는 방식이다. 대만도 이 대열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만은 2017년 국민투표법을 개정하면서, 국민발안이 성립되는 요건을 선거인의 1.5%만으로도 가능하도록 바꾸었다. 종전에는 5%였던 것이 대폭 낮춰진 것이다. 국민투표의 성립요건과 결정요건도 합리적으로 손을 봤다. 그 이후 주요 정책은 모두 국민투표로 결정하고 있는 중이다. 대만은 길을 제대로 찾은 것이다. 여기에 우리와의 차이가 있다. 대만은 민주주의 운영에선 선진국인 것이다.
우리는 과거 1954년 헌법에서 유권자 50만 명이면 발안을 할 수 있도록 했으나, 1972년 유신헌법 때 삭제된 후로는 아직 복원하지 못했다. 이젠 국민주권시대답게 하루빨리 국민발안제를 부활할 때다. 개헌으로 바로잡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 이전에라도 대통령이 국민의사를 묻는 일반 입법으로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금융공유부를 회수하고 있는 대만토지은행
대만에서의 또 하나의 인상적인 만남은 대만토지은행이었다. 한국에는 없는 토지은행이다. 대만은 일찍이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입각한 토지정책이 세련되게 발전해온 편이다. ‘대만토지은행’은 그 산물이다. 1945년에 정부에 의해 설립된 이 은행은 헤드오피스가 30개, 지점이 150개, 해외지점이 8개나 있는 방대한 조직이다. 기능을 살펴보면, 토지금융채권 발행 업무가 주된 업무의 하나다. 즉 토지매입의 재원을 일반채권을 발행해 조달하고 있다.
중요한 업무는 부동산신탁과 대출업무로서, 대출은 목적에 따라 더욱 세분해 운영하고 있다. 즉 대만은 토지은행 기능을 일반금융에까지 확대, 일반은행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사기업인 영업은행이 화폐발권력을 갖도록 해주고 있다. 한국은행이 직접 화폐를 발권하기보다 사기업이 부동산담보로 대출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화폐발권을 지급준비율로 보증해줌으로써 기형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원금 상환 후에도 이자수입은 사기업에게 고스란히 안겨주는 식이다. 한국은 국가은행의 신용으로 창출된 이자수입이라는 ‘금융공유부’가 사기업의 호주머니로 독식되고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다. 그 크기가 워낙 엄청나기 때문에 2023년 이재명 당대표가 ‘횡재세’라는 명목으로 회수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대만토지은행은 그 자체가 공공은행이므로 이자 수입이 공공에 귀속된다. 지금까지 날로 번창해온 이유다. 기득권의 독식이 공공부문으로 전환되는 장치를 일찍이 가동해온 것이다. 이 장점을 제대로 검토하고 우리도 실체화해야 한다. 시급한 과제다.
국민주권자가 민주주의를 구현케 하는 젊은 IT 수장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만의 첫 디지털 장관(2016-2024)이자 현 사이버 대사인 오드리 탕이라는 젊은 인물도 인상적이다. 20대의 나이에 이미 자유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분야의 선구자로 떠오른 오드리 탕은 2014년 시민들의 대규모 현장에서 인터넷 케이블을 연결하고 트위터를 통해 국회 점거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광장민주주의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갔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온라인에서 토론하고 정책 대안을 직접 제시하며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면서, “디지털 기술이 집단 지성을 통해서 발휘되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고정된 제도가 아니라, 시민 모두가 참여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모두 디지털 민주주의의 공동 창조자이고, 기술은 사회적 신뢰와 투명성을 높이므로, 시민이 정책 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과 정책은 두 번의 촛불혁명 후에도 대리운전과 같은 대의제에 머물러 있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우리는 이런 젊은이를 배출한 대만 민주주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면서, 앞으로 대만의 직접민주주의 진화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국민법관제 도입으로 주권자 국민의 사법주권 확립
그런 가운데 대만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던 사법개혁의 물꼬가 최근 수년동안에 이루어졌다는 소식도 접한다. 2020년에 입법 발의된 국민법관제가 2023년에 드디어 발현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재판원(시민법관) 제도를 본뜨면서도 좀더 적극적인 취지를 담은 것이 국민법관제이다. 중대범죄엔 전문법관 3인에 국민법관 6인으로 재판부를 구성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런 참심제는 독일이 시행해온 것인데, 대만의 국민법관제는 여기에 미국의 배심제의 장점까지 감안한 듯하다.
대만은 국민의 사법주권에서도 진일보하고 있다. 우리에게 닥친 사법개혁의 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중국의 대만 무력점령은 인류의 손실 – 연대와 공생으로 풀어가길
대만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주주의를 선보이고 있다. 이런 나라를 무력점령한다 하더라도 중국은 결코 대만사회의 마인드를 지배할 수 없다. 대만은 그 자체로 지구촌의 모범국가의 하나다. 이미 양국은 실질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북경 표준중국어가 대만에서 통용되고 있고 대만 TSMC의 반도체를 매개로 중국경제와 긴밀한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있는 대만이 만약 무력에 의해 점령당한다면 인류차원에서 커다란 손실이다. 침공 없이 ‘하나의 중국’으로 평화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중국정부가 그동안 지향해온 바와 일치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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