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청소노동자, 요양보호사, 플랫폼 기사…
'근로기준법' 적용 배제 노동자 여전히 많아
권리는 공부하고, 기록하고, 연대해야 지킨다
외침의 진화 "모든 노동자에 근로기준법을!"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 스물두 살의 청년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꽃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날 이후, 한국의 노동사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가 몸을 던져 지키려 한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었다. 단지, 법이 있으면 지켜야 한다는 너무도 단순한 이치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는 그 문장을 피로 썼다. 그 문장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그 법은 지금 살아 있는가?"
청년 전태일의 외침이 남긴 질문
전태일은 재단사였다. 평화시장의 좁고 어두운 봉제공장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 점심 한 끼 50원도 아까워 굶으며 바느질하던 소녀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그 소녀들을 '시다'라 부르지 않았다. '어린 여공'이라 불렀다. 그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 했다. 사람답게 일하고, 사람답게 대접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었다. 근로기준법은 1953년에 이미 제정돼 있었다. 하지만 그 법은 평화시장 천장 어디에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그는 거리로 나와 외쳤다. 경찰은 그를 밀쳐냈고, 언론은 침묵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 선택으로 자신의 몸을 살랐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 불꽃은 55년이 지난 지금도 꺼지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은 우리 사회가 노동자에게 약속한 최소한의 인간의 조건이다. 그 법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근로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
"노동시간은 1일 8시간, 1주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사용자는 임금을 정기적이고 전액으로 지급해야 한다."
"부당한 해고는 금지된다."
그러나 그 법은 여전히 모든 일터에 닿지 않는다. 2025년 지금, 우리는 첨단산업의 시대를 산다. 인공지능(AI)이 노동을 대체하고, 로봇이 생산라인을 맡고, 원격 근무가 일상이 되었지만, 한편에서는 배달노동자, 청소노동자, 요양보호사, 플랫폼 기사들이 여전히 법의 바깥에서 일한다. 그들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노동자는 늘 존재하지만, 법은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전태일이 던진 그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법과 현실 사이의 틈
묻고 싶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법은 권력을 가진 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법은 가장 약한 자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근로기준법이 필요한 이유는 일하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일터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이 소모품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루 12시간, 14시간을 일하고도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과로로 쓰러지고, 안전장치 없이 일하다 목숨을 잃는 이들이 있다.
출퇴근길 사고조차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이들이 있고, '노동'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조차 불이익이 되는 직장도 있다. 법이 살아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법이 종이 위에만 존재한다면, 그 법은 죽은 법이다. 전태일은 바로 그 죽은 법에 불을 붙였다. 그는 법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 불길은 그가 죽은 뒤 5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법을 다시 살리라"고 말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그리고 '우리의 권리'
근로기준법은 누군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노동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엔 요구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함께 지켜야 한다.
▪︎ 권리를 아는 것 : 권리는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근로시간, 휴게시간, 연장근로 수당, 주휴수당, 퇴직금, 해고 예고, 연차휴가, 산업재해보상. 이 모든 것은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권리들은 너무 자주 무시되고, 모른다는 이유로 빼앗긴다. '몰라서 당했다'는 말은 곧 '배워야 지킨다'는 뜻이다. 전태일은 스스로 법전을 읽었고,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공부했다. 그의 공부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존엄의 연습'이었다.
법은 종이 위의 문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과 피로 쓰이는 생존의 언어였다. 오늘의 청년 노동자, 배달 라이더, 플랫폼 프리랜서들도 이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권리를 알아야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 지킬 수 있다. 권리의 첫걸음은 앎이다. '근로기준법'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너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선언이 숨어 있다.
▪︎ 기록하는 것 : 모든 싸움은 기록에서 시작된다. 부당한 지시, 임금 미지급, 초과근로, 차별 대우. 이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해야 한다. 기록은 노동자의 무기이자, 역사의 증거다. 전태일은 일기장에 재단사와 시다들의 하루를 기록했다.
'여공들의 점심시간은 15분, 찬밥과 김치로 연명하고 있다.'
