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포 천재 소녀, 이화학당 교사가 되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결혼으로 인한 불행
30세에 남편, 두 딸 두고 홀로 미국 유학길
5년만에 돌아와 첩 둔 남편에게 위자료 이혼
대한민국에서 한국여성사를 강의하는 유일한 남자 교수’라는 말을 들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인덕이라는 분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다시 조명해 보려고 했는데, 계속해서 박인덕이 함께 이름이 나왔어요.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가장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신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때의 친일행위만을 부각시키거나, 반대로 친일은 빼고 업적만 칭송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일반적으로 신여성하면 나혜석, 윤심덕, 김일엽, 김명순 등을 기억합니다. 대부분 예술인이었고 불행한 사생활을 살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지요. 하지만 박인덕은 끊임없이 도전해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 글을 위해서 관련 논문과 박인덕의 저서들, 그리고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을 통해 원사료들까지 모두 찾아 보았어요. 그에 대한 평가에 앞서서 사실에 입각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두 회 분량으로 나누기로 했어요. 이번 기회에 우리의 신여성들이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았는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진남포 천재 소녀, 이화학당 교사가 되다
그는 1896년 9월에 평안남도 진남포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억양기리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머니는 딸에게 남장을 시켜 서당에 보냈어요. 그러다가,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삼숭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나중에 신여성의 대표가 된 윤심덕, 김일엽이 동급생으로 함께 다녔지요.
그런데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28일자에 ‘총명이 과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어요. ‘진남포 삼숭여학교 졸업생 박인덕은 나이 열세 살인데 총명지혜가 출중한지라. 그 모친이 중학교에 보내려고 하나 가세가 빈한하여 경비를 마련할 도리가 없더니 진남포 유지 신사들이 의연금을 내어 가을 개학에는 상경하여 유학케 한다더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기대를 안고 서울로 올라와서 이화학당에 입학했습니다. 1912년 중학부를 졸업하고, 대학부에 진학하여 1916년에 제3회로 졸업했어요. 재학 시절 이화학당의 토론과 연설 모임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들이 여는 공개 연설회는 전문학교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이화학당의 강당은 늘 가득 찼다는 기록이 있어요.
박인덕은 이문회가 낳은 연설계의 스타였습니다. 그는 3회 졸업식에서 대표로 영어 연설을 했다고 하지요. 언론에 의하면 서울의 거리에서 어린이들이, ‘노래 잘하는 박인덕, 인물 잘난 박인덕, 연설 잘하는 박인덕’이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딸 낳으려면 박인덕 같은 딸을 낳아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지요.
당시 그녀를 묘사하는 기사를 보면 “대리석에 조각해 놓은 부조 모양으로 아침이슬을 머금은 듯한 한 송이 백합꽃” 같은 자태를 지녔으며, 수백 년 만에 한 번 나타날까말까 할만큼 재주와 미모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재색을 겸비하고도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철혈여성”으로 모든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이화의 여왕’이었다지요.
그는 졸업하자 바로 모교의 교사로 근무하면서 영어, 체육, 음악 등을 가르쳤습니다. 천안에서 올라온 유관순이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요. 일본에서 돌아온 김마리아가 소집한 회의는 바로 이화학당 기숙사에 있는 박인덕의 방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모인 여교사들은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를 논의했어요. 3월 5일에는 시내 여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박인덕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3월 10일 수업 중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지요. 김마리아, 나혜석 등이 함께 심문을 받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6호 독방에 갇혀 있던 그는, 8호 감방에 있던 유관순을 만났어요. 그리고 7월 24일 먼저 옥문을 나섰는데, 나중에 유관순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결혼으로 인한 불행
그는 석방 이후 이화학당 교사로 돌아왔지만, 10월에는 김마리아와 함께 대한민국독립애국부인회에 참여해서 서기를 맡았어요. 그런데 오현주의 배신으로 12월에 일제히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취조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52명 가운데 회장 김마리아 등 9명만 기소되었고, 박인덕을 비롯한 다른 임원들은 불기소 석방되었어요.
미국인 선교사들은 그가 독신으로 남아 미국 유학을 다녀 온 후, 이화학당을 이끌어 나갈 후계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대를 저버리고 1920년 7월 이혼남 김운호와 결혼했어요. 이로써 이화학당을 떠나게 되었고 그 역할은 2년 후배였던 김활란에게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도 친구들도 참석하지 않은 ‘장례식 같은 결혼식’을 했다는데요.
