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경제 아닌 신학이라 깨우친 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는 도시를 피하고 농촌을 돌아다녔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말을 예수처럼 경청하는 종교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 예수를 종교 지배층과 정치 지배층은 불편하게 생각했고, 예수의 처신을 지배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가르치고 실천했던 예수, 그를 싫어했던 사람들
예수는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가르친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유다 사회에 가르침은 부족하지 않았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예수는 실천에서, 특히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백성을 개돼지로 보며 무시하던 지식인 종교인과 크게 달랐다.
예수가 전혀 새로운 가르침을 세계 최초로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 가르침의 대부분은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 로마 철학과 종교에 이미 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도 예수의 가르침에 연결되는 사상은 풍부했다. 예수의 가르침이 아주 새롭다기보다 이미 있던 가르침을 잘 표현하고 해설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이 일치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예수에게 분노했던 사람이 아주 많았다. 왜 그랬을까. 가르침과 실천이 일치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사회에서 예수 같은 사람은 금기가 된다. 금기를 깨뜨리는 사람은 그 자신이 금기가 된다. 예수가 악행을 했거나 나쁜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박해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이 일치했기 때문에 예수는 종교 지배층과 정치 지배층에게 미움 받았다. 돈에 대한 생각에서도 예수는 종교 지배층과 정치 지배층의 생각과 크게 달랐다.
부자는 행복할까?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열 1위는 돈, 서열 2위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으로 하느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부자들도 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설교하는 종교인들도 있다. 부자들은 하느님께 정말로 사랑받는가. 부자들은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있는가. 예수 믿는 부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질문이다.
어떤 부자가 예수에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라고 답했다. 부자는 그 말씀을 듣고 몹시 근심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라고 말했다(누가 18,18-25 요약).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자들은 행복할까? 예수는 부자들은 행복하다고 말한 적 없다. 부자들은 하느님께 사랑 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부자들은 돈에서 얻은 행복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사랑 받지 못한다. 부자들은 돈을 택하고 하느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느님께 사랑 받지 못한다.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택하고 또 하느님을 선택한 부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부자들을 택하지 않는다. 부자들이 하느님을 짝사랑할 수 있지만, 하느님은 부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예수는 선언했다.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기는 비법은 우리 지구에는 없다.
부자들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밖에 부자들이 행복할 방법은 이 세상에 없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돈 욕심을 줄여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들의 욕심 많은 마음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가난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신학 문제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이유는 돈이 경제 문제가 아니라 신학 문제이기 때문이다.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 말도,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한 예수 말도, 경제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할까?
예수는 왜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했을까. 예수는 왜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했을까. 두 질문은 예수를 정확히 이해하는 열쇠이자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알 수 있는 교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잘 모르면, 예수도 그리스도교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한 예수는 가난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는 현실을 몰랐을까? 비정규직 자영업자 출신의 예수는 계절 실업까지도 모르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 선포를 위해 자발적으로 실업자가 된 예수는 잠 잘 곳도 먹을 것도 보장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할까?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 예수 시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가난 자체가 행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편들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은 행복할까?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세상에서 고통을 받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처럼 하느님께 사랑 받는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예수의 선언 – 이 두 가지 신비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행복을 준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늘나라 선물한 예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은 성인이라고 칭송받지만, 가난의 원인을 설명하는 사람은 사회주의자라고 비난받는다. 가난한 사람을 편들고, 가난의 원인을 지적하고, 가난을 낳는 세력에 저항했던 예수는 성자로 칭송받을 수도 있지만 빨갱이에 사회주의자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쿠바 혁명가 카스트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를 부자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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