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느꼈던 환대와 연대감
국민주권정부의 '국민'에 우리도 넣어주시길
이재명 대통령님께,
안녕하세요. 빛의 혁명의 중심에서 윤석열 정권을 끝장낸 20대 여성입니다. 저는 광장에서 외쳐온 목소리와 우리가 그리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직접 만나 말씀드릴 기회가 되면 더욱 좋겠습니다.
대선후보 시절, 대통령님께서 마지막 유세 장소로 택한 곳은 여의도였습니다. 주권자 시민은 이곳에서 윤석열을 탄핵했습니다. 그 의지를 이어받아 내란을 종식하고 국민주권을 회복하겠다는 후보의 다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민이 승리한 12월 14일,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가 그 자리에 꼭 맞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소.
이랑의 노래는 과거의 열사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아주 평범한 청년의 언어입니다. 윤석열이 "유통기한 지난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했던 망발이 기억납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청년들이 폐기 음식을 먹습니다. 가난해서라고 하기엔 부끄러우니, 그저 버리기 아까워서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이 버려져 가는 건 애써 모른 척하면서도.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이 가난은 제 친구들의 이야기이자 곧 이 나라의 미래입니다.
우리의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공론장에서도 우리의 자리는 없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윤석열이 무시하고 이준석이 혐오했던 페미니스트요. 어렸을 때부터 조부모들에게 여자애라고 미움받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같은 반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외모 순위 매기는 걸 봤습니다. 고3 때는 강남역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청년 여성이 살해당했습니다. 대학교에 가니 미투가 터지더라고요. 이런 사회에서 제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만 성범죄 저지르지 말라, 불법촬영도 편파수사도 그만해라, 여자도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절규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빛과 무지개로 물든 윤석열 탄핵광장에 계속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대와 연대가 가득했으니까요. 12월 7일을 기억하십니까? 한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분이 발언하자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그때 저는 광장에도 저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뒤 응원봉 물결이 쏟아졌습니다. 청년 여성들이 하나둘 광장의 주축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뒤에는 이랑이 '페미니스트가 민주주의를 구한다'는 피켓을 들고 공연을 했습니다. 이후 집회를 거듭할수록 무지개 깃발이 늘어나고, 페미니스트와 퀴어 발언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성혐오로 점철된 윤석열 정권에서 묵살당한 우리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기성세대는 독재를 타도하고 투표권을 되찾아오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청년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사람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호명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 아닐까요? 우리는 광장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뿐만 아니라 사회대개혁도 주창했습니다. 사회대개혁 과제로 삼았던 모든 것들이 진짜 민주주의입니다. 차별금지법, 성착취산업 근절, 식량주권 쟁취, 노조법 2조, 3조 개정 등 말입니다.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를 없애지 않으면, 소외는 곧 '당신'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새 정부의 명칭을 국민주권정부로 정하셨습니다. 국민통합도 강조하셨죠. 가끔 그 '국민'에 우리가 포함되는지 의문이 듭니다. 윤석열 파면의 주축이었던 여성들, 퀴어들, 농민들, 그리고 수많은 소수자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계실까요? 또 표가 안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이 나라의 기둥입니다. 누군가는 우리를 마녀이고, 이단이고, 폭도고, 늑대라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주권자로서 책임도 안 지는 성녀, 정통, 치안대, 양일 바에야 그게 낫습니다. 우리는 이미 반국가세력이라는 낙인을 견뎌왔습니다. 그 '국가'는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우리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투쟁이 적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통령님도 빛으로 가득한 환대에 광장에서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새 정부에 기대를 담아 더불어민주당 진짜 대한민국 선거대책위원회에 청년위원으로도 참여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문제 해결 정책과 생활돌봄공동체법을 제안했습니다. 정치 무대에서 우리의 존재를 지우지 않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의 근간입니다. 여성들은, 청년들은, 소수자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기로 한 세대거든요.
몇 달 뒤, 더 길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판할 계획입니다. 광장을 추억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국민주권정부에서 앞으로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함께 상상하고자 했습니다. 서울에 밤 국회 앞으로 뛰쳐나간 이야기부터 사랑으로 투쟁했던 퇴진광장의 한 페이지들, 그리고 윤석열 파면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민주주의 실현의 나날을 담았습니다. 그러니 대통령님, 제 책을 읽어주세요. 그리고 저와 같은 청년 여성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미래를 열어주십시오.
언제나 대통령님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미니스트 민주시민 하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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