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판사 인사권 행사하는 유일한 나라
일원화된 중앙집권제, 정치 종속성 구조화
대법원장의 비서조직, 법원행정처 폐지돼야
국회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최근 대법원의 판결과 관련하여 “사건의 결론 여하를 떠나 최고 법원의 판결과 법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필요하다”며 강변하였다.
그런데 이 법원행정처는 과연 무슨 조직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법원행정처란 한마디로 대법원장의 비서조직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기 법원행정처장의 건배사는 “하라면 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였다. 이 건배사는 임기 5년 내내 계속되었다.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재판을 보조하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법관에 대한 감시, 감독기관으로 기능하면서 인사관리실이나 기획조정실이라는 시스템을 통하여 법원 전체를 통제하는 대법원장 1인 체제 구축을 위한 비서기구로 작동해왔다. 역대 대법원장과 대법관, 법원장 등이 대부분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을 거친 판사 중에서 배출되었다. 그간 법관이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며 법관 본연의 재판 업무와 무관한 법원 행정과 법관의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법원행정처를 거친 법관이 다시 법원장과 대법관 등 요직을 차지하면서 법관 조직이 관료화되는 악순환은 사법농단 사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어왔다. 즉, 법원행정처 상근직이 승진의 발판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법원행정처가 법관 인사를 담당하면서 승진 인사에 민감한 법관들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사법부 전체가 관료화되어온 것이다.
특히 대법원장이 행사하는 판사의 임명권, 특히 보직과 승진결정권이야말로 사법권의 독립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근본적으로 각각의 법원은 사법부 최상층이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법원(my court)’을 이뤄내야 한다. 이는 사법민주화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법관 계급제 폐지는 이를 위한 핵심적 요소이며, 법관계급제의 중심에 서 있는 법원행정처의 폐지는 변혁의 출발점이다.
법원행정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사태 이후 사법농단 기획의 주범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축소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현 조희대 대법원장에 의해 다시 거의 ‘복원’되었다. 이 법원행정처는 일제 잔재다. 법원행정처는 일본 강점기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은 제도로서 일본 제국 시대에 일본의 전체 법원과 재판관을 지배, 통제했던 사법성(司法省)을 그대로 모방한 제도이다.
최근 대법원은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재판으로 국민을 크게 경악시켰다. 이 파기환송심을 맡은 고법 역시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사건 기록 전달과 배당, 기일 지정, 소환장 송달까지 속전속결 전례 없는 속도로 처리했다. 대법원만이 아니라 고법까지 판사들이 이렇게 마치 군사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 법관 서열 제도는 골품제도나 카스트에 비유된다. 고위법관 출신 인사들이 등산길에서도 서열순으로 걷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법관 인사권은 법원행정처의 보좌를 받는 대법원장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으며 그 인사 절차의 투명성은 전혀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나라 사법부는 독립된 재판기관인 개개의 판사들에 의한 동지적 결합이 아니라 철저한 서열에 의해 조직된 상하간의 ‘관료적’ 결합이다. 관료화된 이러한 피라미드 구조 하에서 판사들 사이에서 오직 ‘승진’을 통해 이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옮겨가고자 하는 욕망들이 팽배하게 된다. 내란수괴 윤석열을 구속 취소하고 온갖 특혜를 제공하고 있는 지귀연 판사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행태는 이 나라의 왜곡된 사법 시스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대법원장이 전국의 판사들을 절반씩 나눠 매년 인사를 한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판사들은 2년에 한 번씩 인사를 당한다(지난해부터 재판장 임기를 2년에서 3년으로, 배석판사 임기는 1년에서 2년으로 늘리기로 했지만 기실 그 핵심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런 나라가 없다. 온 나라 판사의 인사권을 대법원장 한 사람이 쥐고 흔드는 나라가 우리나라 외에 또 어느 나라에 존재하는가?
