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항쟁 79돌](상) 원인 제공한 미군정
미국 용인으로 일제 잔당이 만든 살인적 인플레
오락가락한 미곡 자유화로 쌀값 폭등 가속
"쌀을 달라"…민중항쟁 도화선은 '굶주림'
미군정, 정책 실패의 책임 좌익에 떠넘겨
1946년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항쟁'이 올해로 79돌, 내년이면 80돌을 맞는다. 8.15 해방 공간은 무지한 미군정, 탐욕스러운 친일파, 권력욕에 눈 먼 이승만과 조선총독부 관료로 인해 여전히 야만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10월항쟁'은 이런 시대적 모순에 결연히 맞서 73개 시군에서 230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민중항쟁이지만, 이어 일어난 제주 4.3이나 여순항쟁에 비해 전국적인 관심은 부족하다. 오는 30일부터 대구에서 '2025 시월 항쟁 예술제'가 열린다. 이를 계기로 10월 항쟁의 원인과 경과, 의미와 과제를 살펴본다. [편집자]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을 선언하자 한반도에 응축되었던 40년의 모순이 해방 공간에서 한꺼번에 노정됐다. 국내적으로는 독립운동세력과 친일세력 간의 긴장이 극에 달했고, 국제적으로는 냉전의 극한 대립이 시작됐다. 폭풍전야와 같이 국내외의 압력이 높아지는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을 40여 년 수탈하고도,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45년 9월 8일까지 미국 측에 끊임없이 조선의 상황을 왜곡했다. 조선 민중의 폭력성을 부각하거나, 공산화를 기정사실화 했다. 조선의 안정을 빌미로 헌병과 경찰을 그대로 존속하고, 동시에 조선은행권 사용을 지속하도록 미국에 요청했다. 미군정으로서는 당장의 국정 운용을 위해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일제는 이를 악용해 퇴각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가 재등용되었고, 당시 45억 원 수준(미즈타 구권)이던 국내 통화량은 140억 원 수준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폐기했어야 할 강점기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내 유통시킨 탓이다. 일제는 이 돈을 활용해 차곡차곡 조선에서의 퇴각을 준비했다. 예를 들면 어차피 상환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면서 일본인 기업가들에게 무리한 대출을 일삼았고, 그들은 손 쉽게 쥔 돈으로 사들인 조선의 귀중품을 들고 조선을 떠났다. 조선의 보물과 귀중품들이 사라진 자리에 종이쪼가리 같은 지폐만 남게 됐다. 해방 공간에서 일어난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조건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은 것은 미군정의 미곡 자유화 정책이었다. 미곡 자유화 정책은 일본으로의 밀수출 증가, 본국으로 귀환한 동포들로 인한 미곡 수요 증가, 극에 달한 매점매석 등으로 인한 쌀값 폭등을 부추겼다. 이로 인해 쌀값은 전년 대비 무려 24배나 폭등했다. 이에 당황한 미군정은 다시금 상한선을 둔 미곡정책을 폈지만 이마저 실패했다. 미곡 자유화 실시 4개월 만인 1946년 2월 1일부로 미곡 수집령을 실시하게 된다. 처참한 정책 실패였고, 조선 민중의 고달픈 역사의 서막이었다.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달라!" 항쟁의 도화선 '굶주림'
당시 미곡 수매기관인 '조선생활품영단'은 일제강점기 강제 공출기관이었던 '조선식량영단'을 개편해 만들었다. 여기에 미곡수매 강제집행에 동원되는 경찰 역시 대부분 일제 강점기의 친일 경찰 출신이었으니 농민들의 반감은 지극히 당연했다.
미군정의 갈팡질팡하는 미곡수집 정책은 좌익과 우익, 도시민과 농민, 지주와 소작농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공출의 시기를 놓친 점,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공출 기구에 대한 거부감, 시장 가격에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수매가격, 지주와 모리배에 의한 암시장 거래와 밀수출, 체계적이지 못한 미곡 수집 등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1945년도 생산된 쌀에 대한 수집은 전체 생산 예상량의 5.3%, 목표량의 12%에 그쳤다.
미곡 수집이 제대로 되지 않자, 먼저 도시민들에게 식량 위기가 닥쳤고 이는 곧바로 미군정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됐다. 1946년 3월 하순경부터 서울 시내 각지에서 모인 시민들이 쌀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3월 28일에는 배고픈 시민 300명, 이틀 후인 30일에는 열 배나 많은 3000명이 시청에 모여 청사의 각층 복도를 점거하고 쌀을 달라고 요구했다.
