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다
다큐멘터리, 특히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은 평론가에겐 다소 당위의 압박감 같은 것일 수 있다. 이건 봐야 해, 이건 써야 해, 같은 말이 입 속에서 뱅뱅 돌 수밖에 없다. 이런 다큐는 당위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감동의 국면으로 페이지 터닝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다큐 ‘다시 만날 조국’을 기획한 프로듀서(정상진), 혹은 연출을 한 감독(정윤철)에게 달려 있다. 무엇보다 푸티지(footage)가 매우 유효 적절하게 구비되고 배치돼 있어야 한다. 조국을 다룬 두 번째 다큐 ‘다시 만날 조국’은 어느 지점에 있을까. 역시 당위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면 대중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분루(憤淚)를 흘릴 수 있는 감동을 줄 것인가. 더 나아가 대중관객들 모두에게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이끌어 갈 혁명적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
당위냐, 감동이냐, 혁명적 동기 부여냐로 가는 길 위의 3개 ‘문지방’
‘다시 만날 조국’에는 넘어서야 할 ‘문지방’이 좀 있다. 첫째, 일단 보는 게 고통스러울 것이라며 지레 겁먹게 되는, 선입견의 문지방, 둘째, 우리가 다 아는 얘기일 것이라는 식의 자만과 매너리즘의 문지방이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혹은 일주일 내내, 아니면 한 달 동안 내리 봐왔던 뉴스의 종합판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 번째 문지방은 일부 다큐가 갖고 있는 것처럼, 지식인들의 선민주의가 배어 있지 않겠느냐는 오해 같은 것이다. 아니면 다소 지나친 영웅주의와 찬양조의 어투로 채워져 있지 않을까, 라는 걱정 같은 것이다.
이번 조국 다큐는 그 세 가지의 허들(hurdle)을 피하고 넘어가려 세심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세 가지 약점은 세 가지 장점으로 극복하면 된다. 영화에서의 장점이란 좋은 장면 세 개를 말하는 것이다. 오래 전 타계한 미국 영화감독 하워드 혹스의 얘기대로 좋은 영화는 좋은 장면 세 개쯤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만날 조국’의 좋은 장면 세 개는 어떤 것일까.
이번 조국 다큐 역시 처음 30분 정도는 고통스러워서 보기가 힘이 든다. 불과 4~5년 전이지만 조국이 청와대 민정수석이 되고 이후 법무부 장관이 된 뒤 먼지털이 식으로 온 집안, 특히 딸인 조민까지 샅샅이 검찰의 표적 수사를 받는 과정을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 모두에게 이 30분은 자책과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조국이 표적이 될 때, 마치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그와 거리를 두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녀 입시에 대해 자신들이 대처하는 방식 역시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으면서도 조국은 법무장관이기 때문에 원칙과 공정에 더욱 더 엄격해야 한다는 위선의 말을 내뱉곤 했었다.
한국 사회는 기이하게도, 노무현처럼 대학을 안 나온 상고 출신의 대통령이나, 소년공 출신이자 검정고시로 대학을 간, 그것도 SKY가 아닌 대학 출신의 정치인도 혐오의 대상이지만, 자신보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나오고, 대학교수에다 장관까지 했고, 게다가 기분 나쁠 만큼 잘 생긴 조국 같은 사람(영화 속에서 소설가 조정래 씨의 워딩 그대로이다) 역시 혐오와 억압의 대상이 된다. 지식인들 중 일부는 그 시절, 곧 조국이 탄압받던 시절 거의 모두가 그 혐오의 전선에 서서 그에게 돌을 던지는 데 앞장서거나 일조했다.(진중권 김경률 강양구 권경애 서민 등 ‘조국 흑서’의 공동 저자들을 생각해 보라)
첫 번째 좋은 장면 ‘추미애의 토로’, 두 번째 ‘정경심 인터뷰’
‘다시 만날 조국’에서 좋은 장면 첫 번째는 민주당의 민낯에 대한 추미애 전 법무장관의 토로이자 고해하는 장면이다. 추 전 장관은 민주당이, 당시 당 정치에 걸림돌이 된다며 끊임없이(이 ‘끊임없이’가 중요한데) 조국에게 사과를 요구했던 점을 비판한다. 이에 대한 조국의 증언도 잘 담아내고 있는 점도 이 다큐의 장점이다. 조국은, 민주당도 그 당시 나를 구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고립무원이었다며 인간적 섭섭함을 내비친다. 추미애는 문재인 당시 청와대 정부에 대해서도, 윤석열을 통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던 점을 두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 점도 이 다큐의 날카로운 비수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상당히 민감한 멘트들이었을 것이다.
