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더욱 다정한 이 가을 날에

우리는 작지만, 그러기에 서로 필요하다

29일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양산을 쓴 채 억새밭 사이를 걷고 있다. 2025.10.29 연합뉴스
29일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양산을 쓴 채 억새밭 사이를 걷고 있다. 2025.10.29 연합뉴스

가을이 오고, 키우던 것들이 여물면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들과 둘러앉아 정을 나누고. 그 모여든 온기와 웃음기로 세상은 조금 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깊은 밤. 한 마리 구슬픈 귀뚜라미 새벽 공기를 울리면, 아! 이렇게 풍족한데도 바깥에서 우는 것이 있다는 생각들. 풍족함으로 인해 도드라진 처량함이나, 외로움이 가을의 또 다른 단면일 수 있음을... 조용히 감사하고, 한편으론 안타까워하는.

그런 가을은 끝일까. 세계 어디를 둘러보아도 축하와 연대가 가득해야 할 계절에, 잔혹한 소식이 울려 퍼진다. 드디어 본격화된 미-중 2차 관세 전쟁 이야기로, 투자에 한 발 디딘 삶을 사는 이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고. 세계 평화와 안정의 수호역을 자청하던 미국은, 자신의 군대로 자신의 도시들을 둘러싼다. 내전의 향기가 올라온다.  

근래에 경험한 계엄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트럼프와 그 측근들의 발언 수위는 거칠어져 간다. 계엄령을 내리기 전의 윤석열처럼. 그건 내부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더 파괴적이다. 동맹과 우호국들을 향한 무자비한 침탈의 선언. 가장 앞에서 그 날카로움을 감당하고 있는 조국의 운명은 어느 방향으로 휘게 될런지... (다행히 최근에 한미 무역 협상은 비교적 좋은 쪽으로 타결되었다! 만세!)

민주적인 방법으로 새 대통령을 세우고도, 조금은 불안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나마, 정말 다행이야. 어리석은 전근대주의적 인물들을 배제시켜 놓았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남은 온갖 추악한 이야기들. 부패와 부정, 개인의 이기심에 빠져 있는 정치인들을 더 처리해 두어야 하는 때임을 느낀다. 정세가 혼란할수록, 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한 폐해는 단순한 실수로 끝나지 않는다. 참혹한 죽음을 불러온다. 역사의 모든 페이지에서 보았듯이.

알고는 있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더욱 왜소함을 느낀다. 실제로도 왜소한 존재일 뿐인 인간이 체제에 의한 소외를 껴안고 더욱 작아지는 기분을 느낄 때. 우린 손쉬운 자기 회복을 위해 자꾸 아무 데나 손을 뻗곤 한다. 신앙의 일부가 되거나, 정치 세력의 소속원이 되거나. 심지어는 폭력적이거나 사이비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무리를 이루어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은 헛된 자아를 회복하려 한다. 그걸 자아라고 해도 되나? 그런 착각의 기분을 누리려 한다. 

그런 그릇된 욕망이 세상을 더욱 찢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순간의 자기만족을 위해 말을 한다. 논리의 앞뒤를 맞추어 보는 대신, 기껍고 자극적인 문구를 되풀이한다. 그런 말을 인간이 발화했단 이유로 '말'로서 취급해야 하는 걸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단어들의 나열 사이에선, 남 탓과 자기 합리화가 왜곡된 형태로 도사리고 있을 뿐인데.

그런 존재들을 똑같이 인간이란 단어로 부르고도, 우린 인간이란 단어의 추락을 막을 수 있는가. 아무리 자아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곤 하지만, 자본주의의 부추김과 그로 인한 소외의 과정 중에 제 무게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들은 가련하다. 새로운 정보에 대한 판단 없이, 욕망으로 직진하는 벌레들 같다. 

그런 이기성. 악성의 원천들.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방지해 둔 러셀의 말은 이 시대에 얼마나 귀한가.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인생이 짧고, 인간이 작은 존재이며, 가장 중요한 것들조차 장난 같다는 것을 안다."

