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성과를 낸 세종과 실적이 없었던 정조

비범한 호학의 군주들

새 정부가 들어서고 달라질 이 나라 정치에 기대가 자못 크다. 이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선시대의 뛰어났던 두 군주인 세종과 정조를 떠올리게 된다. 과연 세종과 정조 두 사람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비범하고 출중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세자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좌전(左傳)과 초사(楚辭)를 100번씩 읽은 후 다시 또 100번을 읽었다. 몸이 좋지 않거나 병이 났어도 계속 책을 읽자 부왕 태종은 세자의 건강을 걱정하여 그곳에 있는 모든 책을 치우도록 하였다. 이렇게 책이 사라지니 세종은 병풍 사이에 남겨져 있던 송나라의 명신(名臣) 구양수와 소동파 간에 오갔던 편지 모음집을 천 번까지 읽었다고 한다. 즉위 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음식상이 들어와도 책을 덮지 않고 옆에 펴놓고 읽었으며 밤이 깊도록 계속 독서하였다. 뿐만 아니라 궁중에 있을 때에도 항상 서적과 독서로써 시간을 보냈다. 우리 역대 왕조의 문서에도 밝았는데, 기억력이 비상하여 한번 본 것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

정조 역시 이에 뒤지지 않았다. 공자, 정자, 주자의 책과 백가의 전적으로부터 우리나라 선유(先儒)의 저술까지 두루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리학의 원리와 학문하는 방법, 옛 성인들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과 과거 현자들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심오한 이치까지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살펴야 했으므로 밤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제때에 대지 못하였다. 그래도 틈만 나면 좌우에 책을 두고 밤낮으로 사색에 천성적으로 학문하기를 즐겼던 정조는 정무(政務)의 피로를 오히려 학문하는 것으로 달랬다고 할 정도로 호학(好學)했던 군주였다.

 

세종대왕(왼쪽)과 정조대왕 초상. 
세종대왕(왼쪽)과 정조대왕 초상. 

세종의 경우에는 전면적이고 반드시 실용적이었으며 또 반드시 성과를 도출해냈다. 세종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냥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결코 없었다. 반드시 고금의 각종 서적을 통하여 연구, 조사하고 현실에 맞춰 최선의 방안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렇게까지 해도 끝내 마땅한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심지어 중국에 자문을 구하여 결정하는 등 최선을 다하였다.

세종 재위 기간, 농민에 대한 세금은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에 따라 관리나 감사가 해당 지역에 나가 그 해의 곡물 산출량을 조사해 올리면 그 기준에 따라 세금으로 거두어들일 미곡의 양을 결정하였다. 문제는 조사의 정확성과 야합이었다. 관리가 해당 지역 양반과 친분이 있을 경우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별 날씨 그리고 산출량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세종은 이 문제에 무려 20년에 걸쳐 연구하고 논의를 하였다. 하지만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자 신하들이 시기상조라며 막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제도를 계속 보완하도록 하였다. 특히 토지가 척박한 지역의 주민에게 과도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도록 보완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이와 함께 산출량이 많고 신법에 대한 여론의 호응도가 높았던 전라도와 경상도의 한 고을 씩 두 고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해보라고 명령하였다. 2년 뒤에는 충청도까지 실시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이렇게 전라, 경상, 충청의 3도에 시행하도록 명하면서도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주민투표’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1430년 3월, 세종은 총 17만 2,806명의 신민(臣民)을 대상으로 공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고 그 결과 찬성은 9만 8,657명이었고 반대는 7만 4,149명으로 나왔다.

여론조사와 어전회의에서 찬성 의견이 높았지만 세종은 곧바로 신법을 실시하지 않고 보류하면서 척박한 토지에 무거운 세금이 책정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계속 보완해갔다. 대신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계속 추진하여 그 동안 반대해오던 황희와 맹사성 등도 공법 시행에 찬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세종 26년, 세종은 풍․흉작에 따라 연분(年分) 9등으로 구분하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田分) 6등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내용으로 하는 수정된 공법을 정식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한편 세종은 이과(理科)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세종은 권농의 주체로서의 임금의 입장에서 우리의 월력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힘을 기울여 칠정산을 완성하였다. 이 칠정산은 1년을 365.2425일로 파악하여 오늘날과 똑같은 정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실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월력이었던 이 칠정산의 완성으로 일식과 월식 등 서울에서 발생하는 모든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일본인 최초의 ‘정순력’이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만들어졌다. 세종은 또 장영실에게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만들게 하였는데, 이 측우기는 강수량을 푼(2mm)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고, 1639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서 발명한 세계 최초의 측우기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천체 운행 관측 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앙부일구는 대접 모양의 둥글고 오목한 시계로서 24절기가 표시되고 가운데에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이 달린 매우 정확한 시계였다. 세종은 이 앙부일구를 종묘 앞에 만들어 두고 백성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종이 다스렸던 15세기의 조선의 천문학 수준은 당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국방 분야에서도 세종의 노력과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세종 4년, 여진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대신들 중에는 남쪽으로 후퇴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조종(祖宗)의 강토는 촌토(寸土)라도 줄일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는 오히려 북진 정책을 시행하여 세종 14년에는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이듬해에는 여진족 간의 내분을 이용하여 김종서 장군을 파견하고 대대적인 북방 개척에 나서 마침내 두만강 이남의 6진을 개척하면서 남쪽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정착촌과 요새를 건설하였다. 또 세종 25년에는 압록강 이남의 4군을 설치하여 오늘날과 같은 국경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정탐 및 무기 개량의 분야를 비롯하여 작전의 운영에도 직접 참여하여 지시하였다. 예를 들어, 병사들의 활쏘기 훈련용 과녁을 무엇으로 만드느냐는 문제도 세종은 직접 나섰다. 어느 날 이동 표적을 쏘는 방안이 논의되었는데, 세종은 이 논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여 마침내 털실을 감은 공이 그 이동 과녁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종은 이렇듯 대단한 집념과 노력으로 화포의 개량에 몰두하여 화포군을 육성하였다. 한 번에 두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화포를 만들었고, 직접 진법 연구에도 몰두하여 여진족의 화살 공격에 취약한 밀집대형을 버리고 기러기 대형으로 좌우로 벌려 적을 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투 단위는 5인 1조로 조직하여 방패, 기병, 보명, 궁사를 모두 보유하는 5인 1조로 편제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종 치세에 화약 제조량은 크게 증가하였고 마침내 강력한 화포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실로 4군과 6진의 개척은 이렇듯 강력한 군사력의 존재에 의하여 성취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부터 회유책만 구사했던 남쪽 왜인들의 침략에도 단호하게 대처하여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세종과 정조, 시대적 조건이 상이했다