판사가 인사에 신경 쓰게 되면 ‘헌법과 법률과 양심’이 아닌 ‘인사권자의 입맛’에 맞는 재판을 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법관 인사이동을 제한해야 하는 이유는 판사가 인사 이동의 대상이 되면 재판의 독립이 심각하게 침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법관법에 관한 유럽 헌장(European Charter on the Statute of Judges)>은 원칙적으로 판사의 동의 없이 근무지를 바꾸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독일 기본법 제97조 제2항은 법률의 판결이나 법률이 정하는 형식 및 이유에 의해서만 법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전보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법관의 전보 인사를 금지하고 있다. 특정 법원 법관으로 임명되면 퇴직까지 계속 한 법원에서 근무할 수 있다. 독일의 법원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연방과 주로 분리되어 있고, 의회를 비롯하여 변호사단체, 행정기관 그리고 각종 이해집단 등의 사회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음으로써 원심력이 작용한다. 더구나 법원 조직이 행정법원, 재정법원, 노동법원 그리고 사회법원 등으로 구분되어 있어 구심력이 적게 미친다. 판사 직급이 여러 단계로 나뉜 프랑스에서는 판사를 승진 발령하는 때에도 근무 장소를 변경하려면 해당 판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본래 독립기관이어야 할 법관에 대하여 상급 판사가 근무평정을 하고, 중립성이 의심되는 인사위원회가 법관들에 대한 인사 과정을 심의하는 인사 시스템에서 법관의 독립을 운위하기 어렵다. 법원행정처 인사관리실을 통한 관리, 통제는 상명하복의 계급질서 속에 모든 법관을 편입시키게 된다. 이는 마치 ‘검사동일체’ 원칙처럼 일종의 ‘법관동일체’의 원칙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 법관의 독립은 부정당하고 있다. 이 나라 사법 시스템은 상명하복을 전제로 하여 인사와 조직이 결합되면서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일점식(一點式)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상의 승진체계 그 자체는 인사권자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만든다는 직선적인 인과관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법관들의 집단의식 내지는 직업의식에 작용하여 체제순응적 법관을 양산하고 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법부란 ‘조직’이 아니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 명 한 명의 법관은 헌법과 법률 및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할 것이 요구되고 있는 독립된 헌법기관이다. 한 명 한 명의 법관이 곧 심판기관이요 사법부이다. 따라서 한 명 한 명의 법관이 소신껏 재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곧 사법권의 독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법부는 군사 독재시대의 사법부의 틀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상급자에 의한 주관적 근무평정을 전제로 한 피라미드식 다단계 승진구조가 관철됨으로써 법원 내부의 관료주의가 심각한 상황이다.
일제 강점기 이래 우리나라의 법원은 관료적 폐쇄성을 바탕으로 하는 계층구조로 일관되어 왔다. 법관은 고시에 합격한 영재로 충당되는 ‘순혈주의’가 관철되었고, 이들은 법조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연공서열의 승진 사다리라는 계급제적 관료주의 구조 속에서 구축하였다. 더구나 법관의 임용과 보직발령 등이 모두 대법원장에게 집중되고,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라는 거대한 행정조직을 활용하여 이들에 관한 인사정보와 업무정보 등을 수집, 확보하고 실질적인 인사 권력을 행사하였다. 2016년 7월 기준으로 대법원장이 임명·제청·추천·위촉할 수 있는 자리는 약 1만 6,092개에 달했다. 법관 2,968명과 법원공무원 1만 2,995명에 대한 인사권은 물론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 구성에 관여할 수 있는 자리가 129개로 집계되었다. 그야말로 제왕적 권력이다.
결국 우리나라 사법부의 법관 인사제도는 수많은 승진단계가 존재하고 이를 사법구조와 직결시킴으로써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중앙집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원화된 중앙집권체제를 토대로 하여 정치권력이 법원 상층부를 경유하여 하부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체제로 귀결되기 때문에 사법의 정치종속성이 구조화된다. 대법원장 휘하에 판결 성향도 유사하고 자신의 ‘독립적인’ 의견을 내세우지 않으려는 법관으로 꽉 짜인 피라미드 형태로 열을 지어 서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피라미드의 정점인 대법원장 1인만을 자기 사람으로 임명해도 전체 사법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란수괴 윤석열이 임명한 대법원장 지휘 하에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법부의 일련의 ‘비정상적인’ 사태들은 이를 분명히 증명해주고 있다.
사법부가 제대로 서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나라 사법부는 진정 다시 태어나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법 시스템 왜곡의 핵심 요인인 지금의 ‘제왕적 대법원장제’는 반드시 조속히 혁파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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