10월항쟁이 시작된 대구에서도 1946년 10월 이전 굶주림을 참지 못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3월 11일, 4월 1일, 7월 1일, 8월 19일 등 4차례에 걸쳐 부청이나 도청에 모여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아사 직전의 상황에 처한 시민들의 절박함은 "배고파 못 살겠소!" "쌀을 주오!"라는 외침에 절절히 묻어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해 대구에는 초여름부터 콜레라가 창궐했다. 보건 당국은 대응 조치랍시고 교통 차단을 통해 대구를 폐쇄했는데, 이로 인해 뒷거래로 반입되던 쌀조차 구하기 어렵게 됐다. 식량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민심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굶주림은 이미 항쟁의 도화선으로 타들어 갔다.
정책 실패의 원인을 외부로 돌린 미군정, 좌익을 배후로 지목하다
내놓는 미곡 정책마다 번번이 실패로 이어지고 있던 1946년 봄이 되자, 대중들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극대화 됐다. 공교롭게도 당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는 시기와 겹치는데, 이 때 이곳저곳에서 시위가 일어나면서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가 소련 대표단에게 고스란히 들켜버렸다. 미군정으로서는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미군정이 식량정책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미곡 수집 실패의 원인을 좌익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은 더욱 강경하게 미곡 수집 정책을 펼쳐나가는 동시에 좌익에 대한 비상조치를 취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1차 미소공위 개최로 좌익에 대한 직접적 탄압을 자제하던 미군정이 미소공위가 결렬 분위기로 흘러가자 좌익탄압을 본격화했다. 미군정으로서는 정책의 실패로 인한 남한 대중들의 불만과 좌익세력이 결합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조선공산당(조공)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1946년 5월의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조작과 전국 인민위원회 수색, 9월 조공 지도부 체포령의 발동 등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미군정은 좌익을 강하게 탄압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이중의 정책을 펼쳤다. 여운형계의 온건 좌익 세력을 활용함으로써 좌익 진영 간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것으로 조공을 고립시키려 했다.
미곡정책의 잇따른 실패, 토지문제, 정리되지 않은 친일문제와 친일 경찰의 횡포, 1차 미소공위 결렬과 좌익탄압, 일제도 하지 않던 하곡 공출 등 이 모든 것이 1946년 10월을 향해 쉼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남한 민중들의 불만은 더 이상 부풀리기 힘든 풍선처럼 커졌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반공 국가를 위한 포석은 그렇게 한 수 한 수 조선반도의 바둑판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230만 남한 민중의 항쟁뿐이었다. 서서히 10월항쟁의 그 날이 대구를 향해 오고 있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2025시월항쟁예술제 및 연계행사]
❏ 10월항쟁 79주년 진실규명, 정신계승 대구경북시도민대회 및 전야예술제
• 9월 30일(화) 19:00 대구역 앞 광장
❏ 전시
• 9월 30일(화)~10월11일(토) | 북성로프로토타운본부, 오픈대구, 향촌문화관 기획전시실, 북성로기술예술융합소 모루,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총 5개소, 전시장별 운영시간 상이 | 오픈 투어링 30일(화) 17:00)
- 섹션1: 그래픽디자인展 <10월이 온다>
- 섹션2: 카운터 메모리, 카운터 보이스: 대항기억, 발화하는 목소리
- 섹션3: 달빛동맹교류전‘코발트’
❏ 학술행사
• 9월 30일(화) 15:00 북성로프로토타운본부 | 대항기억, 발화하는 목소리
• 10월 중 북성로프로토타운본부 | 10월항쟁 공동연구를 위한 라운드테이블
❏ 연계행사
• 팔도광대 달구벌놀이: 9월27일 17:00 봉산문화회관
• 제13회 10월문학제 ‘영천아리랑’ 10월18일-19일 영천보현자연수련관
• 달빛동맹교류전 ‘코발트’: 9월3일~9월27일 광주은암미술관
• 10월항쟁을 기억하는 시노래버스킹 9월 매주 화요일 2.28기념중앙공원
• 10월항쟁 79주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10월1일 11시, 가창면 10월항쟁 위령탑 앞
❏ 시월 항쟁 79주년예술제 후원
• 후원금 모금 계좌 : 카카오뱅크 3333-02-9577122 예금주 한상훈
• 문의전화 : 010-2494-0459
* 모금된 후원금은 사용처를 행사 마감 1개월 이내(11월 이전)에 다양한 경로로 알려드립니다.
시월 항쟁 79주년 예술제 추진위원장 최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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