어리석은 마음을 뒤로 물려준다. 과연 양차 대전을 겪어내고도 평화와, 자유를 위해 헌신한 철학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소외는 흔해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소득 격차는 어느덧 계급 간 차이보다 넘기 어려워졌다. 좋소와 좋좋소를 놀리는 드라마의 가상 세계 속에 우리 대다수의 현실이 겹친다. 그런 격차는 곧 땅값과 집값으로 옮겨 붙는다. 절대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주변엔 넘쳐난다. 

우리 지역만 두고 올라버린 집값. 숨 쉬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더 감가상각된 우리 동네. 지방과 수도권이 나뉘어 상호 고통받는다. 집값의 차이는 곧 환경 격차가 되고 학군이 나뉜다. 그로 인해 생겨난 차이가 다시 차이를 늘려 놓는다. 

경제적인 과정만 따져 말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격차를 강조하고 결핍을 전가해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한다. 갈증을 일으킨다고 소금물을 들이켜면 탈수가 더욱 심해지듯이, 그 지휘를 따라 노오오력했다고 실제 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다. 그마저도 타고난 자산가들의 발밑에 미칠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런 체계 안에서, 그렇게 작동하는 것만을 보아 와서 그렇지 이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절대적 필요는 의외로 소박하니까. 

 

25일 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방태산의 단풍나무들이 작은 호수에 반영돼 가을 정취를 더하고 있다. 2025.10.25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25일 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방태산의 단풍나무들이 작은 호수에 반영돼 가을 정취를 더하고 있다. 2025.10.25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인간은 작은 존재.

러셀의 문장은 그런 순간에도 빛난다. 명상하여 깨끗한 마음일 때만이 아니라, 욕심이 가득해서 눈이 빨개진 와중에도 차분한 빛을 낸다. 빈부나 지적 우월로 나누어 다투지 않고, 진지함이란 기준으로 가볍게 전체를 정렬해 낸다. 툭, 다른 축을 가진 세계로 초대한다. 누구나 보잘것없다. 깨닫지 못했을 뿐이란 말은, 실로 지혜로운 사람이 말해 더욱 깊게 마음에 와닿는다. 

깊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가을밤을 환하게 빛내는 보름달. 양차 세계대전으로 암울한 시기, 괜히 그 곁에서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가 자라난 게 아니다. 사유와 지성이 뒤로 물러 앉은 세계 속에서, 그와 같은 사람들이 최고 지성의 위치에 있어 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파시즘과 공산주의 그리고 최악으로 치닫는 자본주의까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굴욕을 견디며 끝끝내 지성과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를 꿈꾸고 글로 남겼다는 것. 다시 한번 치닫기 시작한 세계정세 앞에서 절망하는 지금, 자연스러운 존경이 피어오른다.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나갔을까.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나갈까. 세상은 늦가을 깊은 밤에 들어선 것만 같다. 한 개만으로 국가를 초토화한다는 무기는 여기저기 있고, 그 소유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방방 뛴다. 각자가 모두 자국산 극우 세력에 쩔쩔맨다. 만약 터진다면,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겨울을 견디고 새 봄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마 긴 세월을 지지부진해야 할 것이다. 미리 방지하는 것만 못하다. 각국의 우리들이 연대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에게 우리의 생산물은 충분하지 않은가? 둘러앉아. 행복을 논하기에 너무 가난하고 힘겨운 상태인가? 러셀의 책은 읽을 당시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양차대전과 같은 전쟁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더 따듯한 빛으로 되살아났다. 반면에 눈앞에 놓인 무기력한 글과 무기력한 나의 손. 이것만으로 해나가야 했다면, 이것만으로 해나가야 한다면 나는 아무 희망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함께 가자. 비틀즈의 노래처럼. "come toghether." 그리고 상상하고, 닿아 보자. 국가를 없애진 못하더라도 국가로 인해 피 흘리지 않는 세계를. 돈이나 권력 무엇에도 속지 않고 눈앞의 소박함을 즐길 줄 아는 인간성을.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존 레논, Imagine 중에서 발췌.)

가을은 이렇게도 쓸쓸하고, 그래서 더욱 다정하다. 우리는 작지만, 작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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