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오래도록 잘 살기’ 위한 한 차원 더 높은 리더십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경영학에선 ‘리더십 스타일’ 연구를 꽤 한다. 조직의 리더가 구성원의 사기 앙양 내지 동기부여를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연구들이다. 오늘날 매우 복잡한 연구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으나,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리더십 스타일에 거래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이 있다. 제임스 M. 번스 교수의 <Leadership>(1978)에 나온다. 원래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출신의 정치학 교수가 제시한 이론이 마치 경영학 이론처럼 수용된다.
윤석열은 ‘거래적 리더십’, 이재명은 ‘변혁적 리더십’의 표본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이란, 말 그대로 리더가 조직 구성원들과 ‘거래하듯’ 교류하면서 조직을 ‘합리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리더는 구성원에게 들인 비용과 구성원의 노력 및 성과를 비교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한다. 이로써 조직이나 리더가 의도하는 목표 달성을 위해 전체 조직을 이끌어 나간다. 반면,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은 그보다 통 큰 차원에서 장기적 목표나 공동체의 사명감을 강조하면서, 리더와 구성원 간의 유기적 상호작용 및 내적 성숙을 중시한다. 그 과정에서 리더와 구성원들이 서로 신념, 욕구, 가치관 등을 변화, 조직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도록 관계나 분위기를 바꿔나간다.
편의상 이 두 유형을 비교하자면, 전자가 하위 관리자에게 필요한 리더십 스타일인 반면, 후자는 최고경영층에 필요한 리더십 스타일이다. 전자는 합리적 계산에 토대한 리더십이라면, 후자는 정서적 공감에 기초한 리더십이다. 또, 전자가 돈이나 승진 등에 기반한 외재적 동기부여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의미나 사명 등을 중시하는 내재적 동기부여 방식이다. 핵심적 요소들로는, 전자는 성과에 따른 보상과 예외 관리를 들 수 있고, 후자는 모범적 카리스마, 영감적 동기부여, 지적 자극, 개별적 배려 등이다.
굳이 이런 이론을 들추는 것은, ‘윤석열과 이재명은 어찌 그리도 다른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은 겉으로는 ‘공정과 상식, 자유민주주의’를 밥 먹듯이 자주 말했지만, 속으로는 장기집권과 범죄은폐를 의도한 내란 및 외환을 통해 온 나라를 말아 먹으려 했다. 반면, 이재명은 온갖 검찰 수사로 구속 위기를 넘기거나 목에 칼이 들어오는 등 생명의 위협까지도 아슬아슬 넘기면서 마침내 당당한 대통령으로 우뚝 섰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간 윤석열은 거래적 리더십의 표본을, 이재명은 변혁적 리더십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인사관리, 의사결정, 기자회견, 책임정치 등 몇 가지 차원만 따져보자.
성과-보상 거래적 관계를 가끔 ‘격노’로 땜질했던 윤석열
윤석열은 인사관리를 할 때,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접근했다. 자신과 아내의 잘못이나 범죄 행위를 잘 덮어주고 향후 장기집권 구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들에게는 돈과 권력을 쥐어 주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도무지’ 적합하지 않다고 판명이 되어도 ‘무대뽀’였다. 성과-보상의 거래적 관계가 잘 먹히지 않을 때는 곧잘 ‘격노’했다. 이 ‘격노의 정치’를 펼치면 다시 거래적 관계들이 재정비(땜질)되곤 했다. 국가의 중요 의사결정을 하는 국무회의에서는 ‘혼자서’ 말을 독점하는 스타일이었고, 국무위원들은 종종 단순한 거수기 역할만 했다. 기자회견(도어스테핑 포함)조차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고, 정곡을 찌르며 질문하는 비판적 기자들은 ‘입틀막’ 당하거나 차곡차곡 배제되었다. 나중엔 ‘기레기’들만 남아 대통령이 직접 해주었다는 계란말이 잔치를 대서특필하는 코미디까지 벌였다.
책임정치 차원에서 보면, 한마디로, 무책임, 무능함, 무감각의 표본이었다. 취임 초기 ‘이태원 참사’에 대해 국가적 책임은 방기한 채 ‘마약’ 혹은 ‘놀다가 죽은 이들’ 운운하면서 유체이탈 화법을 반복했다. 어이없는 죽음을 가슴 아프게 애도하는 시민들은 얼굴도 이름도 없는 분향소에 가서 절을 해야 했다. ‘채수근 상병 사망’에 대해서도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아니라 진실 은폐와 수사 조작을 시도했다. 이런 면에서 윤석열은 ‘거래적 리더십’이란 말조차 갖다 붙이기 아까울 정도다. 차라리 ‘중독 조직’을 만드는 핵심 중독자라 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입틀막’ ‘사전 각본’ 대신 ‘비폭력 대화’ 방식의 이재명 기자회견
반면, 이재명은 인사관리부터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일단 인수위가 가동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예전 국무위원을 대거 유지하되, 점진적으로 새로운 인사들을 임명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김영훈 노동부장관과 정은경 복지부장관이다. 물론, 새로 등용한 인사들에도 여전히 ‘검찰공화국’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모범적 카리스마, 영감적 동기부여, 지적 자극, 개별적 배려 등 변혁적 리더십 스타일의 요소를 잘 보여준다. 의사결정을 하는 국무회의는 물론, 현장에서 만난 국민들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고 허심탄회하면서도 창의적인 의견 제시를 하는 모습은 예전에 볼 수 없던 신선한 면모다. 특히, 과거에 거수기 역할을 하던 소극적 태도의 국무위원들조차 최대한 존중하고 인내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공직자 역할을 수행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은 변혁적 리더의 모범 사례다.
