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 목사 스파이 암살자’ 와 극우의 부활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무지 혹은 오해, 두 가지이다. 먼저 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한국의 극우 집회 같은 데서 그의 이름이 쓰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본회퍼의 이름은 그렇게 무지에 의해서 모욕되고 더럽혀진다. 본회퍼를 아는 사람들도 그의 ‘행동’과 실천 양식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가 직접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며 나치와 전투를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런 식으로 직접 싸우지는 않았다. 그는 늘 기독교의 원칙을 존중했고 종교의 언어로 나치와의 전쟁에 나섰다. 그는 기독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원칙주의자였다. 그의 무기는 침묵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맞서 싸우는 용기였다.
첩보 스릴러 같은 제목, 그러나 지루하지 않은 좋은 전기 영화
2024년에 ‘본회퍼 : 목사 스파이 암살자’란 영화가 나온 것은 본회퍼에 대한 그같은 모든 무지와 오해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본회퍼의 나치 투쟁기를 있는 그대로 그려 내자는 의도로 보인다. 그래서 원제도 그냥 ‘본회퍼’이다. 뒤의 부제는 수입사가 붙였으며 영화의 원래 목적을 다소 왜곡한 셈이 됐다. 마치 본회퍼가 첩보전을 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해석을 붙인 셈이다. 이 영화는 첩보 스릴러가 아니다.
전기 영화는 두 가지 계곡을 오가며 줄타기를 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어떻게든 대중적 재미를 채색함으로써 지루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지나친 비장감은 자칫 모든 걸 외면하게 만든다. 영화 ‘본회퍼 : 목사 스파이 암살자’는 그 줄타기에 매우 신경을 쓴, 그래서 전체 서사를 꽤나 예민하게 짠 작품이다. 아주 재미있지는 않지만, 역사적 팩트에 충실하며 무엇보다 정직하고 진실돼서 영화를 보는 내내 묵묵하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영화를 가리켜 흔히들 좋은 영화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매번은 아니지만 종종, 아주 가끔은, 교훈적이고 좋은 영화를 봐야 한다.
본회퍼의 삶은 엄청나게 격렬했지만 영화는 그 파동을 의도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상당히 까칠한 시선으로 보면 ‘본회퍼 : 목사 스파이 암살자’는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치고 절규하는 것 정도 외에는 투쟁의 모습도 다이나믹하지 않다. 최소한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 프로젝트인 ‘발키리 작전’에 참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모의와 실행, 실패와 체포의 과정을 그리는 데 있어 서스펜스가 너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영화는 그런 스릴러, 전율감을 표현해 내기보다 그 전 과정에서 본회퍼를 견디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내고, 또 알려주고 싶어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를 당당하게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본회퍼는 정의로운 성격이어서 믿음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굳건했기 때문에 정의의 투쟁에 나설 수 있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건 비슷하면서도 꽤나 다른 얘기이다.
30년대 히틀러와 싸우던 본회퍼가 시공간을 넘어 다가오다
영화 초반, 본회퍼가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다니면서 흑인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아이들에게 피노키오의 교훈이 무어냐고 묻는다. 아이 하나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한 아이가 명석한 답을 내놓는다. 올바른 삶을 살지 않으면 결국 피노키오처럼 인형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본회퍼는 믿음을 올바로 갖기를 원했던 목사이다. 이 영화 역시 본회퍼처럼 믿음이 오염된 작금의 기독교에 대해 얘기하고 설법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종교적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설교’ 영화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만든다.
