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항쟁 79돌](하) 경과 및 의미와 과제

대구역 운수노동자 시위대에 경찰의 발포

73개 지역서 230만 참여한 민중항쟁 확산

추적 과정에서 가족까지 빨갱이 몰아 학살

"10월항쟁은 전국, 전국은 10월항쟁으로"

30일부터 대구에서 예술제·기념행사 열려

지난해 내란수괴 윤석열의 12.3 불법 계엄 정국을 거치면서 광장은 치열하게 대치했다. 민주주의를 일거에 무너뜨리려 했던 내란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주 시민들과, 윤석열의 계엄은 정당했고 지난 총선은 부정선거의 결과라 주장하는 극우 세력 간의 극한 대립이 벌어졌다. 한국 사회가 일찍이 현실로 접해보지 못한 양상이다.

 

서울 중구 명동 인근 행진을 마친 윤석열 탄핵 집회 현장. 2025..1.18 .사진=황의원 시민기자
서울 중구 명동 인근 행진을 마친 윤석열 탄핵 집회 현장. 2025..1.18 .사진=황의원 시민기자

광화문에서, 안국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내란수괴의 관저 앞에서 심지어는 내란수괴가 잡혀들어 간 구치소 앞에까지 전선이 형성됐다. 섬뜩한 것은 이런 일련의 대치 상태가 해방공간의 그것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빨갱이는 죽여도 돼"

윤석열 탄핵 반대와 부정선거를 외치며 한 손에 태극기, 다른 한 손에 성조기를 들고 외치는 극우 집회 참가자들의 구호는 참으로 섬뜩했다. 대부분의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대상자를 자신들이 속한 집단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분리해 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그랬고, 한국의 해방 공간에서 죄없는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수백만 명을 학살할 때 그랬으며, 1965년 인도네시아의 반공 학살이 그랬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야만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과거사 정리라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람을 죽여대던 그 시절의 학살을 옹호하거나 따라하는 게 아니다. 비극적인 우리의 근현대사를 조금만이라도 이해한다면 '빨갱이는 죽여도 돼' 따위는 절대로 허락될 수 없는 구호다.

 

대구 10월 항쟁과 6.25 전쟁 중 학살 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탑. 출처 - 오마이뉴스, 사진저작권 - 서부원
대구 10월 항쟁과 6.25 전쟁 중 학살 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탑. 2022.9.18. (오마이뉴스, ⓒ서부원)

장면 하나를 더 살펴보자. 극우 집회 참가자들은 지난 1월 19일 급기야 법치의 근간이라 불리는 법원을 침탈했다. 내란수괴 윤석열을 지켜야 한다며 시민과 경찰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외침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짱깨'라는 속된 표현으로 중국인들에게 물러가라고 난동을 부리며 관광객들에게 위협하는 시위를 벌인다.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이 끝 모를 혐오의 역사를 종결시키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10월항쟁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자고 제안한다.

'일제도 삼갔던 하곡 수집 그리고 노동자 탄압', 완성돼 가는 항쟁의 조건들

미군정의 실패가 거듭되는 동안 민중들은 야위어 갔다. 1946년에 접어들자 대구에서는 학생들의 절반이 쌀이 없어 도시락을 싸지 못했고, 그 비율이 80%에 육박하는 학교도 있었다. 1946년 7월 2일 영남일보에 실린 글의 일부이다.

"나는 사흘 굶어서 일할 기운도 없소.
집에 식구들이 늘어져 누운 것을 보고 왔는데
그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소."

1945년산 추곡 수집에 실패를 겪은 미군정은 7월에 들어서자 강압적인 태도로 하곡 수집(보리 공출)을 개시한다. 일제도 삼갔던 하곡 공출을 강행하느라, 미군정은 지방행정기관, 경찰, 우익단체, 심지어는 무장한 미군 병사들까지 동원했다. 미군정에 대해 민심이 극에 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미군정은 정책의 실패를 좌익에게 돌리기 위해, 1946년 8월이 되자 본격적인 노동자 탄압에 나선다. 미군정 운수부는 '적자 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명분을 들어 철도 노동자 25%를 감축하고, 기존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서 힘과 규모가 가장 큰 철도노조의 힘을 빼겠다는 의도였다.

배급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상황에다 미군정의 탄압까지 이어지자 노동자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9월 13일 서울에서 철도공장 노동자대회가, 9월 23일 부산과 대구에서 철도노동자의 파업이 연달아 일어났다. 24일에는 서울 철도노동자 1만 4949명이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이어 전국의 4만여 철도 노동자들이 모두 파업에 동참한다. 전국의 철도가 멈춰 서자, 철도 노조에서 시작한 9월 총파업은 자연스럽게 10월 전평 산하 각 산별노조로 확대됐다. 노동자들의 공통된 구호는 "쌀을 달라"와 "(폭등한 물가에 비해 터무니없는)임금을 인상하라"였다.