기자회견 역시 ‘입틀막’이나 ‘사전 각본’ 같은 건 없이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에서 ‘비폭력 대화(NVC)’ 방식으로 이뤄진다. 비폭력 대화는 대화 당사자들 간에 수직적, 위계적, 차별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상호 솔직하게 말하고 경청하며, 상대방의 욕구나 느낌에 공감하면서 진행하는 대화법이다. 책임정치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재명은 당선 직후부터 장마가 오기 전에 상습적 침수 구간을 철저히 점검(예, 하수관로 퇴적물 제거)하여 또다시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지적했다. 남북관계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도 더 이상 비방 방송이나 삐라 등을 북으로 보내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것도 대통령 지시랍시고 권위적, 일방적 통보가 아니라 관계 당사자들과 원만한 협의와 설득을 거쳐 상호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했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민주당이 공조해 ‘3대 특검’을 신속히 진행하는 것은 시원스럽다.
이 모든 측면을 종합하면, 윤석열은 거래적 리더십 스타일을, 이재명은 변혁적 리더십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어쩌면 윤석열은 거래적 리더십이란 말조차 아까울 정도로 ‘무대뽀’ 리더십 내지 ‘조폭식’ 리더십을 보여주었는지 모른다. 이 경우, 차라리 이재명 대통령이 거래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내 나름 약간 다른 각도로 구별하자면, 윤석열은 ‘두려움’에 기초한 리더십, 이재명은 ‘즐거움’에 기초한 리더십이다.
이재명 리더십이 ‘함께 잘 사는 나라’의 만능열쇠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재명 대통령이 결코 완벽한 건 아니다. ‘비정상의 정상화’나 ‘정상성의 일상화’ 단계를 넘어 과연 ‘정상성 속의 비정상성’ 문제를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보면, 상당히 우려스런 부분도 많다. 일례로, 김건희 식 ‘주가조작’ 행위를 엄단하겠다는 결의는 큰 박수를 받을 일이지만, ‘코스피 5000 시대’란 구호는 걱정스럽다. 이것은 결국 주식시장 활성화 및 주가 상승을 꾀하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함께 잘사는 나라’와 아무 충돌 없이 달성, 유지될지 의문이다. 실은, 주식시장도 부동산시장 못지않은 투기성 경제의 장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설사 투기가 없다 해도, 주식 자체가 ‘자본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이것은 인간 노동과 자연 자원에 대한 약탈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 최근엔 ‘방산 4대강국’ 이야기를 하는데, 방산이 과연 무엇인가? 무기 산업인데, 전쟁과 파괴를 전제로 가동되는 무기산업이 번창하거나 ‘4강국’에 든다는 것은 ‘안정과 평화’를 약속한 대통령답지 않은 발상이다. 누군가 그 무기로 죽고 다치고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될 터인데, 그런 점은 무시하고 단지 ‘돈 되는’ 사업이라며 ‘국민주권’ 정부가 추진해야 할 사업인가? 차라리 ‘자본주권’ 정부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기후위기’에 대응한다면서도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수십 배 강한 LNG(메탄)를 캐나다에서 수입한다는 뉴스를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미 기후협약에 참여한 많은 나라들도 LNG 금지·축소를 논하고 있는데 말이다. 신체 온도를 능가하는 폭염주의보나 경보가 날마다 울리며 매일 온열병(열사병)으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속출하는 바로 지금이 기후위기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조금만 참으면’ 될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기후위기는 사실상 ‘자본주의’ 생산방식 및 생활방식 전반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전 사회적인 전환을 실천할 때 비로소 극복된다. 물론, 자본주의가 낳은 삶의 위기가 비단 기후위기만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노동소외, 고용불안, 대량실업, 빈부격차, 자연 생태계 파괴, 자원 고갈, 각종 오염, 기후위기, 그리고 삶의 의미 상실과 자살률 증가 등이 모두,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생활방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진정 ‘자본주권’ 정부가 아닌, ‘국민주권’ 정부가 되려면 이런 문제의식을 더욱 치열하게 가다듬으면서 제대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 대통령 ‘변혁적 리더십’에 ‘탈(脫)자본, 진(進)생명’ 더 하기를
과연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재명 대통령이 ‘코스피 5000’을 넘어 ‘탈자본’의 새 세상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진정으로 ‘함께 오래도록 잘사는 나라’를 열 수 있을 것인가? 지금부터 대통령과 깨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토론해야 할 주제다.
앞서 말한 제임스 M. 번스 교수가 1978년에 <Leadership>을 처음 내고 그 25년 뒤(2003년)에 쓴 새 책은 <Transforming leadership: a new pursuit of happiness>란 제목과 부제를 달았다. ‘행복의 새로운 추구’란 부제인데, 결국 ‘변혁적 리더십’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게 궁극적 목표란 얘기다. 일례로, 기후위기 사례만 봐도, 계속되는 폭염이나 홍수 같은 기후재앙 앞에 단지 손선풍기나 에어콘 빵빵한 쉼터 정도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갈수록 전기를 더 많이 쓰는 해법은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중독적 해법’에 불과하다. 따라서 ‘변혁적 리더십’은 이제 경영·경제의 울타리를 벗어나 정치의 광장에서 제대로 구현돼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새로운 리더십이 그렇게 ‘탈(脫)자본, 진(進)생명’을 지향하는 ‘변혁적 리더십’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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