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찬반세력의 공통 레토릭 ‘위선 혐오’

"역겨운 교육현실에 발 담고 역겨움 지적"

조국을 희생제물 삼는 속죄 드라마 같아

가족 전체 파괴한 대표적 사법폭력 사례

이재명 대표와 조국 대표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하면서 정권 심판 바람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다.
이재명 대표와 조국 대표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하면서 정권 심판 바람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다.

조국의 위선? 검찰의 위선?

조국 이야기만 하면 나라가 두 쪽이 난다. 조국 전 장관의 투옥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광복절 사면을 앞두고 사람들은 찬성이냐 반대냐 드잡이질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양쪽의 시민들에게 공통된 레토릭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위선에 대한 혐오다. 양쪽 모두 조국 혹은 검찰의 위선을 폭로해, 어느 쪽이 더 혐오스러운지 입증하려 든다.

조국을 희생제물 삼으면 역겨운 교육제도가 정화될까?

한쪽은 한 일가족의 위선을 폭로하려 든다. 이들은 조국의 공공연한 비밀, 이 땅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의 이익에는 유달리 억척스럽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작년 기준 사교육 시장 규모는 약 29조 원이다. 같은 해 초·중·고에 투입되는 예산 69조 원의 42%에 해당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자식의 입신양명에 미쳐 있는지, 공교육 제도를 도구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광기는 대학 입시로 대표된다.

조국도 그랬다. 공개된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현행법상 범죄로 인식되는 행태를 여럿 저질렀다. 솔직히 말해보자. 그가 충분히 처벌을 받았는지, 또는 스스로 깊이 뉘우쳤는지, 그리고 다른 이들의 광기가 얼마나 심한지 문제와는 별개로, 그의 행동은 꼴사나운 짓이었다. 그의 행위는 이 나라 교육이 이미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줬다.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라는 교양의 이념은 소거되고 사회적 인정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우리 교육의 결과는,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거나 걷어차는 일뿐이다. 이런 현실이 역겨운만큼 조국의 잘못도 이 역겨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순간 조국은 절반의 시민에게 비웃음을 사는 우상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만약 조국이 우리 교육의 현실에 순응하고─우리 대다수가 그러하듯이─교육에 대해, 법에 대해, 정의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면, 그는 이 사회의 일부로 기꺼이 환영받았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조국이 이 역겨운 교육체제를 비판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절반의 시민은 조국에게 묻는다. 이렇게 역겨운 현실에 발 담근 죄를, 그리고 현실의 역겨움을 꼬집어 말한 죄를.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와는 별개로, 그들의 비난은 이 모든 역겨움을 조국의 위선에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조국사태'로 인한 진보 지식인 사회의 분열을 지적한 김명인 교수(인하대)의 말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어쨌든 그들이 조국을 제물로 조국의 역겨움을 대속하는 한 편의 '희생제의'를 벌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국이라는 한 인물이 희생되면 조국 전체의 역겨움은 정화될까? 그들은 이 질문에 침묵한다. 애초에 정화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국혁신당 '끝까지 간다' 특별위원회 회의에서 김선민 대표 권한대행이 발언하고 있다. 2025.8.13. 연합뉴스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국혁신당 '끝까지 간다' 특별위원회 회의에서 김선민 대표 권한대행이 발언하고 있다. 2025.8.13. 연합뉴스

조국은 사법폭력의 대표적 희생자

반대쪽은 공권력의 위선을 폭로하려 든다. 지금까지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조직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해 왔다. 그 과정에서 사법폭력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조국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범죄자로 선언하는 일은, 그를 이 세계에서 도려내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다. 그 칼을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에 겨누기 시작한 건 김영삼 정권 말기부터였다. 모든 정치인의 삶은 크건 작건 부패범죄로 해석될 수 있다. 해방 이래 검찰은 정파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과 그 측근의 비리를 수사하면서 효능감과 사회적 영향력을 동시에 키워 왔다. 검찰의 영향력이 가장 극적으로 노출된 사건이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부각된 것은 그가 사법폭력의 피해자로 비친 모습이었다. 그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오직 스펙타클만을 위해 집행했던 중세의 처벌처럼 야만스럽게 보였다. 이로부터 절반의 시민들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검찰은 과연 공익을 대표하는가?

'민족 중흥' 대 '독재 타도'라는 두 축으로 운행되던 이 땅의 정치는 군사독재 정권이 몰락하자 한동안 구호를 잃고 나부꼈다. 그동안 운명의 여신은 검찰의 편이었다. 부패일소라는 견고한 구호를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죽음을 계기로 반대편에 검찰개혁이라는 구호가 주어졌다. 크게 보면 양측이 깃발만 갈아끼운 셈이다. 양편의 레토릭은 모두 반대편의 위선을 지적하고 있다.

