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려난 뒤 측근과 가족 모조리 살해 당해
당사자는 섬에서 고독사…복권사면 안돼
'잘못하면 왕도 쫓겨난다’는 경계로 작용
민주공화국 배신한 손바닥 ‘王’ 사면은 없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은 충신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허용되니 그 하나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인데요. 왕조란 '천명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천명(命)이 바뀌는(革) 것이 혁명입니다. 임금의 가문이 바뀌기 때문에, 새 왕조는 다른 성(姓)을 갖게 되어 곧 역성인 것이지요. 그래서 역성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바뀐 것은 역성혁명이었어요. 물론 그에 반대하다가 죽음을 당한 정몽주같은 인물이 있었고, 다른 이들 가운데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향권을 장악했다가 나중에 사림 세력으로 다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역성혁명에 순응하여 불사이군을 버렸고, 공신이 되어 훈구세력이 되지요.
다른 하나는 반정(反正)인데, ‘그릇된 것을 뒤집어서 바로 한다’는 뜻입니다. 곧 폭군을 몰아내어 새로운 임금을 세우는 쿠데타를 말하는데요. 조선 왕조에서는 두 차례 있었는데, 바로 폭군이었던 연산군과 혼군으로 불리웠던 광해군이 그 경우입니다. 오늘은 왕위를 빼앗긴 후에 찾아온 그들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해요.
조선왕조에서 가장 정상적인 과정으로 왕이 된 연산군
연산군은 1476년 11월 7일(이하 날짜는 모두 음력)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조선 왕조에서 27명의 국왕 가운데 8명에 불과한 적장자로서, 왕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숙종을 제외한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경종, 현종, 순종 일곱 왕들은 모두 단명했거나 왕위를 빼앗겼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노산군은, 사망한 지 무려 241년 만인 숙종 24년(1698년)에 비로소 단종으로 복위되었어요. 하지만 연산군은 폐주가 된 후, 대군도 아닌 군으로 강등됐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광해군과 함께 끝내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재위 기간 기록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르고 있어요.
연산군은 1476년생으로 왕세자 수업을 정식으로 받고 18살이던 1494년에 즉위하였습니다. 30살인 1506년에 폐위되고 두 달 만에 사망했어요. 그가 왕으로 있으면서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알고 계시죠? 여기서는 반정으로 쫓겨난 후에 벌어진 처절한 최후에 집중하려고 해요.
반정으로 폐주가 된 연산군의 처참한 말로
반정세력은 창덕궁을 에워싼 후, 연산군에게 국새를 내놓고 거처를 동궁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날이 밝은 후 왕대비 정현왕후 앞에 나아가 거사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새 국왕을 승인받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반정세력에 의해 갑자기 추대된 진성대군은, 바로 그녀가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어요.
연산군은 궁궐의 화재를 틈타 민간 옷으로 갈아입고 도피하여 민가에 숨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신수근, 임사홍 등 그의 측근들 수십명은 바로 살해되었고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돌에 맞아 죽었어요. 연산군은 폐위를 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도로 옮겼습니다.
그의 왕비 신씨는 폐서인되었고, 10살도 안된 연산군의 세자 이황을 비롯한 네 명의 왕자들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훗날 이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지요. 그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했다는 연산군은 2개월 만에 역질과 화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연산군을 배신한 시아버지에 의해 강제이혼 당한 공주
연산군은 요즘 말로 하면 ‘딸바보’라고 할 수 있었어요. 재위 8년째 되던 해에 12살 정도 된 휘신공주를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부마였던 구수영의 아들 구문경과 혼인을 시킨 후, 온갖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아무리 대간들이 비판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집을 지어 주고, 때때로 큰 선물을 하사했어요.
구수영은 연산군의 비위를 잘 맞추고, 그 뜻에 잘 영합하여 승진이 빨랐습니다. 사신(史臣)은 "구수영은 자질구레하고 용렬한 무리인데 임금의 뜻을 엿보아 영합하고 아첨하기를 잘하며 남몰래 미희(美姬)를 바쳐 총애를 굳힘으로써 특별히 1품으로 승진되니, 사람들이 더욱 비루하게 여겼다"고 했어요.
그러던 그가 연산군을 배신하고 중종반정 당일에 합류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중종은 공주와 구문경의 직첩을 거두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연산군이 내려 준 물건 및 집과 토지, 노비 등을 모두 빼앗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구수영은 아들과 공주를 강제 이혼을 하게 만들었어요.
조선왕실의 왕녀로서 결혼 후 시집에서 쫓겨난 경우는 휘신공주뿐입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대략 16세 정도로 추정되는데요. 그런데 2년 만에 중종의 명에 따라 다시 구문경과 재결합하여 아들 구엄을 두었습니다. 연산군의 아들이 모조리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딸이 제사를 지냈고, 대대로 외손으로 제사를 지냈지요.
