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 박인덕의 삶과 꿈 ➁
박인덕은 1935년 11월에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리는 학생자원운동 총회와 플로리다 선교단체연합회 총회에서 연설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출국했어요. 파나마 운하를 통해 미국에 도착하여, 북미 거의 전 지역을 강연여행하다가 1937년 9월에 귀국했습니다. 당시 이미 그의 강연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 두 번을 왕복할 거리’라고 묘사될 정도였어요.
갈수록 전쟁의 위기가 심화되던 시절이라 이때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늘 돌아와서 조선의 여성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받은 기부금으로 1937년 김포 양곡에 강습소를 세워 농촌여성 지도자들을 양성했고, 소를 구입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정리되고 말았어요.
1941년 3월에는 여성 최초로 35개국을 다녔던 기록인 '세계일주기'를 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 민족에게 적합한 발전모델로서 미국도 아니고 소련도 아닌, 덴마크 농촌부흥을 제3의 길로 주목했어요. 이 시점은 이미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라서 일본의 반미감정이 고양되던 때였습니다.
씻을 수 없는 과오, 친일행위를 하다
두 번이나 독립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1939년에 친일의 길로 들어서, 녹기연맹(綠旗聯盟)에서 운영하는 일본어 강의를 듣기 시작했어요. 녹기연맹 여성부는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 및 3세를 의미하는 ‘조센코(朝鮮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기관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박인덕이 왜 이런 기관과 관련을 맺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요. 그는 1941년에 결혼 직전의 고등여학교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양있는 주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1년제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했습니다. 1943년 녹기연맹이 설립한 청화여숙(淸和女塾)으로 경영이 이관되었고 1945년에는 그마저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쇄되었습니다.
연설 잘하기로 소문난 그는 ‘나가가와 진도쿠(永河仁德)’로 창씨개명하고 1941년 『삼천리』 사장 김동환 중심으로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해 그해 9월 시국강연을 했고, 그밖에도 여러 차례 강연과 좌담 그리고 기고를 했어요. 그리고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평의원과 지도위원을 맡았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친일행위에 가담했다는 분명한 과오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의 자서전이나 그가 설립한 대학의 관계자들이 쓴 논문에는 이 부분을 모두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모든 친일 관련 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마당에 친일에 대해서 회피하기보다는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았을까요?
유관순을 가르치고 순국 뒤 그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다
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유관순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르쳤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함께 갇혀 있으면서 만났던 박인덕이,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에게 유관순의 존재와 죽음을 알려 주었던 것이었어요.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의 상징은 정신여학교 출신의 김마리아였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이화 졸업생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박인덕을 통해 소개된 3·1 운동에서의 유관순의 저항과 죽음은, 1947년 2월 28일자 <경향신문>을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박계주가 ‘이화여고 학생으로서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으며 옥중 독립만세 투쟁을 벌이다가 고문으로 옥사했다’는 요지로 쓴 「순국의 처녀」가 실렸어요.
1947년 9월 1일에는 신봉조를 비롯 정인보, 최현배 등에 의해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습니다. 11월 말 사무소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미군정청 문교부장 오천석 회장, 경무부장 조병옥 명예회장을 비롯하여 저명인사들이 고문으로 참여하는 조직의 재편이 이루어졌어요. 그들이 중심이 되어 유관순의 전기가 발간되고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시나리오에는 박인덕이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화의 다른 선생에게 유관순이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며, 변호사 선임을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관순이 옥중에서 계속해 투쟁할 수 있던 원동력을, 이화 재학시절 그에게 받았던 교육을 회상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어요.
교과서에 직접적으로 유관순이 등장하는 것은 전쟁 이후 교육과정이 마련된 후였습니다. 1차 교육과정기(1954~1963)의 초등교육용 교과서에는 ‘삼일절’(2학년), ‘유관순’(3학년), ‘삼일정신’(6학년)이라는 단원을 통하여 유관순을 언급하고 있었지요. 이로서 유관순은 조선의 잔다르크로 격상되고, 오늘날 모든 국민들에게 항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전적 영문 소설 『9월 원숭이』로 미국에 한국을 알리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자, 기독교인인데다 미국 유학생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잘했던 박인덕은 50세가 넘었음에도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의 요청으로 행해진 강연은 물론이고, 하지 장군의 요청으로 미국에 가서 했던 연설에는 한국에서의 ‘인자한 구원자’로서의 미국이 주요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1946년 6월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 가담하여,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하지 중장의 축사를 대독했고 버치 중위의 축사를 현장 통역했습니다. 이날 이승만과 김구가 참석해서 축하 연설을 했지요. 러치 민정장관이 군정청의 우수직원을 표창할 때, 정일형 조병옥 오천석 최현배 등과 함께 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한국 대표로 미국을 방문했다가 귀국했는데요. 하지 중장의 요청으로 다시 1946년 12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1961년까지 돌아오지 않고, 미국 각지에서 한국의 실정에 대해 강연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는 자전적 영문 소설 『9월 원숭이(September Monkey)』를 미국에서 출판했어요.