이 뼈대는 지금까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독재타도란 알고 보면 민족중흥을 방해하는 빨갱이들의 수작이다"라고 외쳤고, 반대편에서는 "민족중흥이란 실상 독재를 옹호하는 부역자들의 공허한 광고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한편에서 "검수완박은 부패완판"이라고 말하고, 반대편에서는 "검찰의 독점적 권한은 부패"라고 말한다.

이 구도가 조국사태에 그대로 적용된다. 조국의 사면은 반대편의 몰락으로 나타난 자동적인 결과다. 조국을 옹호하는 절반의 시민들은 한 개인의 위선보다는 공권력의 위선을 더욱 크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국이 위선자이든 아니든, 우리가 조국의 위선에 몰두하는 동안 검찰의 위선은 논의에서 누락된다. 검찰의 수사가 아무리 '적법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조국을 제물로 스펙타클을 선보이고자 했던 검찰의 저열한 의도를 드러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조국에 대한 사면은 이를 위한 첫 번째 단추가 된다.

 

2019년 9월 19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학생들이 조국 법무부 장관 딸 조민의 입학 취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2019.9.19 뉴스1
2019년 9월 19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서 학생들이 조국 법무부 장관 딸 조민의 입학 취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2019.9.19 뉴스1

위선을 혐오하는 우리의 태도는 정당한가

조국 사건을 후자의 관점에서 보아야 마땅하다. 그래야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정권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민주공화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내란성 비상계엄이 도대체 어떻게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어느 관점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스포츠 게임처럼 어느 편을 응원하느냐 하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시작점을 선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위선을 혐오하는 우리의 태도가 정당하냐는 물음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강제 수용소에서 나치스는 모든 수용자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밀었다. 개성을 말살함으로써 인간을 동물 떼 혹은 살덩어리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위선을 혐오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여러모로 강제 수용소의 모습을 닮아 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은 조국 자택 앞에 진을 치던 기자들이 중국집 배달원에게 안에 몇 명이 있느냐고 묻던 장면이다. 발가벗겨진 인간은 인격(persona)을 상실한다. 그래서 공적 영역은 마치 가면 무도회처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보호받는 사적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 조국을 대하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땠는가? 조국사태에서 사적 영역이란 존중됐는가?

조국 일가족을 덮친 사건의 원인은 조국의 페르소나가 상황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이다. 정의와 준법의 이념, 공교육의 유토피아를 말하던 사람이 어떻게 불공정하게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자녀를 위해 교육의 질서를 문란케 했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페르소나를 가진 존재는 인격 없는 사물뿐이다. 인간에게 표리부동은 실존적인 조건이자 악덕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표리부동한 존재가 조국뿐인가?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어두운 사적 영역에 공적 무영등을 비추면 우리 모두 위선자가 된다.

좀더 거칠게 말하면, 인간의 본질은 위선이다. 인간의 역사는 거짓말로부터 시작됐다. 인간 사회에서 위선을 일소하려는 시도는 궁예의 미륵관심법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인간의 속을 들여다 보려는 모든 시도는 폭력과 공포를 수반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는 나치스의 강제 수용소로 전락한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위선이 그렇게까지 극악무도한 범죄인가? 주디스 슈클라의 지적처럼, 위선은 '평범한 악덕'일 뿐이다. 자유에는 반드시 위선이 수반된다. 위선이 위험한 이유는 위선 그 자체가 위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위선자를 대하는 우리가 도덕적 잔혹성에 빠져 자유를 분쇄하기 때문이다. 잔혹성은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 수 없도록 만든다. 우리 사회에서 역지사지가 통하지 않은 지 꽤나 오래됐다.

위선을 혐오하는 행위는 결국 또 다른 위선이 된다는 점에서 모순이다. 조국을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들은 사실 솔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조국이 정치적으로 사형당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적당히 선을 유지한다. 조국 일가의 범죄를 지적하는 사람 치고 자신의 전과기록을 공개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헌법상 대통령의 사면권을 비난하면서도 범죄기록의 비공개에 관해 규정한 형의 실효에 관한 법률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조국 일가의 불공정과 검찰 수사 및 재판부 판단의 공정함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병폐와 형량의 적정성, 다른 범죄와의 비교형량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요컨대 자신의 사적 영역을 철저히 보호하면서 동시에 정도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위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위선 덕분에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거짓말로라도 선을 입에 올릴 수 있기에 인간은 어제보다 좀더 선해진다. 인간은 무결점의 신이 아니다. 인간은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성장한다. 교양은 위선 덕에 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위선 혐오가 팽배해진 시점은 어쩌면 교육에서 교양이 사라지고 출세만 남게 된 시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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