결정적 순간, 경찰의 발포로 시작된 10월항쟁

배고픔은 전국이 공통이었지만, 대구의 분위기는 보다 심상치 않았다. 추석 분위기도 사라지지 않은 데다 9월 말이 되자 대구 내 여러 학교에서 운동회를 마친 학생들이 가두 행진에 나섰다. 경찰이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지속됐고 이윽고 10월의 첫날이 밝았다. 10월 1일 오전 굶주림을 버티지 못한 부녀자와 어린이 등 시민 1000여 명으로 구성된 기아 시위대가 대구부청 앞에서 쌀을 달라며 오전부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같은 시간 대구 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천 명도 대구역 인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이하 '시투') 본부 주위에 모여 식량배급과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기아 시위대는 장소를 도청으로 옮겨 시위를 지속했고, 노동자들의 해산 문제를 협상하려 시투에 파견된 경찰 30여명이 불어난 1만 5000명 군중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이 발생된다. 대구 일대에 보이지 않는 압력은 높아만 가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흐르자 권영석 5관구 경찰청장은 무장경찰 60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나 집회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군중들은 해산을 거부했다. 사건은 오후 6시에 벌어졌다. 대구역 앞에서 경찰과 운수노동자들의 충돌이 일어나자, 대구경찰서 수사주임과 경찰 3명이 출동했다. 그런데 이들이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고 중상을 입는 사태가 일어났다. 시간은 7시를 가리켰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갔다. 그 때 경찰 지휘관이 머리 위로 들었던 검지로 시위대 쪽으로 사격방향을 지시하자 발포가 일어났다. 두 사람이 경찰이 쏜 총탄에 숨졌고 그 중 한 명이 대구철도 노조원 김용태였다.

1946년 10월 1일 오후 7시의 발포, 그것은 단순한 총성이 아니었다. 조선 민족이 해방을 맞이하고 고작 1년을 넘긴 그 날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총성이었다.

이렇게 촉발된 10월 항쟁은 그해 말까지 73개 시군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230만 명이 참가하는 민중항쟁으로 격화했다. 민중들은 친일 경찰을 응징하려 들었고, 친일  지주들의 곳간을 털었다. 친일 경찰과 미군정은 군대를 동원해 굶주림에 저항하는 민중을 추격했고, 일부는 처형을 일부는 구속을 당했다. 나머지는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를 조직했고, 그 가족은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죽어갔다. 보복에 의한 사적 살인이 이어졌고, 좌익에 대한 탄압과 제거, 민간인 학살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38도선 이남에 완전한 반공국가는 그렇게 완성돼 가고 있었다.

 

1960년, 달성군 가창면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숨진 대구지구 희생자의 공동분묘 앞에서 상복 차림의 유가족들이 묘 표지를 세운 뒤 오열하고 있다(출처: 유나인뉴스).
1960년, 달성군 가창면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숨진 대구지구 희생자의 공동분묘 앞에서 상복 차림의 유가족들이 묘 표지를 세운 뒤 오열하고 있다. (유나인뉴스).

조선인들에 대해 무지했던 미군정과 완벽하게 반공주의자로 옷을 갈아입은 친일파가 반공국가 수립의 주역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군정은 끝내 자신들의 실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굶주린 민중들의 자생적 항쟁마저 배후가 있다고 본 그들의 오판이 민중에 대한 보다 심한 탄압과 학살의 형태로 변질돼 갔다. 1948년 4월 제주에서, 10월 여수순천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내내 민간인 학살의 배경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묻고 싶다. 40여 년이란 긴 세월을 일제 치하에서 노동력과 성을 착취당하고, 자원과 쌀을 수탈당하며 끊임없는 고통 속에 죽어갔던 민족에게 해방 1년 만에 이런 역사를 만든 자들을 어떻게 단죄해야 하겠느냐고.

전국으로 다시 퍼지는 10월항쟁의 불꽃!
79년 전 대구는 전국으로! 2025년의 전국은 대구로!

