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아진 자아의 시대와 파시즘의 적층 구조

대통령이 바뀌자 오르기 시작한 주가가 끝을 모르고 오른다. 중동에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붙은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올라가는 가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올라가리란 것은 늘 비슷하게 맞추지만, 언제 멈출 것인가는 도저히 알지를 못한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빠져나온 뒤에도 오르는 가격을 되따라가다 번 것보다 많이 토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기대감이 서로 공명하며 부풀어 오르는 최종점은 연산으론 닿을 수 없는 어떤 차원. 나는 그 넘나드는 욕망의 레이스를 틱 단위로 관찰할 때마다 어찔한 광기를 느낀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란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텔아비브의 한 건물을 둘어보고 있다. 2025. 6. 22 AP  연합뉴스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란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텔아비브의 한 건물을 둘어보고 있다. 2025. 6. 22 AP  연합뉴스

인공지능으로 정밀 타격한 테러 행위에 맞서 방공 시스템 아이언돔을 뚫는 초음속 미사일이 내리꽂혔다. 폭격으로 골조를 드러낸 고층 건물의 앙상함. 그곳에서 자본주의로 화려하게 포장된 민주주의의 비루함을 본다. 보이는 곳에 들인 미감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내장재. 보이지 않음에 돈 쓰지 않음은 자본주의적 효율, 내장재야 기능에 충실하면 될 일이긴 하다. 그러나 늘 궁금해진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동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 내장재들은, 구조재들은 기능을 유지하며 밀실 속에서 온전하고 있을까? 피상적인 이유들로 정치와 정치인들을 대하는 동안 욕심과 미움, 분열은 자라 이제 전쟁에 닿고 있는데. 여전히 어떤 이유를 들먹이며 지지가 유지되는 현상에 나는 절망한다. 미움과 미움이 공명을 이뤄 상호 파괴로 치닫고 있음에도 견고한 지지와 체제들이여.

소외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소외감은 실존할 수 있다. 개인을 둘러싼 사건의 양상은 늘 복잡하게 흔들리고, 거대하게 둘러싸여 영향 받는다. 한 번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경사가 내게 없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인지가 모든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둔감함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 말해져야 한다.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인간성은 얄팍해진다. 우리는 이제 아주 짧은 순간의 감정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조금의 손해도 못 견디고, 오르내림의 굴곡도 감내하지 못하며 빽빽대는 인간들. 그들을 인간이라 부르기엔 부끄럽지만, 우리 시대의 인격 평균이 그러함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미 얇아진 자아가, 익명을 빌려 더욱 얄팍해진 채 만나는 인터넷 공간의 놀이 양상을 보라. 그 어떤 인간으로서의 공감이나,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 나의 즐거움 앞에 모든 가치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이기심에서 더 쪼그라들어 '나'조차 존재하지 않고 '나의 즐거운 기분'만 남은 판단체들이 '알빠노'라고 외치며 저지르는 비난, 조롱, 폭력들. 조그만 손해에도 바들거리며 서로 부딪혀 박편 같은 인격을 더욱 얇게 저며댄다. 그런 편협함이 인격으로 체화되어 배제적이고, 차별적인 파시즘에 기꺼워하는 인간으로 타락 할 때에, 그것을 막기보다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정치인이 대권에 도전하는 지옥문이 열렸다.

그렇다고 그 모든 이들이 구제할 도리가 없는 악인가. 정치공학적 판단에 의거해, 선택을 얻기 위해 잃어야 하는 표가 더 큰 무가치한 존재들로 쉽게 이야기 되어도 좋은가. 현재의 현상으로 판단하여, 미래의 모든 변화 가능을 닫아 버린 채 무자비하게 비평으로 두들겨 패기만 해도 좋은 이들인가.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논평하거나 비난할 때는 현대적 방식으로 가장하여 타락의 공명 구조를 디밀어온 사회의 구조적 문제도 명확히 짚어야 공평하다. 그들이 가하는 것과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되는 방식으로. 편의를 위해 인간성을 상실한 점수 공간 안에 그들을 밀어놓고 평가하고, 차별하고, 배제해 온 인격 말살을 이야기해야 한다. 다정함을 받아 보아야 다정함을 줄 수 있다. 그것이 한 편으론 폭력인 줄도 모르고 당한 아이들은, 차별과 배제, 계층화가 잘못인 줄도 모르고 다시 휘두르며 놀고 있다. 익숙함으로.

차별당한 존재로서, 배제당한 존재로서 그들을 남겨둔 순간이 길었음을 우리는 외면한다. 아니 그 윗세대들 또한 인지조차 못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를 위로하거나 이해하고 더 넓은 인격의 본을 보이기보다, 체화된 이기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대입의 과정에서, 동료 시민과의 관계함에서 반복해서 학습시켰다. 그런 삶의 지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우리 자신이 조금은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인 어른들이 관계를 통해 인간답게 살았음이 학습되어 습관으로 남았기 때문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바나 실천하는 바가 인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님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 세대도 이미 '개인화'된 인간이 '사회'와 상관없이 존재 가능한 무엇이라 믿는 듯 행동하기 때문이다. 관념적으론 어떨지 몰라도, 행동과 실천의 범주인 일상생활 속에선.

 

서울지하철 승객들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2021.6.16 연합뉴스
서울지하철 승객들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2021.6.16 연합뉴스

소외와 배제, 선전에 의한 세뇌가 주원인인 60-70세대의 파시즘과 다르게, 젊은 세대의 파시즘은 소외의 체득과 상호 소외, 자발적 동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양상으로 보아야 하는, 더 위험하게 봐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얕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원인이 경제 성장 과정에서 일어난 배제와 다르게 이미 성장한 곳에서의 기회 박탈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에, 만성적이고 안정적인 차별이 되어 젊은 세대에게 더 무거운 절망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목해 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지적 무능이다.

이 시대의 인격적 무감각과 자극 중독적인 상호 공명의 적층 구조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해체해 내야 한다. 이미 전쟁조차 상관 하지 않는 시장의 열광으로 일부 감지되는 우리의 광기가 공명 구조에 의해 어떤 형태로 증폭될지 이성적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이득을 증대시키려는 방향으로 타락할 최악의 가능성 또한 이미 파시즘으로 피어나 있다. 거시적인 구조와 어떤 계기가 부족할 뿐, 상황이 바뀐다면 폭발할 수 있을 만큼 쌓인 이 독기의 누적을 해결할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젊은 세대의 성별갈등이나 극우화로 드러난 현상은 깊은 구조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이해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현상론적인 치고받음 사이에 갇혀있기엔 시간이 이미 너무 늦었다. 올바른 해결은 늘 깊고, 바른 응시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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