그는 결혼 후 남편의 파산과 첩의 존재로 말미암아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921년부터 배화학당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영어 가정교사를 비롯해 하루 14시간을 일해서 두 딸과 집안을 책임졌어요. 그러는 중에도 영어 작품을 번역해서 문학동인지에 발표하고, 1923년에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을 맡아 금연·금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30세인 1926년 8월에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어요. 당시 동아일보는 “여사가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두 따님, 늙은 어머님을 떠나 얼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밟게 된 것은 여사의 마음 가운데 ‘조선 여자 사회를 위해 좀 더 잘 배운 일꾼이 되어 보자’ 하는 결심이 얼마나 깊은지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불행 이겨내고 날개 달게 된 미국 유학
1926년 조지아(Georgia)주의 웨슬리안 대학(Wesleyan College)에 장학금을 받고 3학년으로 편입학해서, 2년 만에 사회학 학사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에 입학하여, 1930년에 교육학 석사를 받았어요. 1928년 2월 뉴욕에서 근화회가 조직될 때, 회장으로 추대된 김마리아와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미 웨슬리안 시절부터 지역에서 대중강연을 시작했던 그는, 4년마다 열리는 학생자원봉사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1928년 1월 1일의 폐막행사에서 극동지역 대표로서 3천명의 청중 앞에서 영어로 연설을 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격찬을 받고 졸업 후에 순회간사로 임명되어 미국 전 지역과 캐나다를 방문하며 강연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주제였는데요.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모든 발견 중에서도 조선에서 여성성을 발견한 것은 가장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발견은 바로 기독교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 덕분으로 우리 어머니가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고, 어머니를 통하여 제가 혜택을 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연설을 다니던 가운데 평생 꿈이 되는 학교의 모델을 발견했어요. 바로 켄터키 주의 베리아 대학이었습니다. 1855년에 창립된 이 학교는 등록금이 없는 대신, 학생들이 교내의 다양한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 했어요. 그는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평생 노력했습니다. 한국의 베리아 대학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어요.
그는 항상 간편한 짐만 싸서 그레이하운드 야간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20개월 동안 642번의 연설을 하고 10만 km 이상을 돌아다녔다는데요. 그러는 가운데 그가 이화학당에 다니는 내내 장학금을 보내 주었던 독지가를 직접 만나는 감동적 순간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1931년에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귀국하는 길에는 유럽 순회강연을 다녔습니다.
강연 여행에서 만난 영국의 저명한 사회인류학자 마가렛 리드(Margaret Read)의 초청으로 유럽 강연 길에 올랐는데요. 이어서 벨기에에서의 강연 초청을 계기로 유럽 각지와 러시아,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 중동, 인도, 미얀마, 싱가포르 등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덴마크의 협동조합운동과 교육방식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았지요.
위자료 주고 이혼한 최초의 여성, 여성운동의 기수가 되다
1931년 10월에 귀국했을 때 윤치호의 사회로 대대적인 환영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5년 만에 돌아왔지만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어요. 자신이 어렵게 강연활동으로 번 돈을 생활비로 보냈지만, 남편은 첩을 두고 있었습니다. 결국 미국에서 귀국한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인 1931년 10월 26일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하였습니다.
이로써 박인덕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이 되었어요.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이혼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엄청난 주목을 받았고, 온갖 언론에서 헐뜯고 ‘한국의 노라’라고 하는 등 선정적인 표현을 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후에 그는 자신이 꿈꾸던 활발한 사회활동에 전념했어요.
그의 활동은 조선직업부인회를 통한 여성운동과 덴마크식 협동조합을 통한 농촌운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박인덕은 조선직업부인회 회장으로서, 여성이 경제권을 가져야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면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로, 1933년 경성부인대운동회를, 1934년 한강인도교에서 전조선여자빙상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했습니다.
아울러 양복 강습회, 여성경제 강연회, 중국요리 강습회 등을 성황리에 열고 거기에 모인 여성들로 가정부인협회를 발족시켰지요. 1934년에는 당대의 패션 아이콘답게, YMCA 강당에서 조선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해, 개성있고 실용적이며 밝은 색상의 예쁜 옷을 입자는 캠페인을 했습니다. 끊임없는 아이디어로 여성운동의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어요.
농촌여성들을 위한 헌신
그는 농민의 90%가 자작농인 농업부국 덴마크의 협동조합체계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선교단체와 직업부인협회가 보내준 후원금으로 농촌사업을 시작했어요. 농촌여자사업협찬회가 조직되어 40여명이 참가했습니다. 1932년에 『丁抹國民高等學校』라는 책을 발간해서 직업과 노동의 가치를 알렸는데, ‘丁抹’은 덴마크의 한자 표기이지요.
1933년에는 감리교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를 건립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마다 기차, 버스, 수레를 타거나 걸어서 한 마을씩 다니며 야학활동을 했습니다. 1935년에 열린 농촌여성사업 경과보고회에는 윤치호 등 1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어요. 1932년 봄 이화여전에 입학했던 이태영 박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미모와 더불어 당시에는 상상도 못하던 아름다운 꽃무늬의 한복을 입은 맵시가 어찌나 고와 보였던지. 그 분은 팔방미인이었다.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던 선생님은 늘 한복만 입었다. 미적 감각이 넘쳐흐르는 영어를 굉장히 능숙하게 구사했는데, 그 제스쳐나 표현방법이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분의 정신적 충만함은 제자들에게 교훈이 되었다. 겉으로 분위기는 서구적인 세련미의 극치를 달렸음에도 내면적 세계에는 민족생활의 개선과 정신의 개혁을 요구하는 개척자적 애국정신에 가득 찼었다. 늘 성경 말씀에 비유하면서 애국과 개혁을 주장했는데 우리들은 감명받아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우리나라가 부강하려면 농촌이 선진화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귀국 후 농촌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다. 신생활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을 위해 경기도 양주군 금포면에 마을협동조합을 설립하였을 때, 추종자였던 우리들 20여 명도 후원클럽을 만들고 푼돈을 모아 소를 사서 보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2년 만인 1935년에 강제해산 되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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