그의 기록은 통계보다 생생하고, 문서보다 뜨거웠다. 그가 남긴 낱말 하나하나는 피와 눈물로 쓴 노동의 연대기였다. 오늘 우리의 일터에서도 그 기록이 필요하다. 스마트폰 메모 한 줄, 출퇴근 시간의 캡처, 부당한 대화의 녹취. 그 모든 것이 권리의 씨앗이 된다. 노동자의 기록은 곧 사회의 역사다. 진실은 언제나 '증거' 위에서 자란다.
▪︎ 연대하는 것 : 혼자일 때는 약하지만, 함께할 때는 강하다. 연대는 권리의 두 번째 이름이다. 노동조합은 싸움의 조직이 아니라 '존엄의 학교'다. 거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고 깨닫는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시다들과 손을 맞잡았을 때, 그것은 단순한 조직 결성이 아니라 인간 회복의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불행은 모두의 문제'라는 깨달음, 그것이 바로 연대의 시작이었다. 오늘의 노동자들도 다시 손을 잡아야 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무직과 현장직, 청년과 중년을 가르는 벽을 넘어야 한다. 연대 없는 권리는 허상이다. 함께 설 때만 법은 살아 움직인다.
▪︎ 바꾸는 것 : 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바뀌면 법도 바뀌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놓여 있다.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 예술인, 학습지 교사, 돌봄노동자… 이들은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법의 울타리 밖에 서 있다. 노동의 형태가 변하면, 법의 개념도 변해야 한다. '근로자'가 아니라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법이어야 한다. 전태일의 정신은 바로 그곳으로 향해 있다.
그는 당시의 '봉제공장 여공들'을 단순한 노동력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있고, 꿈이 있으며, 지켜야 할 삶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근로기준법의 경계를 넓혀야 한다. '노동자성'의 정의를 확장하고, 새로운 노동 현실에 맞게 제도를 바꿔야 한다. 법은 사람을 담기 위한 그릇이지, 사람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터는 사람의 공간이어야 한다
전태일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사람'이라는 단어다. 그는 법보다 사람을 먼저 보았다. 그는 소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고, 그들의 눈물과 손톱 밑의 먼지를 보았다. 오늘 우리의 일터에서도 그 정신이 필요하다. 노동은 단지 경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일터는 이윤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공간이어야 한다. 일터에서 존중받는 순간, 그 사회는 이미 정의롭다. 반대로 일터에서 인간이 무시당할 때, 그 사회는 병들어 있다.
그가 떠난 뒤 55년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 1980년대 구로동맹파업, 1990년대 현대중공업 노조, 2000년대 비정규직 철폐운동,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플랫폼노동자들의 권리 투쟁까지. 모두가 전태일의 외침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손끝이 세상을 바꾸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오늘의 근로기준법을 조금씩 넓혔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이제는 우리 세대가 그 외침을 이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바꾸는 일이다.
이제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노동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그러나 착각이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어도, 기계가 인간의 '존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노동은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의미를 다시 써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근로기준법은 더 넓은 의미의 '노동자'를 품어야 한다. 사무실 밖에서 일하는 배달노동자, 앱을 통해 일감을 받는 디지털노동자, 프리랜서 예술가와 창작자, 돌봄노동자와 간병인. 그들 모두가 법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날이 오면, 전태일의 외침은 비로소 완성된다.
마침. 다시, 사람답게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 외침은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유효하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당신의 존엄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근로기준법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회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지켜질 때,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자부심이 된다. 그 약속이 무너질 때, 노동은 착취가 된다. 오늘, 55주기를 맞으며 나는 다시 그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모든 노동자에게, 법의 빛을."
그날, 평화시장 앞에서 타올랐던 청년의 혼이 오늘 우리의 일터마다 새롭게 살아나길 바란다. 그 불꽃이 다시 꺼지지 않기를, 그의 꿈이 우리 시대의 약속으로 이어지기를. 그것이야말로 전태일에게 드리는, 가장 인간다운 헌사(獻詞)다.
손에 땀 묻은 청춘 /하루하루를 견디며 /기계와 맞서던 젊음 /거리를 밝히던 불꽃 /작은 외침이지만 /세상에 묵직한 울림 되어 /차가운 공장 벽 너머 /가난과 억압을 향해 /정의와 인간 존엄을 외쳤다 /그 외침, 오늘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 /멈추지 않는 불씨로 살아 있다. -박철 시. <전태일 열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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