우리의 국토 어디에도 민간인 학살의 슬픔이 녹아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이 비극의 원인을 보다 큰 틀에서 규명해 보면, 단연 간악한 일제와 어리석은 미군정이 있다. 그리고 당시 일제에 빌붙은 친일파들이 있다. 이 세 세력이 어우러져 이 땅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지금부터라도 10월 항쟁은 전국으로 퍼져야 하고, 전국은 10월 항쟁으로 모여 들어야 한다. 10월 항쟁은 제주 4.3과 여순항쟁에 비해 전국화에 미흡한 부분이 많다. 특별법 제정의 문제도 그렇고 실제 과거사 조사의 양과 질에 있어서도 그렇다. 주장하는 이에 따라 10월 항쟁은 동학농민혁명, 삼일독립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민중항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만큼 참가 규모나 사회적 의미와 파장이 큰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10월 항쟁의 전국화에 앞서 넘어야 할 장벽이 많이 있다. 첫 번째가 바로 역사 왜곡의 문제다. 지난 7월 24일 박선영 진실화해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10월 항쟁을 '대구폭동사건'이라고 왜곡하는 사진을 올렸다. 본문에는 폭도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10월 항쟁의 전국화가 성공해야 이 따위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다.

다음으로 시민들의 관심이다. 지난 겨울 탄핵의 광장에서 우리는 보다 깊고 폭 넓은 차원의 연대 성공을 경험했다. 중요도, 인지도, 해당 이슈의 지역성, 이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시민들의 관심과 연대가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우선 대구와 인근 지역에서 보다 활발한 이슈파이팅이 일어나길 바란다. 이번 광장에서 우리는 ‘대구의 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또 그들의 결기에 지지와 연대를 표했다. 이를 토대로 국민 모두가 바른 역사를 알아가거나 알리기 위한 주체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한 때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었던 도시, 좌우합작의 훌륭한 사례를 만들었던 도시, 4.19 혁명의 전초를 만들었던 위대한 민주주의 선도 도시로 대구가 다시금 용트림하기를 고대한다.

<마치면서>

두 편의 짧은 연재에 10월 항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조건이 대단히 많은 악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민주 시민들은 시대의 악인들과 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내란수괴 윤석열의 파면 선고에서 헌법에 위배되는 불법 계엄을 막은 것은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과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군인들 덕분이라고 했다. 문 대행이 말한 시민들과 군인들이 갖춘 것을 선량한 인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선량한 인간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사람 하나를 우주처럼 대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 하나를 우주처럼 소중히 대할 때 비로소 우리가 꿈꾸는 대동세상이 항구히 자리 잡을 수 있다.

10월의 상처를 우리 가슴에 각인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2025 시월 항쟁 예술제 '10월이 온다'를 후원해주세요.출처 : 평화뉴스(https://www.pn.or.kr)
2025 시월 항쟁 예술제 '10월이 온다'를 후원해주세요.출처 : 평화뉴스(https://www.pn.or.kr)

[2025 시월 항쟁 예술제 및 연계행사]

❏ 10월 항쟁 79주년 진실규명, 정신계승 대구경북시도민대회 및 전야예술제
    • 9월 30일(화) 19:00 대구역 앞 광장

❏ 전시
    • 9월 30일(화)~10월11일(토) | 북성로프로토타운본부, 오픈대구, 향촌문화관 기획전시실, 북성로기술예술융합소 모루,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총 5개소, 전시장별 운영시간 상이 | 오픈 투어링 30일(화) 17:00)

   - 섹션1: 그래픽디자인展 <10월이 온다>
   - 섹션2: 카운터 메모리, 카운터 보이스: 대항기억, 발화하는 목소리
   - 섹션3: 달빛동맹교류전‘코발트’

❏ 학술행사
    • 9월 30일(화) 15:00 북성로프로토타운본부 | 대항기억, 발화하는 목소리
    • 10월 중 북성로프로토타운본부 | 10월항쟁 공동연구를 위한 라운드테이블

❏ 연계행사
    • 팔도광대 달구벌놀이: 9월27일 17:00 봉산문화회관
    • 제13회 10월 문학제 ‘영천아리랑’ 10월18일-19일 영천보현자연수련관
    • 달빛동맹교류전 ‘코발트’: 9월3일~9월27일 광주은암미술관
    • 10월 항쟁을 기억하는 시노래버스킹 9월 매주 화요일 2.28기념중앙공원
    • 10월 항쟁 79주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10월1일 11시, 가창면 10월항쟁 위령탑 앞

❏ 시월 항쟁 79주년예술제 후원
    • 후원금 모금 계좌 : 카카오뱅크 3333-02-9577122 예금주 한상훈
    • 문의전화 : 010-2494-0459

    * 모금된 후원금은 사용처를 행사 마감 1개월 이내(11월 이전)에 다양한 경로로 알려드립니다.

시월 항쟁 79주년 예술제 추진위원장 최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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