즉위 후 제일성(第一聲) 역시 두 사람은 사뭇 달랐다. 세종은 즉위 3일 만에 도승지 하연을 임명하면서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면서 ‘신하들과의 의논’을 내세웠다. 그러나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섬뜩한’ 첫마디로 시작하였다.

세종은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결코 권위로 밀어붙이고 억압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자신이 전달하려는 주장은 분명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사소한 문제라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만들어 제기하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과제를 던져 놓고 기다리는 방식을 취한 데 비하여 정조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 규장각 각신(閣臣)과 초계문신(抄啓文臣)들을 가르치는 방식을 취하였다. 정조는 초계문신과 규장각 각신만이 아니라 고위 문신과 성균관 유생 그리고 지방 유생을 직접 가르쳤다. 정조는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숙제 검사를 하고 자신의 앞에서 시험을 치르도록 하기도 하였다. 물론 세종 대와 정조 대의 정치 상황은 크게 상이하였다. 세종 대에는 아직 당쟁이 부재한 상태인 데다가 왕권 역시 강력한 상황이었다. 반면 정조 대는 당쟁이 가장 극성기였던 시기로서 관료 집단의 이른바 신권(臣權)이 가히 왕권을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의 과도한 발언권을 견제하고 자신의 개혁 방식을 설득하는 일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존재했다.

물론 정조는 다른 여느 군주들과 달리 백성들과의 소통에 열과 성을 다했다. 정조는 24년간의 재위 기간에 상소(上疏), 신문고(申聞鼓), 격쟁(擊錚)을 통해 무려 5천여 건의 민원을 접수하여 해결하였다. 매년 약 200건 이상의 민원을 해결하는 놀라운 정력을 보여주었다. 임금이 행차하는 곳에서도 이뤄졌던 위외격쟁(衛外擊錚)도 계속되어 사도세자 능행(화성행차)을 할 때에는 한 번에 200여 회의 격쟁을 처리하느라 열흘 가까운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다.

“결단이 부족하며, 화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실적이 없었다”, 정조의 비극

정조는 스스로 ‘스승으로서의 군주’, 즉 ‘군사(君師)’를 자부하였다. 또 ‘모든 강물을 비추는 달빛과 같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분명 정조는 대단히 총명한 군주였고, 치밀한 방략을 지닌 군주였다. 그러나 총명이 지나쳐 모든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시각을 지니고 있었고,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시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정조는 주자가 ‘정풍(鄭風)’의 시를 음란한 ‘음시(淫詩)’로 규정했던 점을 매우 논리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이 30세 되었을 때, 정조는 시경 300 조목의 의문점을 제기하여 정약용에게 조대(條對)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약용이 대답으로 작성한 책이 시경강의(詩經講義)다.

이러한 정조의 모습은 좋게 보면 호학의 군주로 평가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눈을 돌려 서양의 정세를 살펴보면 정조의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1776년에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였고, 영국에서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다. 그리고 1789년에는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였다. 그러한 세계에서 정조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의 현학”에 불과했고, 현실과 실용에서 너무나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의 약점과 실정에 대한 신하들의 준열한 비판들을 잘 엿볼 수 있다.

“관용(寬容)이 너무 지나치고 어물어물 넘기는 것이 습성을 이루었습니다.”

“기회를 만나서도 매번 결단이 부족하고 어떤 일을 당하여서도 끝내 화끈하게 처리하지 못하니, 큰일을 할 만한 자질이 있으면서도 지금껏 큰일을 해놓은 실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고 규정 사이에서만 맴돌면서 뜻을 세움에는 단단함이 모자라고, 다스림에는 그 본말(本末)을 잃었으며, 실행에 있어서는 혹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공의(公義)보다 혹은 도리어 사사로운 은혜를 앞세우며, 정신(精神)은 여러 가지 일에 너무 낭비되고, 총찰(聰察)은 자잘한 일에까지 지나치게 미치십니다.”

“뜻이 조정(調停)함에 있으면서도 좋고 싫은 것을 구분함이 없고, 정치가 탕평(蕩平)되면 도리어 악(惡)한 세력을 방지(防止)함에 소홀하십니다.”

세도정치를 자초해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다

정조의 실책은 정조의 김조순 중용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정조는 김조순을 젊은 문신(文臣) 중 학문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하여 키웠고 특히 정순왕후의 노론 세력 견제를 위하여 개혁정치의 차원에서 그를 중용하였다. 하지만 김조순이야말로 정조 사후 순조의 장인으로서 바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다. 정조가 남긴 안동김씨의 이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조선은 순조, 헌종, 철종의 3대에 걸쳐 완전히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마침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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