자신이 원숭이 해인 1896년 병신년의 9월에 태어났다는 것을 제목으로 삼았는데, 이 책은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일간신문이 서평을 실었고, 초판 5천 부가 3주 만에 매진되어 비소설 부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세계 10여개 국에서 번역되었고 점자책으로도 나왔습니다.
유명 작가였던 로버트 오라 스미스(Robert Aura Smith)가 <뉴욕 타임스> 1954년 11월 7일에 기고한 서평이 있는데요.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속 깊이 감동을 주는 강렬한 인간의 기록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는 좀처럼 이 책을 끝까지 읽을 독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9월 원숭이』에 관한 서평을 쓴 필자들이 이 자서전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친근한 나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거나, “한국의 생활에 관하여 간접 정보”를 준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서평 필자는 “한국의 고대 문화, 민족, 오랜 독립 투쟁 그리고 부흥을 위한 노력에 관한 아주 훌륭한 정보 출처”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인덕실업고로 열매 맺은 평생의 꿈, 한국 ‘베리아 학교’
그가 이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베리아 학교’를 설립한다는 꿈을 위해서였습니다. 70세가 되던 1955년 9월 워싱턴 D.C.에 ‘한국 베리아 재단’(Berea in Korea Foundation)를 설립하여 기금 확보에 나섰어요. 강연에서 받는 수입과 후원자들의 성금 등을 모두 넣었지만 학교를 설립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9월 원숭이』를 통해 얻은 수익도 물론 재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호랑이의 시간(The Hour of the Tiger)』(1965) 등 여러 권의 저서를 영문으로 출판했어요. 이태영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옷 한 벌 새로 해 입지 않고 십 년이 되도록 동정만 새로 달아 입으면서 꼭 버스만 타고 다니는 내핍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한국 베리아재단은 드디어 1962년에 한국에 재단을 만들었고, 1964년에 학비가 없고 기숙사까지 제공하는 인덕실업고등학교를, 월계동에 설립하였습니다. 1972년에는 예술공과전문학교를 창립했는데, 교장 및 학장 역할은 원래 음악을 전공했던 딸 김혜란이 맡았습니다. 그렇게 평생의 꿈을 실현한 그는, 1980년 4월 3일 84세로 눈을 감았어요.
역사학자가 꼭 들려주고 싶었던 한 여성의 치열했던 삶
박인덕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해인 1896년 진남포의 구석진 마을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의 지배와 미군정 그리고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던 1980년까지 엄혹한 긴 세월을 쉴 틈 없이 부지런하게 살았던 인물이었어요. 그리고 먼저 배운 사람으로서 민족 특히 여성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일제하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기 여성이었음에도, 두 차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감옥을 다녀왔어요. 선교사들의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독자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세계 35개 국을 다니며 7천 회에 가까운 대중강연을 하였어요. 달까지 세 번을 왕복할 거리라는데, 야간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늘 한복을 입고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그는 일제 말기 5년 동안 친일행위를 했던 흑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당시의 종교인, 교육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같은 부끄러움을 범했지요. 그것을 은폐해서는 안 되며 분명한 비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전통적 사학기관의 설립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문제이지요.
역사학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일생을 보게 되는데, 긴 인생을 통해 과오가 전혀 없는 인물을 찾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물은 실제보다 너무 부풀려 있거나, 부당하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더군요. 시대를 앞서서 치열하게 살다간 과거의 인물에 대한 종합적이고 객관적 평가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인덕의 경우, 무엇보다 1929년에 가난한 학생들이 등록금에 구애받지 않고 학교를 다니며 스스로 일해서 학비를 마련한다는 미국 베리아 대학의 방침에 감명을 받고, 그것을 한국에 도입하기 위해 평생을 끊임없이 노력한 점에 주목했어요.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 인덕대학을 설립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꼭 한번 그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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