의리 지키다 목숨 잃은 신수근, 충신의 반열에 오르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이 된 진성대군의 장인입니다. 그는 반정에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딸 때문에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고 거절했지요. 결국 그는 반정 후 동생들과 함께 처형되었고 누이는 폐비가 되어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되었습니다. 딸은 왕비로 책봉된 지 7일 만에 폐비가 되었어요. 바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반정참여를 거절했다가 목숨을 잃은 신수근은, 230여 년 후인 1739년 영조 15년에 복권이 되었어요. 왕이 직접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글을 써서 내려 주었습니다. 심지어 정몽주와 동격의 충신으로 재평가 되었어요. 중종의 아내였던 그의 딸도 왕후로 추숭되면서 단경(端敬)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된 광해군의 ‘폐모살제’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어요. 선조에게 아들이 많았지만, 적자가 없는 데다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차남인 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분조(分曹)를 이루어 전쟁의 일선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1602년에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어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했어요. 하지만 쉽게 내치지 못한 상태에서,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너무 어린 점을 들어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무려 14남 14녀를 둔 선조의 왕위를 계승한 광해군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는데요. 여기서는 그가 반정의 대상이 된 이유와 말년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폐모살제’였는데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킨 것이지요. 더구나 자신의 친형이었던 임해군도 죽였습니다.
반정으로 쫓겨나 유배지를 전전했던 광해군
1623년 3월 13일 밤에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이 일어났습니다. 이때에는 이복동생 정원군의 아들로서 광해군에게는 조카가 되는 능양군이 직접 거사에 참여하였고 나중에 인조가 되었어요. 창덕궁에 있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피신하였고,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습니다.
광해군은 탈출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었어요. 대비는 그를 곧바로 처형하려 하였으나, 반정세력은 그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궁녀 김개시를 비롯하여 정권의 핵심이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 몇십 명을 참형에 처했어요. 광해군은 왕비였던 유씨 그리고 폐세자 부부와 함께 강화에 위리안치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자는 강화에 유폐된 지 얼마 안 되어, 땅굴을 파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체포된 후 처형되었습니다. 이어서 세자빈은 목을 매어 자결했어요. 문성군부인으로 강등된 왕비는 다음 해에 병으로 죽었으며, 광해군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제주도에 유폐되어 1641년, 67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유배지 제주도에서의 외로운 죽음과 외손봉사
그는 도착해서야 자신이 제주도로 왔는지를 알았다고 하지요. 제주목 관아 근처에서 외부 출입이 차단된 채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문을 잠그고 자물쇠로 봉한 후, 집 밖을 병사들이 교대로 지켰다고 합니다. 광해군이 죽자 제주 목사가 자물쇠를 부수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고 하는데요.
이시방 목사는 바로 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유배 시절 여종으로부터 늙은이로 불리며 모욕을 당해도 묵묵히 견뎠다고 하는데요. 광해군이 눈을 감은 1641년 음력 7월 1일을 전후해 제주에 큰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 뒤 제주에서는 이 시기를 전후해 내리는 비를 ‘광해우’라고 부른 것으로 전해지지요.
그에게는 1619년에 태어난 딸이 있었는데, 반정에 의해 서인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녀의 친모인 소의 윤씨는 반정 당시 처형되었고 그녀는 20세가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광해군이 죽자 잠저인 이현궁에 살게 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고 25살에 6살 연하의 박징원과 혼인을 시켜, 외손봉사로 이어졌습니다.
왕권 행사를 조심하게 만들었던 반정에 대한 인식
두 개의 반정을 비교하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두 차례 모두 왕실 서열이 가장 높은 대비의 허가를 받기까지 기다렸다는 것이지요. 중종반정의 경우 반정군이 궁궐을 에워쌌지만, 대비의 허가가 날 때까지 대기했습니다. 인조반정에서는 인목대비에게 옥새를 넘기고 대기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반정 세력은 국왕을 겁박하거나 체포하였지만 목숨을 살려준 것은 물론 극단적인 죄인 취급도 자제하였습니다. 특히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의 목을 베어 복수할 것을 강경하게 요구하였지만 반정군은 광해군을 보호하였어요. 그 이유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보호했다기보다 가능한 한 왕조체제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정은 정치적 일탈이 아니라 조선왕조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한 축이었어요. 반정은 매우 비상한 상황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정치 질서 속에서 비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국왕이라도 정치 질서에 어긋날 때 신하들이 축출할 수 있다는 인식은, 왕권의 행사를 스스로 조심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쫓겨난 왕에게 사면이나 복권은 없었다
지난 해 12월 3일 대통령 윤석열은 전혀 법적 요건도 갖추지 않고 비상계엄을 선포했어요. 친위쿠데타를 통해 왕이나 다름없는 영구집권을 꿈꾸었습니다. 다행히 민주시민들의 적극적인 대처와 계엄군의 소극적 태도 그리고 야당의 기민한 표결로 실패로 돌아갔지요. 그럼에도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보다는 나라를 분열과 혼란으로 몰아갔습니다.
하지만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가 가결되었고 구속에까지 이르렀어요. 그리고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파면되었습니다. 이로서 헌법적 책임은 완료되었지만, 내란 우두머리로서의 형사적 처벌이 남았어요. 판사와 검찰총장의 월권으로 감옥에서 나왔지만, 다시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가능한 판결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밖에 없지요.
왕조국가에서도 폐주에 대해서는 비록 목숨은 살려 주었지만, 죽을 때까지 사면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복위는커녕 그런 논의조차 제기된 적이 없었어요. 따라서 손바닥에 ‘王’이라는 글자를 쓰고 대통령이 된 후 민주공화국을 배신한 윤석열에 대해서도, 결코 사면이나 복권이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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