그런데 그게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이 영화를 만든 토드 코마르니키 감독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극우 광신도들의 잘못된 믿음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고 있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만큼 그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야 할 나라도 없다. 이 영화의 시의성은 그래서, 최고로 높은 수준이다. 기독교인들이 왜 저렇게 됐을까. 영화는 1910년대와 30년대 그리고 45년 본회퍼의 최후를 오가며 낯선 공간과 시간의 얘기를 하는 척, 보는 사람들이 각자 살고 있는 장소에서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영화는 시공간을 넘어 동일화를 만들어 낸다. 1930년대 본회퍼가 나치와 히틀러에 맞서 싸울 결심과 행동에 들어가는 모습은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울컥울컥 스며 나오는 그 무엇과도 같은 느낌인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은 극우화 되고 있으며 극우 20대 남성들이 집단적 린치를 가하려고 틈을 노리고 있다. 히틀러를 숭상하는 현실의 이상한 지도자들이 투표로 당선이 되고, 곧 이어 쿠데타를 시도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 히틀러의 부활이다. 영화 ‘본회퍼 : 목사 스파이 암살자’는 그 암흑과 공포의 시대가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수입사가 부제를 ‘목사 스파이 암살자’로 붙인 데는 이유가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은 처음에 평화주의자인 목사로 시작하지만 나중엔 영국을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하고 마지막에는 ‘발키리 작전’에 참가하는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그런 순서의 영화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뜻.
독재에 맞서는 것은 연대의 힘이라는 메시지
본회퍼는 1930년 뉴욕 유니언 신학을 다닐 때 흑인 친구와 함께 이유없는 인종차별의 구타를 당하면서 세상을 재인식하게 된다. 1932년 그가 미국에서 독일로 돌아 온 때는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자 독일노동당’, 곧 나치(앞글자 민족사회주의, Nationalsozialist를 축약한 조어)당이 18%를 득표했던 때이다. 본회퍼의 아버지 칼 본회퍼(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는 아들 디트리히 본회퍼(요나스 다슬러)에게 그들은 점점 더 독일을 장악할 것이며, 빵만 주면 투표하는 사람들을 모을 것이고, 베르사유 조약을 자기 멋대로 이용하며, 자신들의 모든 잘못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로 감추려 한다고 말한다. 아들 디트리히는 소문과 분노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한가한 사람이라는 양 아내와 가족들에게 “아직도 사람들(대중)을 믿느냐?”고 말한다.
본회퍼가 대 나치 투쟁 전면에 나설 결심을 하는 것은 자신이 교회에서 가르친 아이들이 유겐트가 되는 것을 보고 나서이다. 무엇보다 토마스 니뮐러 주교(오거스트 디엘)로부터 나치가 만든 제3제국교회가 성경의 십계명을 십이계명으로 바꾼 것에 대해 듣고 절망과 분노를 느낀다. 십이계명은 총통을 경외할 것 그리고 혈통의 명예를 순수하게 지킬 것을 덧붙인 것이다. 십이계명을 전환점으로 본회퍼와 니뮐러는 자신들의 조직인 ‘고백교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에 나선다.
니뮐러 주교는 체포되기 전 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함의를 다 담아내고 있다.
“나치가 처음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기에 침묵했습니다.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전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유대인을 잡아 갈 때도 나는 너무 늦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요. 나치가 나를 잡으러 올 때 나를 위해 대변해 줄 사람이 과연 남아 있을까요?”
기독교를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고 싶은 선한 욕망의 영화
한편에서는 기독교가 세상을 망치고 한편에서는 기독교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고 싶어 한다. 그런 선한 욕망이 돋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영화 ‘본회퍼 : 목사 스파이 암살자’이다. 아주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퀄리티가 듬성듬성 걸린다. 이 영화를 잘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본회퍼에 대해 위키백과나 나무위키를 찾아보고 그의 생애를 대략 좀 알고 보면 영화가 훨씬 잘 들어온다. 읽고, 공부하고 보시라. 영화를 보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다. 진부한 얘기를 덧붙이자면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본회퍼를 알게 되면 본회퍼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더 봐야 할 작품일 것이다. 그래야 ‘못난 교회들’이 본회퍼를 욕되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난 4월9일 개봉했다. 19일 현재 7621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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