이 다큐의 좋은 장면 두 번째쯤의 것에 해당하는 부분은 역시 정경심 씨의 인터뷰이다. 정 씨는 다큐에서 두 번쯤 출연하는데 하나는 그녀가 투옥되고 딸과 아들, 특히 딸 조민 씨가 사회적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을 때 자신을 면회 온 조국에게 했던 말을 들려주는 부분이다. 이 인터뷰는 매우 공들여(앵글 구도 조명 등등) 찍었고, 감정적으로 세심하게 찍었으며, 무엇보다 예민한 정치적 이슈의 해당 당사자 얘기를 공정하게 담아내려는 태도가 느껴진다. 정경심 인터뷰는 이번 조국 다큐의 하일라이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정경심 씨의 얘기를 직접, 공개적으로 들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라도 이 다큐는 만들어야 할 의미가 충분했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다시 만날 조국’의 세 번째로 좋은 점 - 장면이 아니라 영화의 관람소감 같은 느낌 - 은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역사적 상처에 대한 자기회복력을 강화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 다큐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목도해야 하는 인물은 역시 윤석열이다. 그게 가장 힘든 일이다. 욕지기가 나기도 한다. 윤석열의 낯짝을 자꾸 내비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야말로 이 다큐의 대중성이나 흥행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요인일 수 있겠으나, 그것도 보다 보면 어느덧 그가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 역시 별 수 없이 역사의 뒤안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지성의 비관은 의지의 낙관과 교차된다. 우리가 지난 수 년간의 끔찍했던 사건들, 참혹한 역사들을 그래도 잘 견디고 이겨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 자부심을 새삼 자각시켜 준다는 점에서 이 다큐는 큰 역할을 한다.
역사 더럽히는 후진 ‘우파 다큐’ 말고 참혹한 역사 이겨낸 기록
조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프로파간다 영화들이 설친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치적을 치켜세우는 다큐 ‘하보우만의 약속’이 한 이름 있는 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지를 않나,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 같은 거짓의 다큐가 버젓이 제작되기도 하고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 같은 시대착오적 제목의, 윤석열 옹호 영화를 내놓으면서 좌파들의 방해로 극장이 자신들 영화를 받아주지 않는다며 생떼를 쓰기도 한다. 극장에서의 개봉 여부는 철저하게 영화에 대한 상업적 이윤에 의해 갈라진다. 극장 문은 시장이 열어 주는 것이지 좌파나 우파가 열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들 ‘우파’ 영화들은 마치 1930년대 나왔던 ‘뉘른베르크 1935’ ‘의지의 승리’ ‘신념의 승리’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완성도 차이는 초등학생과 대학원생 차이지만 어쨌든 후자들도 히틀러와 나치를 찬양하는 도구가 됐던 작품들이다. 그때의 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나중에 전범 취급을 받았다.
‘다시 만날 조국’은 온갖 ‘후진’ 다큐에 맞서 프로파간다 영화의 진영을 지키고 있는 작품이다. 한편에는 저급한 다큐가 있고 한편에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파트2’같은 괴력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있다. 다큐 ‘다시 만날 조국’은 현재 투옥 상태에서 홀로 견디고 있는 조국마냥 외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다큐가 이런저런 시비나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는 건, 작품이 지녀야 할 필요충분조건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잘 찍었고 잘 정리했으며 잘 편집했다. ‘다시 만날 조국’은 일명 조국 사태 후 현재까지 약 5년간 보여진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만날 조국’을 통해 조국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그 질문의 칼날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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